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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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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민주화 개점휴업

중소기업 대표, 자영업자, 구직자 등 박근혜 대통령이 선거운동 때 직접 만나 경제민주화 약속했던 이들에게
경제민주화의 현주소를 묻다… 달라진 것 없는 현실에 하나같이 깊은 배신감 토로
등록 2013-10-23 08:57 수정 2020-05-02 19:27
“이번주는 이렇게 가자고. 경제민주화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까칠남’ 아나운서(이동건)가 시청률 20% 달성을 위한 비장의 아이템으로 경제민주화를 꺼내들자, 방송사 스태프들이 피식거리며 비웃는다. PD의 일갈. “(어이없다는 듯) 경제민주화가 재밌냐? 넌 꼭두새벽부터 경제민주화 얘기 듣고 싶냐고.”(KBS2 )
하릴없이 TV 드라마를 켜놓고 있다가 ‘경제민주화’란 단어에 화들짝 놀랐다. 언제부터 드라마에서도 경제민주화 타령이었나. 하긴 불과 200여 일 전만 해도 경제민주화는 대선 정국을 뒤흔드는 시대적 화두였다. 박근혜 후보는 헌법 119조 2항(경제민주화 조항)의 산파 역할을 한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을 영입해 ‘보수 색채’를 탈색시켰다. 선거운동 기간엔 중소기업인·자영업자·샐러리맨들의 손을 잡으며 경제민주화를 입이 닳도록 부르짖었다. 경제민주화란 단어는 ‘성큼’ 우리 일상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이젠 조롱의 대상밖에 안 된다. 경제민주화란 단어 뒤에 후퇴·실종·포기 등의 부정적인 단어가 따라붙은 게 결정적인 원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이후 경제민주화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제시한 국정목표에서 경제민주화란 용어 자체가 슬그머니 빠지더니, “(경제민주화가) 거의 끝에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7월), “대기업 옥죄기로 변질되지 않도록 하겠다”(8월)고 김을 뺐다.
그런데 꺼진 줄로만 알았던 경제민주화의 불씨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동양그룹 사태를 계기로, 새누리당과 공정거래위원회 등에선 금산분리 강화를 주장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지난 10월14일 시작된 국회 국정감사장에는 재벌 총수를 비롯한 기업인이 하루 수십 명씩 증인으로 불려나와 질타당했다.
은 박근혜 대통령이 선거운동 기간에 직접 만나 경제민주화를 약속했던 이들을 지면에 불러냈다. 이들에게 경제민주화는 일감 몰아주기니 금산분리니 하는 뜬구름 잡는 얘기가 아니라, 먹고사는 일이 달린 삶 그 자체였다. 경제민주화는 누군가에겐 잊혀졌거나 재미없는 레토릭에 불과하지만, 누군가에겐 ‘119’ 구조를 요청하고 싶을 만큼 여전히 절박한 문제다. _편집자
서울 광진구 구의동에서 아귀찜 식당을 하는 민상헌 사장은 지난 대선 때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민 사장은 지금 “서민에게 세금 폭탄만 안겨주는 박근혜를 지지했던 건 통탄할 노릇”이라고 후회한다. 지난 10월16일 오후에 찾은 민 사장의 가게가 텅 비어 있다.정용일

서울 광진구 구의동에서 아귀찜 식당을 하는 민상헌 사장은 지난 대선 때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민 사장은 지금 “서민에게 세금 폭탄만 안겨주는 박근혜를 지지했던 건 통탄할 노릇”이라고 후회한다. 지난 10월16일 오후에 찾은 민 사장의 가게가 텅 비어 있다.정용일

400㎡(약 120평) 제법 널찍한 공장 안은 침침했다. 책상의 절반은 비어 있었다. 50대 직원 16명이 부품을 조립하며 앉아 있는 책상 위쪽 전등 불빛만 희미했다. 올해 들어 공장을 떠난 11명이 앉았던 자리는 다시 채워지지 않았다. 주요 납품처였던 대기업과의 거래가 끊기면서 일감이 줄어든 탓이다.

“중소기업 대통령이 되겠다”는 약속

지난 10월15일 경기도에 위치한 공장에서 만난 서동채(62·가명) 대표이사는 “은행 빚 갚기에도 벅차서 공장을 팔려고 부동산에 내놨는데 보러 오는 사람도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1979년 회사 창업 이후 최대 위기다. 엘리베이터 부품을 만드는 이 회사는 지난해 30억원의 매출을 올린, 나름대로 견실한 중소기업이었다. 그런데 연 17억~18억원 규모의 스위치를 납품해온 현대엘리베이터에서 단가 인상을 거부하면서 회사가 휘청이기 시작했다. 스위치에 들어가는 은값은 1년 새 3배, 철판값은 1.5배 올랐는데 납품단가는 1만7천원에서 1만3천원대로 되레 깎였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작정이나 한 듯이 부품 구매를 입찰 방식으로 돌려버렸다. 납품 계약은 최저가를 써낸 다른 업체가 따갔다.

서 대표는 “대기업이 1만원짜리 단가 제품을 들고서 ‘이거 누가 만들래?’ 하면 중소 하청업체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9500원에 만들어주겠다’고 하는데 대기업이 뭐가 아쉽겠냐. 부품업체가 제조업의 뿌리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중소 부품업체가 도산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1년 전,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와 마주 앉았을 때도 그는 이런 상황의 부당함을 하소연했다.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대강당에서 중소기업 대표, 소상공인 등 120여 명이 참석한 자리였다. 서 대표는 “원자재 값이 올랐으니 납품단가를 인상해달라고 요구하면 대기업이 다른 업체와 부당한 경쟁을 붙여서 하루아침에 납품을 끊는 불공정행위가 아직도 근절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박근혜 후보는 “중소기업을 살리는 방향으로 경제 패러다임이 바뀔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중소기업 대통령이 되겠다”는 약속을 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바로 얼마 뒤, 연말·연초 사이에 1차 협력업체(벤더)인 엘리베이터 부품업체 2곳이 부도가 났다. 박수 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서 대표는 외상으로 부품을 대줬다가 1억5천만원을 받지 못했다. 매출이 뚝 떨어지고 돈까지 떼이니, 직원들 월급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은행과 신용보증기금 등에서 끌어다 쓴 돈은 7억~8억원에 이른다. 공장을 팔면 7억~8억원은 손에 쥘 수 있다. “늘그막에 욕먹지 않고 겨우 빚은 막을 수 있는 정도”다.

“경제민주화 후퇴하는 것 같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 공정거래법과 하도급법에선 경제민주화와 관련된 몇 가지 의미 있는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대기업의 불공정행위를 검찰에 고발하는 권한은 공정위만 갖고 있었는데 감사원, 조달청, 중소기업청으로 확대됐다. 부당한 단가 인하를 한 대기업을 상대로 중소기업이 손해액의 3배 범위 안에서 ‘징벌적 손해배상’ 소송을 걸 수 있는 길도 열렸다. 중소기업협동조합에는 대기업과 납품단가를 조정할 수 있는 협의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서 대표이사는 제도 변화에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이미 실망해봐서다. 부당 단가 인하는 기존 공정거래법으로도 제재할 수 있었다. 공정위가 과징금 부과에 인색했을 뿐이다. 중소기업협동조합이 대기업에 납품단가 조정을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은 이미 2011년에 부여됐다. 그러나 2년간 실제 조정된 건은 단 1건에 불과했다.

서 대표는 “대통령이 대기업을 움직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8월 대기업 총수들을 청와대로 불러 “경제민주화가 대기업을 옥죄는 게 아니다”라며 다독였다. 기업들은 경제민주화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신호를 재빨리 알아챘다. 민주당 을지로위원회가 ‘불공정한 갑을관계를 바로잡겠다’며 중재에 나섰던 배상면주가 사건 등에선 대기업 쪽 태도가 돌변해 합의가 파기됐다. 서 대표는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했다. 스스로 ‘보수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그가 보기에도 “경제민주화는 처음 하려던 것보다 후퇴하는 것 같다”

2012년 10월29일 오후, 박근혜 후보는 서 대표를 만난 뒤 여의도 63빌딩으로 향했다. ‘골목상권 살리기운동 전국대표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문재인·안철수 후보도 이곳에 달려왔다. 한국외식업중앙회, 한국공인중개사협회 등 80여 개 자영업단체 회원 3천여 명이 모인 자리였다. 경제민주화가 대선의 주요 이슈가 되면서, 당선을 위해 소상공인들의 표심을 반드시 잡아야 했다.

“대형마트, 대기업 SSM(기업형슈퍼마켓)이 골목골목 들어서면서 소상공인의 삶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경제민주화 왜 하려고 합니까. 바로 골목상권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동안 우리 골목상권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건, 정책의 미비도 있었지만 정작 있는 정책들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꼼꼼하고 빈틈없이 챙겨나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박근혜 후보가 연설하는 중간중간 박수가 14번이나 터져나왔다. 박 후보는 대형마트 사전 입점예고제 도입, 카드·은행·백화점 등 3대 수수료 인하 등을 약속했다.

음식점 주인들, 배신감에 치를 떨어

서울 광진구 구의동에서 아귀찜 식당을 운영하는 민상헌(60) 사장도 열심히 박수를 쳤다. 박수만 친 게 아니었다. 그 뒤엔 전국을 돌아다니며 음식점 주인들을 만나 “박근혜 후보를 찍자”고 독려했다. “박근혜 후보가 음식점 주인들을 위한 가장 많은 공약을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선거대책본부장을 맡고 있던 외식업중앙회는 그해 12월4일 박근혜 후보 지지를 공식 선언했다. 회원 42만 명을 거느린 표밭이 움직였다.


“대기업에 줄여준 법인세를 다시 받아낼 생각은 안 하고, 서민에게만 세금 폭탄을 때리는 박근혜 지지 운동을 했던 게 통탄할 노릇이다.”-서울 광진구 구의동 아귀찜 식당 사장 민상헌씨

1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지난 10월11일, 외식업중앙회 소속 회원들은 머리띠를 묶고 여의도 거리로 나와 박근혜 정부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다. 정부가 음식점의 농수산물 재료구입비에 대해 부가세를 감면해주던 것을 매출액의 30%로 금액을 제한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외식업 전체 매출에서 농수산물 매입액이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44.8%다. 음식점 주인들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민 사장도 “대기업에 줄여준 법인세를 다시 받아낼 생각은 안 하고, 서민에게만 세금 폭탄을 때리는 박근혜 지지 운동을 했던 게 통탄할 노릇”이라고 분노했다.

민 사장은 “35년째 음식장사를 했지만 올해가 최악”이라고 느낀다. 그는 20대에 우동집을 연 것을 시작으로 일식집, 찜닭집 등을 운영해온 구의동 먹자골목 터줏대감이다. 35평 남짓한 식당의 테이블 14개 가운데 절반만 채워도 그날은 성공한 장사다. 메뉴는 5천원짜리 낙지수제비, 3만2천원짜리 아귀찜 따위다. 하루 매출은 50만원가량. 주방과 홀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3명의 인건비 월 700만원, 재료비 월 700만원을 빼고 나면 민 사장과 부인의 인건비도 제대로 안 남는다. 지난해보다 매출이 30% 이상 줄었다. 그나마 자가 건물에서 장사해서 월세 걱정은 없으니 버틴다. 근처 식당들의 월세는 350만~600만원에 이른다. 월세 부담 탓에 망하는 음식점이 주변에 수두룩하다. 그는 꼬박꼬박 2.7%씩 카드수수료를 낸다. 박근혜 후보가 약속한 카드수수료 인하를 위한 여신전문금융업법 개정안은 아직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민 사장은 참다못해 지난 9월 초, 박근혜 대통령 앞으로 A4 2장짜리 손편지를 써서 부쳤다. ‘대통령이 자영업자들의 어려운 현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국내 개인 음식업자는 67만 명이다. 이 가운데 51%가 지난해 영세자영업 기준(연매출 4800만원) 미만의 매출을 기록했다. 국세청이 홍종학 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를 보면, 개인 음식업자 1인당 평균 매출액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5년간 5.1% 늘어난 반면, 대기업이 운영하는 음식점의 매출액은 69.6%나 증가했다. 민 사장은 “대기업 프랜차이즈 음식점이 하나 들어서면 그곳이 블랙홀이 된다. 주변 음식점은 다 망한다. 대기업들이 심지어 구내식당, 식자재 유통업체까지 다 하겠다고 나서지만 정부가 이를 막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올해 동반성장위원회는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 신청 대상을 음식·숙박·운수업 등으로 확대했지만, 민간기구가 대기업에 사업 축소나 철수를 ‘권고’하는 수준이라 실효성이 떨어진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 ‘경제민주화’를 말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2012년 10월29일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가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대강당에서 중소기업 대표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한겨레 이정우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 ‘경제민주화’를 말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2012년 10월29일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가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대강당에서 중소기업 대표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한겨레 이정우

지난 10월16일 아침, 민 사장을 만나고 구의동 먹자골목을 빠져나가는 길. ‘대상베스트코’ 마크를 단 차량 한 대와 마주쳤다. 대상그룹 계열사인 이 회사는 최근 중소 식자재 유통업체 수십 곳을 흡수합병하면서 매출이 1년 새 33배 늘었다. 일반 음식점에까지 재료를 배달해준다. 회사 지분은 지주회사인 (주)대상이 70%, 임창욱 명예회장과 두 딸인 임세령·임상민씨가 각각 10%씩 갖고 있다. 재벌 총수 가족이 빵집·자전거포·음식점에 이어 중소 식자재 유통시장까지 넘보고 있는 셈이지만, 이를 제재할 마땅한 방법은 없다.

“전통시장 살리기는 이번에도 안 되나봐”

“장사요? 에이, 안 돼요.” 박근혜 대통령이 가게에 다녀가고 나서 “살림살이가 좀 나아졌냐”고 물었다가 지청구부터 들었다. 2012년 11월12일, 박근혜 후보는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금마시장을 방문했다. 양봉석(66) 사장네 방앗간에도 들러서 기계로 가래떡을 직접 뽑아보고 갔다. “현미 가래떡은 처음 먹어본다”던 박근혜 대통령은 떡값이라며 양 사장 손에 굳이 2만원을 쥐어주고 갔다. “전통시장이 서민경제 체온계라고 생각된다. 여기가 썰렁하고 장사가 안 된다는 분들이 많으면 그만큼 국민 생활이 어렵다는 것이다.” 박근혜 후보가 당시 금마시장 상인회와의 간담회에서 했던 말이다.

금마시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썰렁하다. 2004년 현대식 건물로 신축된 금마시장 안쪽 점포 29곳 가운데 8곳은 아예 텅 비어 있다. 장사가 안 돼서 문을 닫아버린 탓이다. 금마시장의 하루 이용객은 100명이 채 안 된다. “혼자 일항께 버티지, 용돈이나 벌라고 자리 지키고 앉아 있어요. 노가다 해보려고 해도 오라고도 않고, 경비원 말고는 할 일이 없응께.” 양봉석 사장은 25년째 방앗간을 지켜왔다. 하지만 점점 매출이 줄어 요즘은 한 달에 50만~60만원 버는 게 고작이다. 금마시장 안쪽에서 생선가게를 하는 박병태(39·가명) 사장네도 사정은 비슷하다. 박 사장은 “매달 200만원 받는 월급쟁이만큼도 못 번다. 저축은 못하고 그냥 밥만 먹고 산다. 여름엔 한 달에 50만원씩 나오는 전기요금 대기에도 빠듯하다”고 푸념했다.

금마면 인구는 5천여 명이다. 금마면 중심가엔 농협 하나로마트 등 마트가 3곳 있다. 게다가 차로 5~10분 나가면 익산시다. 익산 시내엔 롯데마트·이마트·삼성홈플러스 등 대형마트가 3군데나 떡하니 들어서 있다. 동네 어귀마다 하나로마트와 GS수퍼마켓 등도 있다. 이러니 금마면 사람들조차 굳이 전통시장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새누리당 지지자인 양봉석 사장도 ‘전통시장 살리기’에서만큼은 불만이 많다. “DJ는 전북엔 암것두 없어당께. 민주당은 말만 하지 해주는 게 없고. 새누리당은 시방 믿어볼 만하다는 분위기야. 그런데 전통시장 살리기는 이번 대통령도 안 되나봐. 대형마트 수를 축소하기 전엔 전통시장 살리기는 안 된당께.”

“돈 풀리는데 고용시장 훈풍 안 분다”

박근혜 후보는 중소도시에 대형마트가 입점하려면 사전에 신고하고 주민설명회를 거치도록 하는 제도 도입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대형 유통업체들의 ‘꼼수’는 제도의 울타리를 뛰어넘는다. SSM이나 대형마트에 대한 규제를 피하기 위해, 동네 슈퍼마켓에 상품을 공급하는 신규 사업을 확대하는 식이다. 울산에선 지난 8월 홈플러스 SSM이 지자체도 속이고 ‘기습 개점’해서 중소상인들과 갈등을 빚었다.

“일자리 창출이 최고의 복지다. 중소기업이 땀 흘려 노력하면 기술 개발하고, 좋은 인재를 구해서 매출을 늘린다는 희망이 있어야 중소기업에서도 열심히 할 맛이 난다.” 2012년 11월6일, 인크루트·잡코리아·사람인 등 취업포털 서비스 회사에서 일하는 30대 직원들과 도시락을 먹는 간담회 자리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은 중소기업과 경제민주화 이야기를 화두로 꺼냈다.

2012년 11월12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전북 익산시 금마시장의 방앗간을 방문해 직접 뽑아낸 현미 가래떡을 먹으며 양봉석 사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박 후보는 이날 “전통시장은 서민경제의 체온계”라고 말했지만, 1년이 지난 지금도 금마시장은 여전히 손님이 없어 썰렁하다.사진공동취재단

2012년 11월12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전북 익산시 금마시장의 방앗간을 방문해 직접 뽑아낸 현미 가래떡을 먹으며 양봉석 사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박 후보는 이날 “전통시장은 서민경제의 체온계”라고 말했지만, 1년이 지난 지금도 금마시장은 여전히 손님이 없어 썰렁하다.사진공동취재단

취업 현장의 속사정을 샅샅이 꿰고 있는 직원들도 중소기업·비정규직 문제와 관련된 제안을 많이 했다. “비정규직 대다수가 콜센터 직원인데, 10년 전이나 5년 전이나 급여가 같다. 대부분 은행·보험·통신사들이 고용한다. 정부가 강하게 이들 대기업을 압박해서 급여를 올려주면 다른 직종에서도 따라 올려줄 것 같다.” “중소기업이 애써 신입사원을 뽑아서 교육시키면 대기업이 빼앗아가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박근혜 후보도 “공공부문부터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작업을 하겠다” “중소기업을 활성화시키겠다”며 맞장구를 쳤다.

박근혜 정부 국정목표 1순위는 일자리다. 2017년 고용률 70%를 달성하기 위한 여러 정책들이 쏟아져나온다. 일자리 문제를 놓고 박근혜 대통령과 대화했던 직원들은 1년이 지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당시 간담회에 참석했던 김재현(가명)씨는 “고용률을 높이기 위해 돈이 많이 풀리고 있긴 하다. 그러면 일자리가 늘어나는 게 맞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고용시장엔 훈풍이 안 분다. 취업포털 서비스 회사들도 매출이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올 1~9월 고용률은 64.2%였다. 특히 15~29살 청년층 고용률이 사상 처음 40% 밑으로 떨어졌다. 4년 뒤 고용률 70%에 도달하려면 매년 47만 개꼴로 일자리가 늘어나야 하는데, 올해 늘어난 취업자 수는 22만6천 명에 불과하다. 일자리가 늘어나려면 중소기업이 살고 양극화가 해소돼 내수가 활성화돼야 하는데 좀처럼 해법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대기업한테 일자리 늘려달라고 ‘부탁’하는 거다. 부탁하는 처지에 대기업 규제가 잘될 턱이 없다.

‘고갱이’조차도 빠진 경제민주화

간담회에 참석했던 이지원(가명)씨는 워킹맘이다. 이씨는 “육아 때문에 일을 그만뒀다가 재취업하면 대형마트 계산원밖에 할 일이 없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고 했다. 정부가 여성들을 위해 시간제 일자리를 늘리겠다고 하지만, 안정된 일자리로 느껴지진 않는다. 요즘 취업 시장이 얼마나 냉정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다. “2005년 입사했을 때만 해도 우리 사이트에 아르바이트 이력서를 올리는 구직자의 70%가 대학생이었어요. 그런데 이젠 35살 이상 중장년층이 더 많아요. 직업인으로 일해야 할 사람들이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는 거죠.” 현실이 이런데도 일자리의 질보다 양에만 집착하는 박근혜 정부가 이씨는 영 미덥지 못하다. “경제민주화라는 용어를 갖다붙인다고 해서 뭐든지 다 해결될 것처럼 말하는데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아요. 일베에서도 ‘민주화’를 안 좋은 표현으로 쓰잖아요. 경제민주화라고 이름만 붙인다고 다는 아니죠.”

“모든 국민들이 100% 행복한 나라를 위한 첫걸음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후보 선거공약집의 경제민주화 항목을 설명하는 문구다. 재벌 개혁, 노동권 등 ‘고갱이’조차도 빠진 경제민주화, 첫걸음부터 비틀거린다. 박근혜 후보가 경제민주화를 직접 약속했던 국민들마저도 지금 행복하지 않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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