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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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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의 ‘감청자유’ 보장하는 통비법

광범위한 도청 가능케 하는 ‘통신제한조치 허가서’… 2010년 헌재 헌법 불합치 판정 뒤
감청영장 기간 연장 ‘법 효력’ 상실했으나 재청구 방식으로 지속되고 있어
등록 2013-09-11 02:26 수정 2020-05-02 19:27
헌법재판소가 통신비밀보호법 제6조 7항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린 2010년 12월28일,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범민련 탄압 대응 시민사회단체 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과 변호인단이 통비법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김명진

헌법재판소가 통신비밀보호법 제6조 7항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린 2010년 12월28일,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범민련 탄압 대응 시민사회단체 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과 변호인단이 통비법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김명진

누군가 당신 몰래 수년 동안 유·무선 통화·우편물을 들여다보고 있다면? 실시간으로 인터넷 접속 사이트와 메신저 대화 내용을 감시하고 있다면? 당연히 불법행위다. 그러나 수사기관이 법원으로부터 ‘통신제한조치 허가서’(감청영장)를 발부받았다면, 이토록 광범위한 감청이 가능하다. 수사가 끝날 때까지 당신은, 당신에 대한 감청 사실을 알 수 없다. 법이 그렇다. 헌법에 규정된 통신비밀 보호를 위해 탄생한 통신비밀보호법(통비법)이 되레 불법 도청 ‘합법화’에 기여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3851건 중 3714건 국정원 요청

통신제한조치(감청)를 가장 많이 활용하는 기관은 국가정보원이다. 지난해 방송통신위원회 발표 자료를 보면, 2012년 상반기 152개 통신사업체에 들어온 정보·수사기관의 감청 협조 요청은 3851건(전화번호 수 기준)이며, 이 가운데 국정원 요청 건수는 3714건에 달했다. 이런 통계엔 국정원이 직접 수행한 감청은 포함되지 않는다. 국정원은 내란 음모 혐의 등으로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과 당직자들을 수사하면서 2011년부터 3년가량 감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집행된 통신제한조치 범위나 기간은 아직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통신제한조치를 한 경우, 공소를 제기하거나 불기소 처분이 있는 날로부터 30일 이내에 대상자에게 통지해야 한다. 그러나 관할 지방검찰청 검사장의 승인을 얻는 경우, 무기한 통지 유예가 가능하다. 일본에도 통지유예제도가 있지만, 재판관이 허가 여부를 판단하며 60일 이내에는 반드시 감청 사실을 통지하도록 하고 있다.

2010년 12월, 헌법재판소는 무기한 감청 허용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 2009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이 아무개 사무처장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된다. 검찰은 2004년 발부받은 통신제한조치 허가서를 14차례나 연장시켜 30개월 동안 이 사무처장의 전자우편·전화 등을 감청했다.이런 수사가 가능했던 건, 범죄 수사를 위한 통신제한조치 기간을 2개월(국가안보를 위한 경우엔 4개월)이 넘지 않도록 규정해놓고 ‘허가 요건이 존속하는 경우’ 기한 연장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한 통비법 제6조 7항 때문이었다. 헌재는 해당 조항에 대해 재판관 4(헌법 불합치) 대 2(위헌) 대 3(합헌)의 의견으로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당시 헌재는 “통신제한조치 기간 연장에 사법적 통제 절차가 있다는 사정만으로는 개인의 통신비밀이 과도하게 제한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며 “그럼에도 총연장 기간이나 횟수를 제한하지 않고, 계속해서 연장될 수 있도록 한 법률 조항은 침해의 최소성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해당 조항을 2011년 12월31일까지 잠정 적용하기로 하고, 빠른 시일 내에 새 법률을 마련할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이처럼 위헌성이 지적된 지 3년이 다 돼가도록 법 개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통비법은 2001년 개정 이후 내용상 거의 변화가 없는 상황이다. 잠정 적용 기간이 지난 통비법 제6조 7항은 효력이 상실된 상태다. 감청영장 기간 연장을 청구하거나 허가할 법적 근거가 없어진 셈이다.

통신제한조치 청구 기각 88건 중 1건

현재 일선 법원에서는 감청영장 연장 대신 영장 재청구가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두 방식 사이엔 실무적으로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게 법조계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그러니까 허가받은 두 달의 감청 기간이 끝났더라도, 통신제한조치를 새로 청구해 법원의 허가를 받는다면 지속적인 감청이 가능하다.


2009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이 아무개 사무처장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된다. 검찰은 2004년 발부받은 통신제한조치 허가서를 14차례나 연장시켜 30개월 동안 이 사무처장의 전자우편·전화 등을 감청했다.

헌재 재판관 재임 당시 통비법 제6조 7항에 대해 헌법 불합치 의견을 냈던 조대현 변호사는 “현행법상 감청영장 재발부 횟수 제한이 없으므로, 감청 기간 연장과 영장 재발부는 현실적으로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며 “헌재 결정 취지를 살리려면 법원이 감청영장을 엄격하게 심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법부에 의한 감청 통제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대법원 자료를 보면, 올해 1월부터 7월까지 전국 법원에서 발부한 통신제한조치 허가서는 88건으로, 청구를 기각한 경우는 단 1건(부분 기각 5건)에 불과했다. 같은 기간 수원지방법원은 21건의 통신제한조치 허가서를 발부했으며, 청구를 기각한 경우는 한 차례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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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권 시절, 도청과 우편물 검열은 암암리에 이루어졌다. 이런 불법행위에 대해 통제가 시작된 건 1993년 통비법이 제정되면서다. 통비법 탄생의 계기가 된 건 1992년 12월 대통령 선거 직전에 터진 ‘초원복집 사건’이었다.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는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현 청와대 비서실장)과 부산 지역 지검장·경찰청장·안기부 지부장 등이 식당에 모여 지역감정을 조장해 선거에 개입하려는 모의를 했는데, 정주영 통일국민당 후보 쪽이 이들의 대화 내용을 몰래 도청해 언론에 공개한 것이다. 여당은 ‘불법 도청’ 문제를 물고 늘어졌고, 영남 표심은 결집했다. 지역감정으로 선거판을 흔들려 했던 ‘악’은, 불법 도청이라는 또 다른 ‘악’에 묻혀버린다. 이런 배경을 뒤로하고 김영삼 정부 출범 첫해에 여야 합의로 통비법이 탄생한다.

모호한 법률이 발빠른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는 동안, 수사기관의 감청 범위는 ‘불법 논란’을 일으키며 확대돼왔다. 2000년대 중반부터 알려진 ‘패킷감청’이 대표적이다. 인터넷 회선을 통해 오가는 전자신호를 패킷(Packet) 이라고 한다. 이 패킷을 제3자가 중간에서 가로채면, 인터넷 접속 사이트나 작성하고 있는 전자우편 등을 실시간으로 엿볼 수 있다. 5년 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소속 전직 교사 김형근씨는 자신의 명의로 가입된 인터넷 전용 회선에 대한 법원의 통신제한조치 허가는 위법하다며 2011년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해당 회선을 다른 사람들이 이용했다면, 이들의 인터넷 사용 정보도 수사기관에 노출됐을 터다. 지난해에는 일명 ‘기지국 수사’에 대한 헌법소원이 제기됐다. 기지국 수사란 특정 시간대에 특정 기지국에서 발신된 모든 전화번호를 통신사실 확인자료로 제공받는 수사 방식으로 통비법 제13조 등을 근거로 하고 있다.

100여 가지 범죄 혐의 내사자도 감청 가능

2011년 작성된 법원행정처 용역보고서 ‘통비법상 강제처분에 대한 제도적 개선방안 모색’에는 통신제한조치 허가 요건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통신제한조치를 2개월 동안 수사기관의 재량에 맡기는 것은 헌법상 영장주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으며, 감청 허용 기간을 7일 또는 10일 정도로 축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분석을 덧붙였다.

국가보안법 위반을 의심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감청이 허가되는 건 아니다. 100여 가지 범죄 혐의의 내사자나 피의자에 대한 감청 허가가 가능하다. 광풍 탓에 눈뜨기가 힘들어도, 이번 통합진보당 수사 과정을 꼼꼼히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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