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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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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에 길이 남을 ‘치고 빠지기’

보수언론 보도 분석… 외압 사실 보도 등은 외면하다가 NLL 대화록 유출
기점으로 기사 쏟아냈으나 수세에 몰리면서 보도 열기 가파르게 식어
등록 2013-07-02 06:48 수정 2020-05-02 19:27
국정원이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한 이튿날 조·중·동은 미리 짜기라도 한 듯 똑같은 제목을 뽑았다.

국정원이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한 이튿날 조·중·동은 미리 짜기라도 한 듯 똑같은 제목을 뽑았다.

한국 언론사에 남을 ‘드라마틱한 치고 빠지기’다.

급격히 흥분했다 급격히 잦아드는, 롤러코스터 같은 변곡을 그린다. 이성적 판단을 잃고 정치세력과 한 몸으로 명멸하는 한국 보수 언론들의 보도 편차가 압권이다.

8개월 만에 급히 호명된 ‘재방송’

6월27일치 는 1면 머리에 ‘북 “NLL, 노 대통령에 전화해 물어보라”’는 기사를 올렸다. 기사는 2007년 11월28~29일 열린 남북 국방장관 회담에서 김일철 북한 인민무력부장이 김장수 당시 국방장관에게 한 말을 전했다. 북방한계선(NLL)을 고집하는 그에게 김 부장이 “북남 수뇌회담(정상회담)의 정신과 결과를 모르고 하는 얘기라며 노 대통령에게 전화해 물어보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노무현-김정일의 평화협력지대 논의가 NLL 무력화를 전제로 했다는 주장을 펴기 위한 기사였다. 기시감이 컸다. 2012년 10월9일치 의 김 전 장관 전화 인터뷰 기사(‘NLL 문제 있다는 노 대통령의 말 못 들었느냐며 북 인민무력부장이 2007년 국방장관회담 때 공격’)와 뼈대가 같다. 3면 3단 기사가 8개월여 만에 표현만 살짝 바꾼 채 1면 5단 머리로 둔갑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가 등장해 새 팩트를 확인해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김 전 장관의 지난해 발언을 ‘리플레이’하는 수준이다. 전날 발생한 김무성(불법 입수 의혹)-권영세 (“집권하면 깐다”)의 ‘NLL 대화록 파문’을 상쇄하려 급히 호명된 기사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를 전제로 협의하자”는 노 전 대통령의 제안은 무시됐다. 자극적인 표현만 따서 전체 맥락을 왜곡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NLL을 통해 국정원 대선 개입 후폭풍을 덮으려는 새누리당의 의도에 정확히 부응한 셈이다.

국정원의 NLL 대화록 공개 전까지 대선 개입 사건을 보도하는 의 전략은 ‘외면’에 가까웠다. 지난 4월30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공개한 국정원 직원들 활동 내역(‘오늘의 유머’ 사이트 분석 결과)을 와 는 보도하지 않았다. 4월19일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이 서울경찰청의 외압 사실을 폭로한 다음날(4월20일)부터 5일간 조·중·동은 각각 6개·4개·3개(민주언론시민연합 집계)의 기사를 썼다. 21개와 9개를 쓴 및 와 대조를 보였다. 한 언론학자는 “도저히 보도하지 않을 수 없을 때만 보도하는 방식”이라고 꼬집었다. 는 아예 ‘국정원의 선거 개입은 없었다’는 취지의 부국장 칼럼을 1면(4월24일 ‘대선 여론 조작 목적이었으면 330위 사이트 골랐겠나’)에 싣기까지 했다.


뉴스 실종
YTN ‘단독’ 중단, MBC 통째 누락
국정원 기사가 방송에서 사라지고 있다. 국정원이 개입된 보도 중단, 방송사의 자발적 불방, 편파적인 뉴스 구성 등 방식도 다양하다. 국정원을 전파에서 실종시키려 방송 3사가 총력을 기울이는 모양새다. 6월20일 YTN의 단독 기사(‘국정원의 박원순 시장 비하 SNS 글 2만 건 포착’)가 오전 10시 이후 뉴스에서 자취를 감췄다. ‘내용이 좀 어렵고 애매하다’며 사 쪽이 보도를 중단시킨 까닭이다. YTN 사회부가 지난해 삭제된 국정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의심 계정 10개를 복원해 ‘박 시장을 비하한 SNS 글 2만여 건’을 찾아냈다는 보도였다. 앞서 국정원 직원은 취재기자에게 전화해 “보도국 회의에서 기사 가치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었다”며 국정원의 입장도 반영해줄 것을 요구했다. 국정원이 방송사 내부회의 내용을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자들은 경악했다. 기자들은 사 쪽에서 보도 사실을 국정원에 알려줬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사 쪽은 부인한다. 이번 사태는 국정원 정보관들이 각 언론사를 담당하며 동향 파악을 해온 오랜 악습과도 맞닿아 있다.6월23일엔 MBC에서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을 취재한 기사(‘국정원에서 무슨 일이?’)가 통째로 누락됐다. 심원택 시사제작2부장은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 내용조차 “편향됐다”며 제작진에게 수차례 삭제를 요구하다 방송 자체를 불방시켰다. 김재철 사장 퇴진 이후에도 ‘공영방송의 권력 눈치보기’는 여전한 셈이다.
KBS에선 심각한 보도 불균형이 나타나고 있다. 6월14일(검찰의 대선 개입 수사 결과 발표)부터 6월24일(국정원의 NLL 대화록 공개)까지 대선 개입 사건과 북방한계선(NLL)을 다룬 의 보도 횟수는 각각 4건과 13건이었다.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는 “국정원의 선거 개입 사건에 사실상 침묵으로 일관한 KBS 뉴스는 새누리당이 NLL 대화록을 제기하자 180도 달라져 기획물까지 쏟아내며 NLL 이슈를 확산시키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비판했다.
전국언론노조·한국기자협회·한국PD연합회 등 현업단체와 민주언론시민연합·언론개혁시민연대 등 시민단체는 6월26일 공동성명(총 22개 단체)을 내어 “언론은 정권의 호위대, 민주주의 파괴의 공범 역할을 그만두고 민주주의의 충실한 수호자로 복귀하라”고 촉구했다.

침묵의 형태로 국정원에 면죄부를 주던 조·중·동은 ‘NLL 대화록’ 공개를 기점으로 기사를 쏟아낸다. 대화록이 공개된 다음날(6월25일) 조·중·동은 미리 짠 듯 노 전 대통령의 “NLL 바꿔야” 발언을 1면 머리 제목으로 뽑았다. 새누리당과 보수 언론이 대표적인 ‘NLL포기 발언’으로 거론하는 대목이다. “1992년 남북 기본합의서(NLL을 남북 경계선으로 명시)를 전제로 협의하자”는 노 전 대통령의 제안은 무시됐다. 자극적인 표현만 따서 전체 맥락을 왜곡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NLL을 통해 국정원 대선 개입 후폭풍을 덮으려는 새누리당의 의도에 정확히 부응한 셈이다. 조·중·동은 내년 3월 종합편성채널 재허가를 앞두고 있다.

6월26일치 신문부턴 각 사의 태도에도 차이가 관찰된다. 국정원 발췌록의 ‘원문 왜곡’ 사실이 하나둘 밝혀져 역풍이 불기 시작하면서다. 1면 머리 제목을 ‘대통령의 직분 망각한 2007년 노 발언’이라고 단 가 기존 태도를 유지한 데 비해, 는 사설(‘국정원의 회의록 공개 판단은 부적절했다’)과 논설위원 칼럼(‘NLL이 이슈 밀어내기 수단인가’)으로 국정원과 새누리당을 비판했다.

김무성 거짓 드러나고 양비론 뒤로 숨어6월27일치로 가면 와 의 거리는 더 벌어진다. 는 1면(‘국가기록물 관리의 모순, 여기선 공개 저기선 밀봉’)과 사설(‘국정원 조사, 개혁 염두에 두고 철저히 하라’)에서 각각 국가기록물 제도 개선과 국정원 개혁을 주문했다. 김무성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 총괄본부장과 권영세 종합상황실장의 ‘NLL 공작 의혹’이 불거진 뒤 좀더 차분해진 분위기다. 반면 는 앞의 ‘재방송 기사’를 토대로 새로운 이슈화를 시도한다.

6월28일치 신문에선 조·중·동 모두 한발 더 물러서 ‘도청정치-공작정치’란 양비론 프레임에 몸을 숨긴다. 김 전 본부장의 ‘NLL 대화록’ 해명이 거짓임이 드러난 뒤다. 기사 건수도 확연히 줄었다. 대신 박근혜-시진핑 정상회담에 3~4개면씩 할애했다. 국정원-새누리당의 ‘NLL작전’이 수세에 몰리면서 보수 언론의 보도 열기가 가파르게 식는 모양새다. 와 이 박근혜 대선 캠프와 ‘국정원 NLL 대화록 유출’의 연계 가능성에 보도 역량을 집중해가는 것과는 정반대다. 새누리당은 궁지에 몰리고 있고, 보수 언론은 말수를 줄이고 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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