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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를 움직이는 ‘환관권력’

‘정치 투신’ 때부터 함께해온 네 명의 비서진, 절대적 ‘문고리 권력’ 형성… ‘대통령 박근혜’는 비선 통해 ‘민간인 사찰’한 MB와 얼마나 다를까
등록 2012-12-14 23:42 수정 2020-05-03 04:27
대통령은 불안했다. 신뢰할 수 있는, 그리고 필요하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수족이 필요했다. 공식적인 계통과 체계를 뛰어넘는, 측근들의 친위 조직은 그렇게 탄생했다. 비법과 탈법, 위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정적의 뒤를 밟고 약점을 캤다. ‘충성’이라는 이름 아래 뭉쳤지만, 비밀을 비밀의 영역에 가두려고 검은돈을 주고받았다. 세상에 그 실체가 드러난 순간, 아슬아슬하게 유지돼온 권력의 정당성도 함께 무너졌다.
이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인 박근혜의 측근 리더십을 다시 주목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희끄무레한 장막을 걷어내고 그 리더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망하고자 했다. 여러 차례 ‘문고리 권력’으로 지목돼온 보좌진들과, 그 실체가 여전히 드러나지 않는 ‘그림자 실세’의 이야기를 추적했다. 물음표는,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 있다. 판단은 12월19일 투표장으로 향할 유권자의 몫일 것이다. _편집자
공식적인 계통과 체계를 뛰어넘는 비선 측근 조직의 폐단은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사찰 파동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전국언론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지난 4월2일 청와대 인근에 있는 서울 종로구 청운동 주민센터 앞에서 불법 사찰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공식적인 계통과 체계를 뛰어넘는 비선 측근 조직의 폐단은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사찰 파동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전국언론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지난 4월2일 청와대 인근에 있는 서울 종로구 청운동 주민센터 앞에서 불법 사찰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이재만(46)·이춘상(47) 보좌관, 정호성(43)·안봉근(46) 비서관은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대구 달성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정치에 투신한 1998년부터 한결같이 박 후보를 보좌해왔다, 그러나 이들의 구체적인 신상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박 후보의 수행을 도맡아온 안봉근 비서관 정도가 비교적 언론과의 접촉 면이 넓은 편이지만 그가 보좌진에 합류한 계기에 대해서는 당내에서도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유력한 대선 후보로서의 오늘을 가능케 한, ‘박정희의 딸’이라는 정치적 유산은 단지 상징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아버지의 측근 아들의 지역구와, 그의 보좌진도 함께 물려받았다.
물려받은 지역구에 따라온 비서관

의 취재 결과 안 비서관은 박 후보가 대구 달성군에서 당선되기 전에도 지역구 보좌진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달성군의 역사는 18대 대선을 코앞에 둔 현재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달성은 원래 쌍용그룹 창업자인 김성곤 전 명예회장의 지역구였다. 김 전 회장은 공화당의 재정위원장까지 지낸 ‘박정희의 오른팔’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김 전 회장이 김진만·길재호·백남억 등과 함께 공화당의 ‘4인방’으로 통했다는 점이다. 40년 세월을 거슬러 박근혜 후보 주변에서 다시 ‘4인방’이 회자되는 건 단지 우연일까. 김 전 회장은 야당이 제출한 오치성 내무부 장관 해임 건의안을 박정희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고 통과시킨 1971년 10월2일 이른바 ‘항명 파동’으로 정계를 은퇴하게 된다. 공화당 내부의 권력다툼이 원인이었다. 오 장관은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의 측근으로, 김 전 총리는 4인방의 움직임을 미리 포착했지만 정적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라고 보고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게 정설이다. 항명을 주도한 실세들, 특히 김성곤 전 회장은 당시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콧수염을 조사관이 뜯어버렸다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정치권에 오랫동안 회자되는 이 ‘항명 파동’은 측근까지도 잔인하게 짓밟는 박정희 정권의 냉혹함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통한다.

김 전 회장이 정계를 떠난 뒤 달성 지역구는 박준규(공화당)·김종기(민정당)·구자춘(민자당) 등이 돌아가며 차지했다. 김 전 회장의 아들인 김석원 회장이 달성에서 당선된 것은 1996년의 일이다. 안봉근 비서관은 이 시절 김 회장의 지역구 활동을 보좌했다. 지역구와 쌍용그룹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한 인사에 따르면, 안 비서관은 지역구에서 김석원 회장을 도운 것은 사실이지만 정식으로 등록할 수 있는 법정보좌관이나 비서관 수가 적었기 때문에 쌍용 계열사에 적을 두고 월급을 받으면서 일은 지역구에서 했다고 한다. 그동안 당 안팎에서 안 비서관이 ‘쌍용 계열사 출신’이라고 알려지게 된 배경이다.

1996년 국회에 입성한 김 회장은 1998년 2월 의원직을 던지고 그룹 경영 일선으로 복귀한다. 그리고 두 달 뒤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정치인 박근혜’가 탄생한다. 유력한 대선 후보로서의 오늘을 가능케한, ‘박정희의 딸’이라는 정치적 유산은 단지 상징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아버지의 측근 아들의 지역구와, 그의 보좌진도 함께 물려받았다. 이후 박 후보의 15년 동안의 정치 여정은 온전히 ‘아버지의 복권’을 위한 것이었다. 정치인 박근혜의 시선이 늘 ‘과거’에 머물러 있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지난 10월에는 이들의 퇴진 문제가 공개적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전 비상대책위원 등은 친박 핵심 의원들의 2선 후퇴와 함께 “박근혜 후보의 일정과 메시지를 담당한 박 후보의 보좌진이 오늘의 사태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주장 했다.
MB 견제로 4명과만 만나게 돼

안 비서관뿐 아니라 다른 세 명의 보좌진도 이때부터 박근혜 의원실에 합류해 최측근에서 활동해왔다. 한양대 경영학과에서 석·박사를 마친 뒤 의원실에 합류한 이재만 보좌관이 같은 과 예종석 교수의 제자라는 점도 새롭게 밝혀진 사실이다. 예 교수는 정치권의 원로로 잘 알려진 예춘호 전 한국사회과학연구소 이사장의 아들로, 아름다운재단 이사장도 맡고 있다. 박 후보의 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이 보좌관은 예 교수의 제자 모임인 ‘예우회’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정호성 비서관은 ‘4인방’ 가운데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정무와 기획, 후보의 메시지를 담당해 사실상 의원실에서 가장 중점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게 당 안팎의 공통적 관측이다. 해병대 출신인 정 비서관은 고려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했다.

박 후보의 강원도 유세를 수행하다 12월2일 급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춘상 보좌관도 해병대 장교 출신으로, 대일고등학교·단국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의원실에 들어오기 전까지 한 전문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전공을 살린 인터넷·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팬클럽 관리 등의 업무뿐 아니라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의 활동과 박 후보의 후원금 관리도 도맡아 챙겨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인터넷 메신저 대화명은 ‘섬기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배신’에 대한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한 박 후보다. 십수 년 동안 같은자리에서 자신을 보좌해온 측근의, 그것도 대선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의 비극적인 죽음 앞에서 박 후보는 여러 차례 눈물을 보였다.

이들의 역할에 대한 내부 평가는 엇갈린다. “비서진들이 박근혜의 눈과 귀를 가린 일종의 문고리 권력으로 행세하고 있다”는 비판과 “그저 한 자리에서 오랜 기간 일해온 실무진일 뿐”이라는 항변이 충돌했다. 지난 10월에는 이들의 퇴진 문제가 공개적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김세연·이상돈·이준석 전 비상대책위원 등이 당시 성명에서 최경환·이한구 의원 등 친박 핵심 의원들의 2선 후퇴와 함께 “박근혜 후보의 일정과 메시지를 담당한 박 후보의 보좌진이 오늘의 사태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도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당과 정치권 안팎에선 ‘4천왕’ ‘환관 권력’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실제 박 후보에 대한 이들 보좌진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일까. 2007년 경선 캠프에서 활동했던 새누리당의 한 고위 관계자는 “2007년의 4인방과 2012년의 4인방은 전혀 다르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2007년에도 비서진들은 박 후보에게 들어가는 정보의 핵심 관문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문고리 권력으로 지목될 정도는 아니었어요.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박 후보는 점점 고립됐습니다. 가까운 친박 의원들도 만날 수 없었어요. 혹시라도 뭔가 꾸미고 있는 게 아니냐는 (친이계의) 시선 때문이기도 했고, 말이 외부로 퍼질까봐 두렵기도 했겠죠. 그러다 보니 박 후보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4명의 비서진이 사실상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습니다. 특히 정무적 역할을 담당해온 정호성 비서관의 영향력은 몇 년 동안 너무 커져버렸습니다. 매일 박 후보와 1시간 이상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요.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런 오랜 과정을 통해서 비서진들이 박 후보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겁니다.”

[%%IMAGE2%%]박 후보 대권 플랜의 막후 실력자 정윤회

‘4인방’의 전횡을 거론할 때 늘 함께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박근혜 후보의 오랜 측근으로 알려진 정윤회씨다. 정씨는 박 후보의 젊은 시절 비화에 자주 등장하는 최태민 목사의 딸 최순실씨의 남편이다. 정씨는 박 후보의 입법보좌관을 끝으로 공식적으로 여의도를 떠난 뒤에도 꾸준히 박 후보의 ‘실세’로 지목돼왔다. 2007년 박근혜 캠프 공보라인 특보로 일했던 관계자가 당시 대선 이후 익명으로 한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글은 ‘4인방’과 정윤회씨의 관계를 드러내는 단서가 된다. 그는 이 글에서 측근 보좌진들과 정씨의 실명을 두루 거론한 뒤 이들의 전횡을 경선 패배의 핵심 요인으로 꼽으며 이렇게 썼다. “박 대표 핵심 보좌진들이 삼성동을 빈번히 왕래하며 협의하는 것은 물론, 이들이 정윤회씨를 만나고 온 후 캠프 내에서 공론이 모아진 부분이 180도 다른 방향으로 결론이 나는 것을 보며 ‘삼성동 캠프’의 위력을 실감했습니다. 진정으로 박근혜 대표가 차기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청와대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보좌진을 완전히 새롭게 갖추고 삼성동 캠프에 대해서는 해체 혹은 정치 개입을 엄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2012년 박근혜의 청와대 입성을 위한 첫 번째 시험대가 될 것입니다.”

‘4인방’이 당시 박 후보와 정윤회씨 사이에서 일종의 메신저 역할을 했다는 점을 캠프 내부 관계자가 거론한 것으로, 그가 언급한 ‘삼성동’ 혹은 ‘삼성동 캠프’란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박 후보의 자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도 정치권에선 “정윤회가 삼성동 자택을 수시로 드나든다” “공식적인 라인이 아니라 자택에서 이뤄지는 비선 조직의 회동이 박근혜의 실질적인 정치적 지도부”라는 뒷말이 무성했다.

이 밖에도 정씨는 ‘논현동팀’ ‘강남팀’ 등의 비선 조직을 이끌며 박 후보의 대권 플랜을 이끌어온 막후 실력자라는 관측이 많았다. 물론 다른 시각도 있다. 새누리당의 또 다른 고위 당직자는 “박근혜·정윤회 라인은 이미 오래전에 정리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반박했다. 2007년과 올해 캠프에 모두 참여하고 있는 한 인사는 “4명의 비서진은 단지 박 후보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실무자들일 뿐”이라며 “박 후보를 쥐고 흔든다거나 배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이야기들은 이들에 대한 외부의 시기심에서 비롯된 오해”라고 반박했다.

수소문 끝에 이 글을 쓴 이아무개씨와 접촉할 수 있었지만 그는 끝내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이씨는 “당시 글은 박근혜 후보를 비방하거나 흠집 내려던 것이 아니라 문제점을 극복하고 개선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썼다”며 “지금은 정치권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을 하고 있고,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고만 밝혔다.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실무자일 뿐” 반박도

12월19일 대선까지는 불과 10여 일밖에 남지 않았다. 박 후보는 여전히 가장 유력한 후보다. 만일 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최측근 보좌진들과 ‘최태민의 사위’ 정윤회씨는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정규적이고 공식적인 계통과 체계를 무시한, 비선 측근들을 통한 국정 운영의 문제점은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사찰’ 파문을 통해 충분히 드러났다. 그러므로 이렇게 물어야 한다. ‘대통령 박근혜’의 길은 과연 얼마나 다를까?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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