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만으로 한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온풍기, 마시다 남은 맥주로 만드는 천연 페인트, 쌀자루에 흙을 담아 만든 집, 태양열로 요리할 수 있는 오븐….
친환경 제품 전시장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난방·조리·농사 기구 등을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 이가 늘고 있다. 주로 귀농을 선택해 자원을 고갈시키고 온난화를 가속화하는 인간의 삶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이다. 자연에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도 효율성이 높은 난방 기구를 찾거나 저렴하게 집을 지을 수 있는 생태 건축을 고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적정기술을 접하게 된다.
땔감용 나무 제외하고는 에너지 자급자족
서울에서 15년 넘게 공무원 생활을 하다 2008년 경북 봉화로 귀농한 이재열(45)씨가 직접 지은 흙집엔 가스나 석유 대신 자연에 기대어 살려고 마련한 도구로 가득하다. 도시에서 살 땐 그저 가스나 석윳값이 더 저렴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환경문제에 관심이 생기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햇빛’이었다. 그는 햇빛온풍기·햇빛온수기·햇빛건조기 등을 개발해 사용하고 있다. 여름철 양철판에 앉았다가 뜨거움에 놀라 엉덩이를 떼어낸 적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햇빛온풍기엔 이런 원리가 숨어 있다. 태양의 가시광선이 흑색 양철판에 닿아 적외선, 즉 열에너지로 변환된다. 양철판 위에 적외선을 붙잡아두는 성질이 있는 유리나 투명 비닐을 덮으면, 그 안에 갇힌 공기는 점점 뜨거워진다. 이런 공기가 집 안으로 이동하면 실내가 따뜻해지는 것이다. 이씨는 80만원을 들여 제작한 가로 1m·세로 5m 크기의 햇빛온풍기를 집에다 설치했다. 그 뒤 땔감 사용량이 40% 이상 줄어들었다. 이씨네는 이렇게 일정 부분 나무를 활용하는 것을 제외하고, 에너지를 자급자족하고 있다.
이씨는 처음 농촌 생활을 결심했을 땐 난방 걱정이 별로 없었다고 했다. 대안 에너지에 관심이 있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주위에 널린 나무를 활용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땔감을 마련하는 건 엄청나게 수고로운 일이었다. 농사짓기에 바쁜 동네 어르신들도 기력이 딸려 땔감을 마련하기 힘들어한다. 주로 전기장판으로 겨울을 나는데, 이마저도 전기료 아끼느라 마음껏 사용하지 못한다. 도시가스 보급이 되지 않는 시골에서는 같은 양의 에너지를 쓴다 하더라도 비용이 훨씬 많이 든다. “큰딸이 할머니와 같이 사는 친구네에 놀러갔는데 한겨울인데도 실내 온도가 2℃ 정도였어요. 농촌에 계신 어르신들이 대개 춥게 지내시죠. 햇빛온풍기를 활용하면 좀더 따뜻하게 겨울을 보내실 수 있어요.” 그는 3년 전부터 햇빛온풍기 제작 교육 등 기술 보급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사기’가 아닐까 의심하던 이웃들도 햇빛을 활용한 기구가 가득 찬 그의 집을 들여다보며 하나둘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씨의 흙집이나 햇빛온풍기의 겉모양새는 투박하다. 구름이 끼거나 눈이 올 때 온수를 사용하려면 아껴 써야 한다. 그는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할 정도로 자연에 기대어 사는 삶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적정기술에 대한 교육을 하는 공동체 건축가 조윤석씨는 번역투인 적정기술을 ‘적당기술’이라고 부른다. 뭐든 정확하고 정밀함을 강조하는 근대사회에서 ‘적당주의’는 부정적인 개념으로 자리잡았지만, 이제는 회복해야 할 가치라는 것이다. “집 짓는 데 그렇게 첨단 기술이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남향으로 바람길 잘 통하게만 대충 지어도 살 만하다니까요.”
회복해야 할 가치 ‘적당주의’ 그리고 ‘적당기술’
2007년 전남 장흥으로 귀농한 김성원(45)씨는 ‘화덕’ 전도사다. 화덕은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에게 잊혀진, 그러나 현존하는 물건이었다. 일제시대 중반까지도 나무화덕은 한반도에서 가장 보편적인 취사도구였다. 1920년대 연탄이 수입되기 시작하자 나무화덕이나 부뚜막 아궁이가 빠르게 사라졌다. 1970년대에 등장한 가스레인지는 1990년대 초반 보급률이 100%에 육박했다. 김씨는 귀농을 하면 자급자족의 삶을 살고 싶었다. 농사로 많은 수익을 얻기 힘들기 때문에 뭐든 제 손으로 하는 게 필요했다. 쌀자루에 흙을 담아 벽을 쌓아 집을 짓고, 집에 필요한 가구를 제 손으로 만들었다. 시골에서는 불 피울 일이 잦았다. 동네 사람들이 사용하는 드럼통으로 만든 화덕이나 옛날식 화덕은 나무 사용량이 너무 많았다. 전세계 화덕을 살펴보며 효율이 뛰어난 화덕을 찾기 시작했다. 이런 화덕을 적정기술로 재해석하고 개량해나갔다. 이동형 간이화덕을 만들어 가까운 이웃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적정기술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누구나 편하게 접할 수 있도록 기술이 쉽고 비용도 저렴해야 한다. 노동에서 소외당하거나 소비만 하는 존재가 아닌 일상생활에서의 노동을 통해 창조력을 발휘하는 삶으로 돌아가자는 의미가 있다. 지역 공동체와의 어울림이 중요하다. 이런 면에서 건축가 조윤석씨는 고민이 많다고 했다. 저렴하고 짓기 쉬운 친환경 주택이 지역 공동체에 꼭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농촌에 집을 많이 지으면 그만큼 땅값이 오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태적으로 의미 있다 하더라도 공동체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상품일 뿐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국내 적정기술은 주로 제3세계 원조 분야에서 주목을 받고 있지만,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화석에너지나 치명적 위험을 내포한 핵에너지에 기대고 있는 우리 사회를 지속 가능한 삶의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데 활용할 수도 있다. 이재열씨는 햇빛온풍기를 만들면서부터 우리가 햇빛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진다고 했다. “각자 집을 비추는 태양 면적 중 일부만 이용해도 난방·온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거든요. 태양전지판은 업체에서 공급받는 게 낫지만, 나머지는 큰 기술 없이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어요.”
적정기술 지역 거점이 생긴다
현재 적정기술 보급에 대한 정책적 지원은 존재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다. 적정기술에 관심 있는 개인이나 민간단체는 주로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도구 제작법 등을 공유하고, 간헐적으로 교육 워크숍을 열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는 적정기술을 보급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 때문에 김성원씨는 이재열씨 등 자신과 비슷한 가치관을 지닌 이들과 함께 지역마다 적정기술 거점 마련을 추진 중이다. 적정기술과 관련된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 등을 세우고, 해당 지역 주민들이 적정기술을 활용할 수 있도록 교육 시스템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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