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끝자락, 전북 군산은 조용한 도시였다. 일제는 그런 군산을 쌀 수탈을 위한 도시로 바꿔버렸다. 지금도 남아 있는 옛 군산세관·조선은행·나가사키18은행 건물, 부잔교 등은 그 쓸려간 흔적이다. 일본 총독은 ‘고메노 군산’(쌀의 군산)을 외쳤다고 한다.
윤슬기(31), 이아영(31·가명), 김미선(32), 정애정(35)은 ‘군여상’을 나온 친구, 선후배 사이다. 윤씨와 이씨는 2000년 2월에 졸업했다. 김씨는 1998년, 정씨는 1996년 졸업이다. 선배가 3학년일 때 후배는 1학년이었다. ‘장하다 군여상~’ 교가도 함께 불렀다. 군여상은 군산여상, 그러니까 전북 군산여자상업고등학교를 말한다. 윤씨는 숨졌고, 이씨는 수술 뒤 후유증을 걱정하며 산다. 김씨는 투병 중이고, 정씨는 같은 직장에서 만난 남편을 병으로 잃었다. 병명은 각각 이렇다. 중증 재생불량성빈혈, 두경부경계성종양, 다발성경화증, 백혈병. 군산여상 출신들만 유독 힘든 운명을 타고났을 리 없다. 각각 이곳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병이 생겼다. 삼성 액정표시장치(LCD) 천안공장,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삼성 LCD 기흥공장,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졸업을 앞둔 소녀들은 ‘산업의 쌀’이라는 반도체를 만들러 외지로 떠났다. 먼지 한 톨도 허락이 안 된다는 클린룸. 교복 대신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방진복을 입었다. 긴 생머리, 짧은 단발머리를 안으로 꼭꼭 숨겼다. 까만 눈만 내놓았다. 그렇게 만든 ‘쌀’이 오랜 전통의 지방 여고 출신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같은 라인 언니는 거품 물고 쓰러지고…
이아영씨는 윤슬기씨보다 한 달 늦은 1996년 6월 삼성전자에 취업했다. 이씨는 15년 전 입사하던 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지방 소도시 학교인 군산여상에서 ‘세계 초일류’ 대기업 삼성전자에 일자리를 구한다는 건, 학생들 사이에서 자부심을 느낄 만한 일이었다. 성적도 웬만큼 좋지 않으면 합격하기 힘들었다. 한 학년 위 선배들도 100여 명이 삼성전자 문을 두드렸지만 40명 남짓 합격했을 뿐이었다.
학교로 삼성전자 직원들이 찾아왔다. 면접장에는 지원자 7명이 우르르 들어가 3명의 면접관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그때는 반도체 회사가 임금도 많이 주고, 기숙사 시설도 좋아서 인기가 많았어요. 저도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꼭 삼성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이씨는 한 달 뒤 학교에 온 버스를 타고 삼성전자 연수원으로 갔다. 그해 군산여상 3학년 백일홍반 47명 가운데 삼성전자에 합격한 친구들은 이씨와 윤씨 등 5명뿐이었다.
이씨는 기흥공장 2·3라인에서 화학증착(Chemical Vapour Deposition) 공정 오퍼레이터로 배치됐다. 반도체에 전류가 흐르도록 처리한 도판트(Dopant·미세불순물)를 받아, 가스를 이용해 전기가 흐르거나 흐르지 않도록 처리하는 공정이다. 2교대, 3교대 근무를 오고 가는 회사 생활은 빡빡했다. 천식·피부병도 생겼다. 쓰러지기도 했다. “몸이 많이 안 좋았어요. 회사랑 잘 안 맞는 것 같아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죠.” 그는 2002년 4월 회사를 그만뒀다. 고향인 군산에 내려와 이듬해 대학생이 됐다. 하고 싶던 공부를 마저 하고 싶었다.
이유 없이 몸이 아픈 일이 잦아졌다. 지독한 몸살감기를 앓듯이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한번 아프면 한 달 내내 앓았어요. 1년에 넉 달 정도는 그렇게 기운을 못 차렸어요.” 지독한 감기려니 생각하고 약을 먹거나 병원을 찾아가 주사를 맞았지만 좀처럼 낫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새 직장을 얻는 뒤에도 병은 계속 쫓아다녔다.
2009년 여름에야 서울의 대형 병원을 찾았다. 병명은 ‘두경부경계성종양’. 담당 의사는 신경계에 종양이 생기는 병이라고 했다. “대형 병원에서도 한 해에 환자가 3명 정도인 희귀병이라고 하더라고요. 곧바로 제거 수술을 받았지만, 안면마비 등 수술 부작용이 생겨서 고생했어요.” 현재 그는 부작용이 덜해 직장에 다니고 있다.
이씨는 자신의 병이 반도체 공장을 다니며 생겼다고 생각한다. “제가 근무할 때 라인에서 하루 종일 공정검사를 보는 언니가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거품을 물고 쓰러진 적이 있어요. 나중에야 알았지만 우리 라인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한 언니도 있었고요. 제가 근무했던 시기가 2000년 정전으로 공장이 멈췄던 시기와 맞물리거든요.” 당시 정전으로 화학가스 등이 유출됐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한때 이씨의 언니는 다른 발병자들처럼 산업재해 신청을 하자고 권했다. 그는 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도 받아주지 않는데, 저 같은 사람의 신청을 받아주겠어요? 저는 그저 그곳을 빠져나온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이씨는 졸업 뒤 윤슬기씨와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다. 윤씨의 죽음은 취재 과정에서 들었다. “그때는 그렇게도 가고 싶어 했던 삼성이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저도 몰랐어요. 그저 슬기라도 산업재해가 인정돼 억울함을 풀었으면 좋겠어요.”
“꼭 일본 가서 살 거야” 기다려주지 않은 꿈
윤슬기씨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에서 파악하고 있는, 삼성 직업병으로 인한 56번째 사망자다. 지난 6월2일 밤 서울의 한 병원에서 숨졌다. “엄마, 있잖아. 난 나중에 꼭 일본 가서 살 거야.” 윤씨는 늘 이런 말을 했다. 군산에서 나고 자란 그였지만, 대학은 꼭 일본으로 가리라 꿈꿨다. 독학으로 일본어를 배웠다. 좋아하는 가수도 일본 댄스그룹 ‘스마프’(SMAP)였다.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13년 동안의 투병 끝에 중증재생불량성빈혈로 목숨을 잃었다.
대학에 가고 싶었던 윤씨는 어머니 신정옥(57)씨의 권유로 군산여상에 진학했다. 취업률이 높은 학교였기 때문이다. 1999년 5월, 졸업반이던 윤씨는 삼성전자 입사원서를 썼고 한 달 뒤 삼성전자 LCD사업부 천안공장에 입사했다. 신씨도 대기업에 취직한 딸이 자랑스러웠다. 윤씨는 화학물질을 입힌 LCD 패널을 자르는 업무를 맡았다. 신씨가 가끔 고향집에 내려오는 딸에게 회사 생활을 물으면 “그냥 공순이지, 뭐”라는 시큰둥한 대답이 돌아왔다. 신씨는 딸이 취직할 때만 해도 삼성 ‘공장’에서 일하는 줄은 몰랐다.
입사하고 다섯 달이 지났을 즈음, 윤씨는 작업장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그저 심한 감기몸살인 줄 알았는데 상태가 심해졌다. 병원을 찾았더니 ‘중증재생불량성빈혈’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골수세포 기능이 약해져 적혈구·백혈구·혈소판이 모두 감소하는 병이었다. 여고생 시절 헌혈도 곧잘 하던 그였기에 더욱 이상했다. 긴 투병 생활이 시작됐다. 정기적으로 혈소판 수혈을 받아야 했다. 그런 중에도 2002년 군산대 일어일문학과에 입학했다.
몸이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집에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아졌다. 무라카미 류의 일본 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윤씨는 지난 4월 삼성전자 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재생불량성빈혈에 걸린 김아무개(36)씨가 처음으로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산재 신청을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시간은 윤씨를 기다리지 않았다.
김미선씨는 이아영·윤슬기씨의 군산여상 2년 선배다. 김씨는 고등학교 졸업반이던 1997년, 삼성전자 LCD사업부 기흥공장 오퍼레이터에 합격했다. 윤씨와 같은 회사지만 공장은 달랐다. 졸업 뒤, 윤씨가 걸었던 길을 2년 먼저 걸은 셈이다. 비슷한 점은 또 있다. 그가 병을 얻은 시기는 2000년 3월. 윤씨가 아팠던 시기와 비슷하다. 김씨는 현재 서울에서 투병 중이다. 다발성경화증과 시신경염을 앓고 있다. 다발성경화증은 발병 원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화학물질 노출이나 스트레스 등으로 신체가 마비되거나 시신경 손상, 척수염, 말초신경 장애 등을 일으키는 병이다. 김씨는 시신경염으로 시력장애 판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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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공장이 그런 곳인 줄 알았더라면…”
“처음에 회사 시험 볼 때는 면접비 1만원을 받았다고 좋아했죠.” 김씨가 졸업할 당시, 삼성전자 LCD사업부로 100여 명의 학생이 갔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시기와 겹친 탓에 취업 걱정이 많던 시기였어요. 월급을 많이 주는 대기업에서 많이 뽑아가니 반가웠죠.” 1997년 6월 입사해 연수원을 거쳐 기흥공장에서 LCD 모듈과 패널 제조부서에서 납땜 업무를 담당했다. “처음에는 패널이 오면 닦아서 탭을 붙이는 작업을 했어요. 1년 정도 이 업무를 하다가 나중에는 납땜 공정에 있었고요.”
3년 가까이 일을 했는데 갑자기 몸 왼쪽이 마비되는 증상이 나타났다. 왼팔을 올릴 수조차 없었다. 이런 병력을 가진 가족도 없었다. 2000년 3월 병가를 냈다. 증상이 심해져 그해 말에는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 “어머니가 산업재해 신청을 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저는 반대했죠. 다시 회사를 갈 수도 있었고, 회사에 물어봐도 개인적인 질병이라 산재를 인정받기 힘들 거라고 했거든요.”
마비가 올 때마다 1년에 몇 번이고 입원하기를 반복했다. 현재 오른쪽 눈은 안 보이고, 왼쪽 눈은 컴퓨터 화면 속 글씨를 쳐다보기 힘든 상태다. 지난해 언론을 통해 ‘반올림’이라는 단체를 알게 됐다. 이들의 도움으로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요양 신청을 냈다. “납땜 작업은 작업자가 직접 다 해야 하는데, 공기정화 장치가 고장나 있기도 하고 종이 마스크만 쓰고도 일을 했어요. 이게 얼마나 유해한지 작업하는 저희들도 몰랐을 정도니까요.” 그는 요즘도 두 달에 한 번씩 병원에서 약을 타온다. 항체검사, 피검사도 해야 한다. “고등학교 때 반도체 공장이 그런 곳이라는 걸 미리 알았다면 아마 안 갔을 거예요.”
메모리반도체 산업은 1995년 엄청난 호황을 맞는다. 마이크로소프트(MS)가 컴퓨터 운영체제인 ‘윈도95’를 내놓자 메모리 수요가 폭증하고 메모리 가격이 치솟았다. 두 아이의 엄마인 정애정씨는 현재 경기 시흥시에서 보육교사로 일한다. 한때 삼성전자에서 일했던 그는 다른 군산여상 졸업생들처럼 ‘삼성 직업병 피해자’ 가운데 하나다. 삼성전자에서 함께 일하던 남편을 백혈병으로 잃었기 때문이다.
그는 두 살 터울 언니를 따라 군산여상을 나왔다. 졸업 뒤에도 언니를 따라갔다. 언니가 일하던 삼성전자에 취업했다. “그때만 해도 군산에서 사무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대부분 삼성전자에 가고 싶어 했죠.” 반도체 호황이 시작된 1995년 10월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에 오퍼레이터로 입사했다. 그때 졸업생 대부분은 일자리를 따라 막연하게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잘 지어놓은 기숙사 시설 덕에 그런 고민이 필요 없는 직장이었다. “입사 시험을 볼 때, 생활기록부를 많이 봤어요. 무단결석을 한 적이 있는지. 성실한 사람을 선호했던 것 같아요.” 그해에 군산여상에서는 정씨를 포함해 150여 명이 삼성전자로 갔다.
백혈병에 걸린 남편, 계속 회사를 다닌 아내
입사 3년차가 되던 해, 그는 사내 합창대회 연습을 하며 남편 황민웅씨를 만났다. 춘천기계공고 출신인 황씨는 반도체 공정에서 기계를 손보는 엔지니어였다. 2004년 심한 감기를 앓던 남편 황씨가 응급실로 실려갔다. 병원에서는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골수이식을 기다리며 아홉 달을 투병했던 황씨는 둘째아이가 태어난 지 열흘 만에 목숨을 잃었다. “회사에서도 남편은 개인적인 병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한동안 회사를 계속 다녔죠.”
정씨는 최근 출간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이야기를 담은 르포 만화 (보리)의 이야기 속 실제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과거에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이들의 산재 신청을 돕고 있다.
6월27일 오후 5시 수업을 마친 군산여상 학생들이 교문을 나선다. 까르르 터져나오는 웃음소리가 여고생들답다. 정문 위에 걸린 ‘축 합격’ 펼침막은 이제 막 취업에 성공한 친구들을 축하하고 있다.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 천안공장에도 6명이 들어갔다. 오퍼레이터직이다. 다른 반도체 회사에도 30명 가까이 입사했다. 3학년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삼성 반도체 공장’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다. “저희들끼리 얘기하죠. 가면 안 좋다더라, 위험하다더라.” “그래도 그런 자리가 쉽지 않아요. 삼성이잖아요. 연봉도 좋고.” “예전에는 선배들 수십 명씩 버스로 실어갔다고 하던데요. 요즘은 삼성 자리 잘 안 들어와요. 회사에서 돈이 없대요. 하하하.” 1학년 학생들도 알 건 다 안다. “취업하려고 여상에 왔잖아요. 그런데 군산에는 취직할 곳이 별로 없어요.”
군산여상 쪽은 “일한 만큼 돈을 주는 곳이 많지 않다 보니 학생들이 오퍼레이터직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윤씨와 이씨의 백일홍반 고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이던 이아무개(55)씨도 “외환위기 직후라 일자리가 없던 1999년에 삼성전자가 좋은 조건으로 학생들을 많이 뽑아가던 것 자체가 고무적인 일이던 시절”이라고 말했다. 학교 쪽은 “예전에는 반도체·LCD 쪽이 위험하다는 인식이나 정보가 없었다. 요즘에는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제기된 문제나 근무 환경 등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박현표 교감은 “우리 졸업생들이 그런 일을 겪었다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백혈병이나 암은 삼성전자를 다니지 않아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같은 공장, 같은 라인, 비슷한 공정, 비슷한 시기에 여러 명이 집단 발병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직업병 인정을 두고 삼성 쪽과 다투고 갈라지는 부분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10여 년 전 생산라인의 ‘상태’다. 삼성이나 정부는 현재의 생산라인을 기준으로 판단하려 하는 반면, 발병 당사자들은 당시의 노후한 시설을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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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죽음 안타깝지만 화학물질 접촉 없는 공정”
삼성전자 관계자는 “한때 사우였던 윤슬기씨의 이른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회사가 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성실히 응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윤씨의 병이 업무와 연관됐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선을 그었다. 윤씨의 근무기간이 6개월(실습기간 4개월 포함)에 불과했고, 화학물질 접촉이 거의 없는 기계적 프로세스를 담당했다는 것이 이유다. “입사 전에 일반적으로 건강검진을 하지만 재생불량성빈혈을 찾아낼 정도로 자세히 보지는 않지 않느냐”고도 했다.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제품을 자르는 과정에서 화학물질이 비산될 수 있다. 재생불량성빈혈은 잠복기가 짧고 단기간 노출로도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삼성 쪽 해명을 일축했다.
삼성 쪽은 이아영·김미선씨 사례에 대해서도 “졸업생 수 등을 고려한 발병률을 따져봐야 한다.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서로 다른 질병을 묶어서 연관관계를 만드는 것은 과학적 분석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특정 시기, 특정 공간, 특정 공정’에 한정해서 발병률을 따져보자고 했지만, 이 부분은 설득이 되지 않았다.
삼성 쪽은 반올림에 공개 검증을 제안하기도 했다. “반올림이 제보자라며 공개한 137명의 경우 익명에 회사도 다르고 발병 시기도 다르다.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어느 직종, 어떤 질병 등이 있었는지 공개한다면 함께 검증해볼 수 있다.” 이종란 노무사는 “삼성전자 건강연구소에서도 대화를 해보자는 연락이 왔다. 하지만 그동안 삼성은 산재 신청을 하려는 이들을 돈으로 회유하고 소송을 취하하도록 유도하는 등 신뢰할 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대화가 가능하겠느냐”고 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6월14일, 페루에서 헬기 사고로 숨진 삼성물산 직원 4명의 빈소를 찾았다. 해외 업무를 하는 직원들의 안전 대책을 강화하라고도 지시했다. 그가 그냥 지나친 빈소가 56개째다. 먼지가 없다고, 하얗다고 깨끗한 것은 아니다. 방진복이 무섭도록 하얗다.
군산(전북)=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반도체 성장기 인력 집중 채용된 지역 여상
강원, 충청, 호남에서 빨려들어가다
속초상고, 성수상고(춘천), 광주여상, 송정여상(광주), 강경상고(충남), 서천여상(충남), 대전여상….
군산여상만이 아니었다. 삼성전자 반도체·액정표시장치(LCD) 공장에서 일하다가, 혹은 퇴사 뒤 백혈병·뇌종양 등이 발병한 이들 가운데는 강원·충청·호남 지역 상업고등학교 출신이 많다. 17~18살 어린 나이에 가족과 고향을 뒤로하고 경기도 기흥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으로, 충남 천안·탕정 삼성전자 LCD 공장 등으로 떠났다.
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를 처음으로 공론화한 황유미씨는 속초상고를 나왔다. 졸업을 몇 달 앞둔 2003년 10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입사했고, 2005년 6월 백혈병 판정을 받았다. 22살이 되던 2007년 3월 백혈병으로 숨졌다. 황씨와 같은 조를 이뤄 일했던 이숙영씨는 광주여상을 나왔다. 이씨도 18살인 1994년 기흥공장에 들어왔다. 백혈병을 이기지 못하고 2006년 8월 숨졌다. 1987년생인 박지연씨는 강경상고 출신이다. 2004년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 입사했다. 2010년 3월, 23살 나이에 백혈병으로 숨졌다.
예나 지금이나 상고에 들어가는 학생들의 가정 형편은 넉넉지 않은 경우가 많다. 반면 학생들이 갈 수 있는 직장은 ‘제한’돼 있다. 이름 있는 대기업 사무직 취업문은 좁다. 지역의 한 상고 교사는 “그런 곳은 인문계로 말하면 서울대 들어가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했다. 여상 출신들에게 반도체·LCD 공장의 오퍼레이터(생산직 작업자) 자리는 ‘괜찮은 일자리’라고 한다. 삼성의 경우 연간 2800만원 정도를 받을 수 있다. 교사들은 “1990년대에 반도체 바람이 불어 여성 인력을 많이 필요로 했고 학생 취업도 많아졌다”고 했다. 1992년 삼성전자는 처음으로 디램반도체 시장 세계 1위에 오른다. 이해 64메가디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데 이어 1994년에는 256메가디램, 1996년 1기가디램, 2001년 4기가디램을 만들어냈다. 또 다른 교사는 “충청·강원·전라도 지역은 수도권이나 경상도 쪽과 달리 학생들을 받아줄 만한 산업이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수도권 인근 반도체 공장들은 필요한 인력을 이 세 지역에서 수혈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인사·노무 관리도 지방 중소 도시 출신들이 편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어린 오퍼레이터들은 기숙사 생활을 한다. 같이 올라온 친구들은 공장·라인·근무시간에 따라 쪼개졌다. 쉬는 날에도 갈 곳이 마땅치 않다. 숨진 황유미씨는 노래방에 가서 몇 시간씩 노래를 불렀다고 일기장에 썼다. 군산여상을 나온 정애정씨는 “시골 부모님들은 기숙사가 있다고 좋아하셨지만 기숙사는 사원 관리용으로도 이용됐다. 벌점 등을 매겨 해당 부서에 통보했다”고 떠올렸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분야 오퍼레이터를 뽑으며 ‘지원 기준’으로 고교 성적 상위 60%, 전 학년 결석 5일 이내를 건다. 지각·조퇴를 3번 하면 1번 결석한 것으로 처리한다. 성실성을 보는 것이다. 상고의 취업 담당 교사는 “업체들은 기존에 입사한 학생들의 근무실적을 보고 입사원서를 더 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중국 광둥성 선전시에는 애플의 아이폰 등을 만드는 ‘폭스콘’ 공장이 있다. 50만 명에 이르는 직원들이 일하는 ‘폭스콘 시티’다. 2010년 젊은 신세대 농민공들이 폭스콘 공장 기숙사에서 뛰어내리는 자살 사고가 속출했다. 살인적인 노동강도와 가혹한 군대식 노무관리가 비극을 불렀다.
전태일이 안쓰럽게 바라보던 여공들의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했다. 과연 그런가.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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