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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위원장에게 조언할 수 있지만, 직접 도울 생각은 없다”

재벌과 대타협 주장, 박근혜 위원장과 관계 등에 대한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 인터뷰… “영원히 재벌과 함께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시장은 민주권력에 통제돼야 한다” 등 밝혀
등록 2012-04-27 02:11 수정 2020-05-02 19:26
» 장하준 교수. 도서출판 부키 제공

» 장하준 교수. 도서출판 부키 제공

“나와 개혁진보 진영은 (경제민주화라는) 큰 방향에서 같다. 방법론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4월17일 과 한 국제전화 인터뷰에서 “개혁진보 진영 학자들이 신자유주의라는 말은 아니다”라며 “(일부 지나친 표현에 대해) 죄송하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스스로에 대해 “좌-우나 보수-진보의 구분법에 얽매이기 싫다”며 “정치에 관심은 많지만 특정 대선 후보를 직접 돕거나 정치에 참여할 생각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장 교수는 재벌과의 타협론과 관련해 “영원히 재벌과 함께 가자는 것이 아니다”라며 “결국 재벌은 길어야 4~5대를 넘기지 못하고 없어지게 돼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장 교수가 최근 신간 서적 를 펴낸 것을 계기로 이뤄진 것으로, 영국 현지와 연결해 2시간 정도 진행됐다.

그동안 좌-우, 보수-진보 진영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동해왔다. 본인은 보수와 진보 중에서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나.
현실 안주(보수)냐 개선(진보)이냐를 기준으로 삼으면 당연히 진보다. 노동자 편이냐 자본가 편이냐를 기준으로 삼을 수도 있다. 박노자 교수는 노-자 타협론자인 나를 개량주의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정부 개입을 중시하는 측면에서는 진보지만, 개혁을 하는 데 있어 기존 제도를 부수기보다 잘 활용하자는 취지로 보면 보수에 가깝다. 나라마다 정책에 따른 보수-진보 구분이 다르다. 한국과 프랑스의 경우 산업정책은 우파 정책이지만, 영국은 좌파 정책이다.

19대 총선에서 ‘여대야소’ 결과가 나왔는데.
야당의 기대치에 미달했으니 못했다고 볼 수도 있고, 전보다 의석이 늘었으니 선전했다고 볼 수도 있다. 여대야소 이유로는 여당이 많이 변신해 야당과의 차별성이 약해진 것을 꼽을 수 있다. 한 예로 여당이 복지를 들고 나왔다. 이전에는 빨갱이나 하는 얘기로 치부했다. 야당이 과거 노무현 정부에서 시작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반대한 것도 국민이 보기에 미덥지 못했을 것이다. 야당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참여정부가 못한 개혁을 제대로 하자며 경제민주화를 화두로 삼았지만, 과거(의 한계)를 얼마나 뛰어넘을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신간 제목이 이다. 19대 대선을 염두에 둔 것 같은데, 국민에게 어떤 비전을 말하고 싶은가.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복지국가 건설이다. 복지는 단순히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나눠주는 게 아니다. 비정규직 개선과 기본생활 보장 등도 중요하지만 경제성장을 위해서도 복지가 중요하다. 과거 1970년대까지는 직장을 그만둬도 몇 주만 준비하면 다른 산업으로 전직이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산업이 고도화된 시대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부가 교육을 시켜줘야 한다. 복지에 대한 사회 인식을 바꿔, 공짜가 아니라 공동구매라는 점을 일깨워야 한다. 복지를 위해서는 조세부담률을 지금의 19%에서 22%로 조금 높일 게 아니라 향후 30~40년을 내다보고 40%까지 대폭 높이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야권의 유력 대선 후보로 꼽히는 문재인 국회의원 당선인과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어떻게 보는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몰라서 평가하기 어렵다. 문 당선인은 본 적이 없고, 안 원장은 과거 한겨레신문 행사 때 인사를 한 적이 있는 정도다. 모두 좋은 사람들 같은데, 대통령을 하겠다면 공약이나 정책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새누리당의 유력 후보인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을 도와줄 용의는 있나. 일각에서는 복지, 국가 역할 강조, 재벌과의 타협적 자세 등을 이유로 두 사람이 잘 맞을 것 같다는 얘기도 하는데.
아직 만난 적이 없다. 박 위원장에게 조언하는 시장주의자들이 나를 싫어하지 않겠나. 경제문제에 대해 얘기해달라고 하면 응할 수 있지만 직접 도울 생각은 없다. 그 누구든 마찬가지다. 정치에 관심은 있지만, 직접 참여하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연구하고 책쓰고 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 더 공헌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여야 모두 총선 공약으로 경제민주화를 내걸었다. 의지가 있다고 보는가.
불분명하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결국 국민이 하는 것이다. 국민이 원한다면 정치인은 할 수 없이 하는 것이다. 양극화 때문에 국민의 고통이 심해지고,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선거에서 지니까, 박근혜 위원장도 겁먹고 복지 얘기를 하는 것 아니겠나.

경제민주화와 재벌 개혁 주장을 국내외 금융자본을 위한 신자유주의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경제민주화를 주장해온 개혁진보 진영은 그동안 일관되게 신자유주의에 반대해오지 않았나.
우리나라에서는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욕 비슷해서 기분 나쁘게 들릴 수도 있겠다. 책이 좌담 형식이어서 표현이 걸러지지 않아 오해를 살 소지도 있는 것 같다. 이분들이 이명박 대통령과 한통속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내 얘기는 재벌 개혁을 주식시장 논리로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점이다. 재벌개혁론자들은 삼성과 현대차의 총수 가족들이 단지 5% 전후의 적은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재벌을 출자총액제한제 등을 동원해 주식시장의 틀 안에서 통제하려다 보면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주주자본주의 논리에 포섭된다.

개혁진보 진영은 경제 개혁과 관련해 공정한 시장 질서 확립과 재벌의 경제력 남용 규제(재벌 개혁)라는 이중 과제를 함께 주장해왔다. 시장 개혁을 얘기하면 무조건 신자유주의인가.
이론적으로 미묘한 문제다. 공정한 시장 경쟁을 강조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지만, 공정 경쟁만 보장되면 시장에 맡기는 것이 좋다는 논리는 경계해야 한다. 공정한 시장 질서만으로는 부족하다. 시장은 민주 권력에 의해 통제돼야 한다. (경제민주화론자 또는 개혁진보 진영에 대해) 신자유주의라는 표현을 쓴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말한 것에서 연유한다. 김기원·유종일·김상조 교수가 신자유주의라는 말은 아니다.



“아직 만난 적이 없다. 박근혜 위원장에게 조언하는 시장주의자들이 나를 싫어하지 않겠나. 경제문제에 대해 얘기해달라고 하면 응할 수 있지만 직접 도울 생각은 없다. 그 누구든 마찬가지다.”

개혁진보 진영은 그동안 노무현 정부의 개혁 실패를 계속 비판해왔다. 이 둘을 동일시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노무현 정부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를 안 냈다는 얘기는 아니다. 특히 이정우 경북대 교수(전 청와대 정책실장),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전 청와대 비서관)처럼 참여정부에서 일하면서도 한-미 FTA에 반대한 훌륭한 분들도 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친미 통상관료들이 한-미 FTA를 강행하고, 동북아 금융허브를 추진한 잘못도 있지만, 기본 틀 자체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했을 때는 약속한 것만 제대로 이행해도 큰일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더 나아가야 한다. 재벌 개혁도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단순히 총수 지분만 가지고 얘기해서 재벌 해체가 되면 국제 투기자본에만 좋은 일을 시킬 수 있다. 재벌이 국제 투기자본에 넘어가면 우리의 민주적 통제가 아예 불가능해진다. 재벌을 제대로 통제하기 위해 아예 국유화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삼성의 경우 삼성생명을 국유화하고 나머지는 경영권을 보장하는 등 획기적 틀이 필요하다.

재벌가의 경영권을 보장해주는 대신 노동·복지·세제 등에서 재벌의 양보를 얻어내는 대타협론을 제시한다. 하지만 재벌의 뛰어난 경영 성과는 스스로의 노력도 있겠지만 수많은 중소 협력업체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지적이 많다. 대타협을 하려면 재벌이 이런 것을 포기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나.
지금 가능해 보이는 것만 하자고 하면 사회 발전이 없다. 노예 해방이나, 아동노동 폐지도 처음에는 불가능해 보였다. 재벌과의 타협은 획기적 사고가 요구된다. 대타협을 한 스웨덴·핀란드의 경우도 처음부터 조건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한 예로 스웨덴은 1930년대까지 세계에서 가장 파업률이 높은 나라였다. 핀란드도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이후 좌우내전을 겪으며 1944년까지는 공산당 경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투표권도 주지 않던 나라였다. 안 된다고 말하지 말고 노력해야 한다.

국민경제의 소유물이자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소유물인 재벌을 개인 재산처럼 지배하고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은 재벌 총수들이다. 국민 처지에서 보면 당장 내놓으라고 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타협론을 얘기하는 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영원히 재벌과 같이 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결국 재벌은 장기적으로는 없어지게 돼 있다. 길어야 4~5대를 넘기지 못한다. 유럽에서 봐도, 스웨덴의 발렌베리를 제외하고는 사례가 없다. 나와 개혁진보 진영 간에 방법론적으로는 차이가 있지만 큰 방향에서는 같다.

추구하는 방향이 같은데도 현실적으로는 개혁진보 진영과 대립하는 것처럼 비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화가 부족하거나 표현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사회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세게 말하는 측면이 있다. 재벌 옹호론자들이 이를 활용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케임브리지대에서 테뉴어(특별한 잘못이 없는 한 정년까지 교수직이 보장되는 제도)를 받았다. 한국에 들어와 활동할 의향은 없나.
과거 1990년대에 서울대 교수에 3번 지원했는데 모두 안 됐다. 테뉴어와 상관없이 조건과 환경만 맞으면 한국에서도 (교수직을) 할 수 있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장하준은 누구인가
너무 깍듯한 명문가 출신 교수님


장하준 교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케임브리지대 교수다. 1990년부터 23년째 경제학부 교수를 맡고 있다. 장 교수는 형제 교수로도 유명하다. 동생인 장하석씨는 케임브리지대 과학철학과에 재직 중이다. 으로 과학철학 분야 최고의 저자에게 주는 ‘라카토슈상’의 2007년 수상자다.
장 교수의 집안은 호남의 2대 갑부 중 하나로 불린다. 산업자원부 장관과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장재식씨가 부친이다. 소액주주운동으로 유명한 장하성 고려대 교수와 장하진 전 여성가족부 장관이 사촌이다. 장하준 교수가 소액주주운동을 주주자본주의로 비판해, 사촌형제 간에 미묘한 관계에 놓였다. 가까운 친지들에 따르면 가족 행사에서 만나면 민감한 얘기는 서로 피한다고 한다.
장 교수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예의 바르고 깍듯한 성격이라고 입을 모은다. 교분이 오래된 인사들과도 서로 말을 놓거나 호형호제하는 일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를 하지 않는다. 제대로 못할 바에는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 때문이다. 장 교수는 “대중과의 소통을 꺼리는 것은 아니다”라며 “페이스북은 조금 했는데, 잘 관리가 안 돼서 부실하게 하느니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 싶어서 정지시켰다”고 말했다. 몇 년 전에 페이스북에서 한 미국 사람이 팬클럽을 만들어 몇백 명이 가입한 적이 있는데, 장 교수와 접촉이 없어 요즘 사정은 모른다고 한다.
장 교수는 내년 중에 영국 펭귄출판사를 통해 ‘경제학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한 일반교양 서적을 펴낼 계획이다. 영국 서적과 지성의 대명사로 불리는 펭귄출판사는 193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나온 대중교양서 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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