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하순 주목할 만한 경제서적 두 권이 연달아 나왔다. 장하준·정승일·이종태 공저의 (부키)와 김상조 한성대 교수(무역학)의 (오마이북)가 그것이다. 는 몇 년 전 베스트셀러가 됐던 의 속편 격이고, 는 김상조 교수가 에 연재해온 경제 강좌를 묶은 것이다. 쾌도난마와 종횡무진이라 둘 다 아주 흥미롭고 배울 게 많은 책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진보적 경제학자들의 책이라 관심이 가지만, 특히 재벌 개혁과 관치경제에 대한 관점에서 두 책이 보여주는 현격한 차이가 우리의 눈길을 끈다. 몇 년 전 참여연대와 대안연대 간 논쟁이 부활했다고나 할까, 마치 두 책이 한판 붙으려고 동시에 링에 오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에 거의 동의하지만 당혹스럽다
의 부제는 ‘재벌과 모피아의 함정에서 탈출하라’인데, 는 시종일관 재벌체제·관치경제를 옹호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재벌 개혁을 주장하고 관치경제를 비판해온 이른바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에게 끊임없이 시비를 걸고 있다. 3명의 공저자는 의 처음부터 끝까지 산업정책을 옹호하고 복지국가를 주장하며 이른바 ‘영미형 시장만능주의 모델’을 공격한다. 필자는 이들의 생각에 거의 동의한다. 그런데 에서 희한한 것은 한국에서 경제민주화를 주장해온 한 무리의 경제학자들을 모두 ‘시장만능주의 세력’으로 이름 붙여 적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경제민주화 세력이 주장하는 재벌 개혁은 결국 성공할 수도 없고, 애써 키워온 한국 기업을 미국의 약탈적 사모펀드에 넘겨주는 꼴밖에는 안 된다는 것이다. 3명의 공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경제민주화와 재벌 개혁은 낡은 화두이다. …그것은 노무현 정부의 실패와 함께 마땅히 사라졌어야 하는 구시대 담론이다.”( 420쪽) 이건 너무 나간 것 아닌가.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이 최근 에 이 두 권의 책에 대한 서평을 썼는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양쪽 다 한국을 대표하는 진보 경제학자들인데, 왜 이렇게 생각이 다르고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가? 아니 서로 용납 못한다는 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고, 3명의 공저자가 김상조 교수 쪽을 용납 못하는 것이다. 정태인 원장은 의 맨 끝을 읽고서야 비로소 이 책이 지난해에 나온 (시사IN북)이란 책을 비판하기 위해 쓰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당혹감을 적고 있는데, 필자 역시 그러하다. 필자는 공저자 중 한 사람이므로 더욱 당황스럽다. 3명의 공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다 2011년 10월에 (유종일 편저)이란 책이 출간되면서 짚을 것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이른바 경제민주화론자들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빈부 격차 심화와 양극화라는 심각한 문제의 주원인이 박정희 체제의 유산인 재벌과 관치, 토건주의에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 우리나라가 당면한 여러 가지 경제문제가 신자유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박정희 체제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끝난 지 이미 30년이 넘었고, 이후 전두환 정부의 ‘경제 자유화 및 안정화’, 노태우 정부의 ‘재벌 규제’,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김대중 정부의 ‘IMF 개혁’,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허브 정책’, 그리고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합작인 한-미·한-유럽연합(EU) FTA 등을 통해 청산이 되어도 몇 번이나 청산된 박정희식 경제체제의 망령을 되살려내어 그것을 우리 사회를 개선하는 (반면교사적) 나침반으로 삼아야 하는가?”( 419쪽)
시장만능주의, 잘못 향한 비난의 화살
이 구절은 의 맨 끝에 나오는데, 첫머리에 나와야 마땅하다. 아니, 이게 웬 말인가. 내 눈을 의심하게 된다. 박정희가 부당하게 공격받는 것에 항의하고 박정희식 관치경제와 재벌경제를 옹호하려고 이 책을 썼단 말인가? 물론 3명의 공저자가 주장하듯 시장만능주의의 폐해도 크지만, 박정희 체제의 유산이 한국 경제와 사회에 끼친 악영향이 얼마나 큰데, 이에 눈감는 태무심은 정말 놀랍다. 일제 잔재조차 아직 청산하지 못한 게 숱한데, 죽은 지 30년이 돼서 영향이 없다니. 아직도 박정희 숭배자들이 우글거리고, 그 딸이 아버지 후광을 등에 업고 대통령 자리를 넘보는 게 한국의 현실인데, 어찌 박정희 체제가 옛날이야기라 할 수 있는가. 놀람과 실망을 넘어 저자들의 역사의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은 저자들의 방대한 지식을 보여주는 좋은 책이지만 지나치게 논쟁적이라서 눈에 거슬린다. 학문 발전을 위해 논쟁은 필요하지만, 지나친 논쟁은 오히려 해로울 수 있다. 3명의 공저자는 명백히 시장만능주의를 비판하고 복지국가를 옹호하기 위해 책을 썼는데, 책의 너무 많은 분량을 경제민주화 세력을 비판하는 데 바치고 있어서 쓸데없는 오해와 분란을 일으킨다. 이 책에는 시장만능주의를 주장하는 한국의 보수적 경제학자들에 대한 비판도 드물게 나오긴 하지만, 경제민주화를 주장하고 재벌 개혁을 주장하는, (3명의 공저자 관점으로는) 시장만능주의자로 귀결되고 마는 진보적 경제학자들을 비판하는 데 100배의 에너지를 쓰고 있다. 한국에서 시장만능주의를 주입하고 퍼뜨린 장본인은 경제학계의 주류를 이루는 대다수의 보수적 경제학자들과 보수언론, 보수정당이지 소수의 진보적 경제민주화론자들이 아니다. 그리고 필자가 아는 한, 이들은 시장만능주의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보수에 대한 비판은 최소화하면서 우군이라 할 수 있는, 약간 생각이 다른 진보적 경제학자들에게 이렇게 집요하게 공격을 퍼붓다니. 그 집요함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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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나는 진보 분열의 통증
‘경제민주화냐, 복지국가냐’라는 이분법도 그렇다. 이 둘이 왜 양자택일이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복지국가는 복지국가대로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고, 경제민주화는 경제민주화대로 중요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복지국가는 한국 경제의 거시적 과제이고, 경제민주화는 미시적 과제다. 두 가지가 모순되고 충돌할 이유는 없으며, 사실 서로 보완적이다. 양자는 친화적이고, 길동무다. 지금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은 복지의 전면적 확대와 재벌 개혁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늦었지만 모처럼 올바른 방향을 잡았다. 새누리당의 복지 공약은 너무 소극적이고, 재벌 개혁은 볼 만한 내용이 없다.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이 내놓은 보편적 복지는 상대적으로 진취적이고, 재벌 개혁은 △순환출자 금지 △출자총액제한제도 부활 △금산분리 강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거기에다 경제민주화의 주요 요소인 노동자의 경영 참여도 두 당이 언급하고 있다. 이런 재벌 개혁이 3명의 공저자가 보기에는 불필요하고 미국 자본을 돕는 이적행위란 말인가.
흔히 말하기를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더니 그들의 책 을 읽어보니 그 말이 더욱 실감난다. 참여정부 내내 조·중·동과 한나라당, 보수 학계의 공격에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몇 배 더 아픈 것은 진보 쪽에서 오는 공격이었다. 이제 몇 년이 지나 진보 진영도 이를 반성하고 통합·단결하자는 분위기가 일고 있어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지금 을 읽으니 그때의 통증이 되살아난다.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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