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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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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 수사 증언하는 재판 기록

증거인멸 주도한 혐의 받은 진경락 전 총리실 과장,
‘윗선’과 연결 정황 상고 기록에 새롭게 드러나…
수사 검사팀, 진 전 과장의 휴대전화 4대와 ‘부인하라’는 지시 담긴 메모 압수하고도 발표 안 해
등록 2012-03-08 12:52 수정 2020-05-03 04:26

“수사상 필요한 건 다 했다.” 신경식 당시 서울중앙지검 1차장은 자주 이 문장을 말했다. 2010년 9월8일 서울 서초동 검찰청사는 평소보다 많은 기자로 붐볐다. 증거인멸을 지시한 ‘윗선’ 의혹에 대해 질문이 쏟아졌다. 최종석 청와대 행정관과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과의 연관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신경식 차장검사의 답변은 일관됐다. “수사상 필요한 건 다 했다.” 수사 실무를 맡은 당시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 팀장 오정돈 검사도 같은 태도였다. 진경락 전 공직윤리지원관실 기획총괄과장과 장진수 주무관만 기소됐다. 수사는 끝났다.

»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이 2010년 7월9일 서울 종로구의 공직윤리지원관실을 압수수색했다. 검찰은 수사 계획이 언론에 보도되고 며칠 뒤에야 압수수색을 벌여 총리실 직원들이 증거인멸할 기회를 줬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이 2010년 7월9일 서울 종로구의 공직윤리지원관실을 압수수색했다. 검찰은 수사 계획이 언론에 보도되고 며칠 뒤에야 압수수색을 벌여 총리실 직원들이 증거인멸할 기회를 줬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알려지지 않았던 2번의 압수수색

상고 기록을 검토한 결과, ‘윗선’과 진경락 전 과장의 연루 정황이 새롭게 드러났다. 상고 기록을 보면, 2010년 8월11일 아침 검찰이 민간인 사찰 사건 중간 수사 발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기자들이 하나둘 노트북을 들고 모여들었다. 기자들이 모르는 사이 검찰 수사관들이 서울 보라매병원으로 향했다. 검찰이 총리실을 압수수색한 지(7월9일) 약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진경락 전 과장은 수사를 앞두고 “몸이 아프다”며 이 병원 정형외과 4층 특실에 입원해 있었다.

진 전 과장은 검찰 수사가 시작되기 직전 공직윤리지원관실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를 외부로 무단 반출한 뒤 전문업체에 맡겨 사찰 관련 자료를 삭제하도록 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진 전 과장은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 주요 사찰 사건들을 각 팀에 배당하는 업무를 맡았다. 고용노동부에서 이인규 전 공직윤리지원관(구속) 아래서 일하다가 이명박 정부 출범 뒤 청와대로 파견돼 이영호 전 비서관과 함께 일했다. 야당과 언론은 ‘윗선’ 의혹을 규명할 핵심 인물로 진 전 과장을 지목해온 터였다.

검찰 수사관들이 오전 10시20분께 병실에 들어갔다. 방 한구석에 충전 중이던 휴대전화 2대가 눈에 띄었다. 진 전 과장은 환자복을 입고 면도를 하지 않아 턱에 수염이 많았다. 진 전 과장의 부인이 또 다른 휴대전화 2대를 진료실에서 가방에 숨기려 했다. 검찰 수사관들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검찰은 모두 4대의 휴대전화를 압수했다.

그때 돌아서던 검찰 수사관 눈에 신문지가 들어왔다. 침대 위에 가 펼쳐져 있었다. 여백에 메모가 적혀 있었다. ‘끝까지 부인하라.’ 그 옆에 진 전 과장이 뭔가 끄적거려놓은 A4용지도 있었다. 수사관들은 신문지와 메모지 등도 함께 압수했다. 수사관들이 압수 목록과 압수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을 마치자 오전 11시55분이 됐다. 진 전 과장은 한숨을 푹 쉬며 “내가 증거인멸을 했다는데 정말 억울하다, 잘못이 있다면 그건 현 정부가 부패한 탓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검찰은 진 전 과장의 이때 태도에 대해 “자조적인 말을 건넸다”고 기록했다.

낮 12시40분 검찰 수사관들은 두 번째 압수수색을 위해 서울 동작구 사당동의 진 전 과장 집으로 향했다. 이때 진 전 과장이 검찰 수사관에게 전화로 항의하기 시작했다. “한 인간을 이렇게 망가뜨려놓고 불법적인 압수수색을 하면 되느냐. 검찰이 불법 수색을 하였다고 언론에 제보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 전 과장은 “영장에 압수수색 장소가 병원 입원실로 나와 있는데 2대는 진료실에서 가져간 것으로 (장소가 달라) 불법 아니냐”고 말했다. 수사관은 휴대전화를 숨기려던 진 전 과장의 부인을 입원실로 데려온 뒤 압수했으므로 합법적이라고 설명했지만, 진 전 과장은 계속 휴대전화 2대를 돌려달라고 주장했다. 검찰 수사관은 혹시 모를 논란에 대비해 압수수색 장소를 추가한 영장을 새로 발부받았고 오후 4시께 입원실에 다시 갔다.




당시 신경식 차장검사는 증거인멸과 관련된 통화 내역에 대해서도 “수사상 필요한 건 다 (확인)했다”고 답했다. 그러나 9월9일 검찰은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진 전 과장의 발언과 ‘부인하라’는 메모 등에 대해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총리실 직원이 건낸 핸드폰 추정”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환자복을 입고 있던 진 전 과장은 검찰 수사관들이 다시 들이닥치자 놀란 표정이었다. 수사관들은 “수염을 깎고 외출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였다”고 기록했다. 수사관들은 또 다른 메모도 발견했다. 책상에 빼곡히 메모가 적힌 A4용지가 있었다. ‘계속 부인하라. 압수수색의 불법을 부각하라’는 문구 등이 적혀 있었다. 진 전 과장은 한 손에 휴대전화를 쥐고 변호사와 통화하며 다른 손으로 메모지를 쥐고 밖으로 나갔다. 새로 발부받은 영장에 압수물로 휴대전화를 한정해 메모지를 압수할 권한이 없었다. 진 전 과장은 10분 동안 통화한 뒤에야 압수 목록에 서명했다. 수사관이 “지금 사용하는 핸드폰은 또 어디서 난 것이냐”고 묻자, 진 전 과장은 “옆방 환자에게 빌렸다”고 답했다. 수사관이 믿기 어려운 해명이었다. 이날 압수수색에 대해 검찰은 “위 핸드폰은 환자복을 입지 않은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진경락에게 전해준 것으로 위 남자는 총리실 직원으로 추정됨”이라고 기록했다.

당시 신경식 차장검사는 “증거인멸 부분은 수사팀이 다각도로 어렵게 확인해서 밝혀낸 것이다. 어려운 수사였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수사에 대한 자부심을 내비친 것이다. 증거인멸과 관련된 통화 내역에 대해서도 “수사상 필요한 건 다 (확인)했다”고 답했다. 그러나 9월9일 검찰은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진 전 과장의 발언과 ‘부인하라’는 메모 등에 대해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통화 내역 분석에도 부실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검찰이 증거인멸 혐의와 관련해 통화 내역을 분석했다. 진 전 과장의 통화 내역도 조사됐다. 그는 2010년 6월29일 저녁 7시28분께 정보통신업체 대표 조아무개씨, 조혜정씨와 통화했다. 검찰은 통화 내역에 대해 “따라서 진경락이 평소의 퇴근 경로를 크게 벗어나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들러 전화하였던 조혜정씨에 대해 수사가 필요하다”고 결론 냈다. 조혜정씨는 기자로 당시 사건 취재차 진씨와 통화했다. 하지만 검찰은 조 기자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잘못이 있다면 그건 현 정부가 부패한 탓일 것이다”라고 말한 진 전 과장은 결국 주범으로 기소됐다. 검찰은 이영호 전 비서관을 8월6일 오후부터 약 8시간 동안 단 한 차례 조사했다. 최종석 행정관에게는 출석요구서를 보내지도 않았다. 신경식 당시 차장검사와 오정돈 부장검사는 ‘그랜저 검사’ 사건 때도 1차 수사를 맡아 엉터리 수사라는 비난을 샀다. 두 검사는 현직 부장검사에게 차량을 뇌물로 줬다는 업체 대표를 압수수색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완강히 부인하는 진 전 과장

재수사를 맡은 강찬우 특임검사는 곧장 압수수색을 실시해 대비됐다. 신경식 당시 차장검사는 지난해 청주지검장이 됐다. 오정돈 당시 부장검사는 지금 서울북부지검 차장검사다. 진경락 전 과장은 2월29일 과의 통화에서 “아직 확정(판결이)이 안 났잖아요”라고 말했다. 자신은 무죄라는 주장이다. 이어 그는 ‘최종석 당시 행정관과 이영호 전 비서관과 무관한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부인했다. ‘계속 부인하라’는 메모는 누구의 지시냐는 질문에는 “그런 사실(병원 압수수색)은 있는데 자꾸 소설 같은 말을 하니 더 이상 통화하기 어렵다”며 전화를 끊었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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