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맨을 찾아라!”
인기 예능 프로그램이던 〈X맨 일요일이 좋다〉의 부활이 아니다. 장소는 서울 여의도로 같지만, 주무대는 텔레비전 방송사가 아닌, 여야 정치권이다. 역대 X맨들은 강호동·박명수 등 인기 연예인들이었지만, 이번에는 국회의원을 포함한 정치인들이 주인공이다.
‘김진표·이광재 아웃’, X맨 낙선운동
X맨은 겉과 속이 다른 조직 내 배신자다. 새누리당의 차명진 의원은 지난 1월 말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 안에 X맨이 있다”고 주장했다. 당내에는 최재천 전 민주통합당 의원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김종인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을 겨냥한 것이라는 얘기가 파다했다. 김종인 위원은 대표적인 재벌개혁론자다. ‘재벌당’으로 불려온 새누리당과는 태생적으로 맞지 않는다. 하지만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당을 환골탈태하는 조처의 일환으로 그를 영입했다. 이후 새누리당은 한나라당이라는 이름까지 버리고, 새 정강·정책에 ‘경제민주화’를 명시하는 대대적인 신장개업에 나섰다. 여당 내 보수파들의 김 위원에 대한 공격은 경제민주화에 대한 반발로 비칠 수 있어 X맨 소동은 일회성 해프닝으로 끝났다.
하지만 야당의 X맨 파문은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민주당은 이번 총선과 대선을 정권 탈환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다. 여당이 ‘전신성형’의 논란을 불사하며 변신을 꾀한다 해도, 친재벌 정책으로 양극화를 심화한 이명박 정부의 원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핵심 선거 전략은 복지 확대와 경제민주화다. 민주당 내 X맨들로는 경제민주화와 재벌 개혁에 배치되거나 그런 전력이 있는 인물들이 꼽힌다. X맨 논란은 당의 정체성을 훼손시키는 것은 물론, 양대 선거에도 바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다.
불길은 당 바깥에서 붙기 시작했다. 선대인 세금혁명당 대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경제학자 우석훈씨, 소설가 서해성씨 등은 지난 2월12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민주당의 X맨 낙천·낙선 운동을 공개 선언했다. 김진표 민주당 원내대표를 대표적인 X맨으로 실명 거론하고, ‘김진표 아웃’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해 10만 명을 목표로 서명운동에 착수했다. 또 민주당 공천심사위원인 박기춘·노영민 의원도 경제민주화를 구현할 수 없는 인물로 지목했다. 인터넷 논객 오용석 개방과통합연구소장도 김 원내대표와 이광재 전 강원지사를 ‘재벌장학생’으로 적시하며, 민주당의 ‘경제정풍’을 촉구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도 2월16일 비준안 처리에 책임 있는 18대 의원 160명을 심판 대상으로 발표하며, 민주당의 김진표·강봉균·김동철·김성곤 의원 등 7명을 포함시켰다.
X맨 파동은 민주당 안에서 미묘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진보 성향의 한 전직 의원은 “당내 공천위원 7명 중에는 시민사회가 X맨 낙천 대상으로 직접 거론한 인물과 참여정부의 재벌 개혁 실패에 책임 있는 친노 386 멤버가 다수 포함돼 있다”며 “공천 탈락 대상이 공천 심사를 하고 있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수도권의 한 현역 의원은 “최고위원들이 나눠먹기식으로 공심위원을 임명한 결과”라며 “당은 진보를 선택했는데 공천위원은 보수인 상황에서 공천심사에 응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고민하는 예비후보가 많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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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봉균 등 모피아 X맨
X맨으로 꼽힌 김진표 원내대표는 ‘모피아’(기획재정부 출신 경제관료를 가리키는 합성어) 출신의 재선 의원으로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 참여정부에서 경제부총리와 교육부총리를 지낸 데 이어, 민주당의 정책위의장과 원내대표를 차례로 맡았다. 김 원내대표는 참여정부 초기부터 경제민주화와 재벌 개혁에 역행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부위원장 시절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핵심 공약으로 내건 재벌 개혁에 대해 “자율적·장기적·점진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말해 ‘개혁 후퇴’ 논란을 빚었다. 선대인 대표는 “김 원내대표는 참여정부 초대 경제부총리 시절 법인세 인하를 내놓아 이명박 정부 감세정책의 터를 닦았고, 부동산 시장 안정을 위한 대한주택공사 분양원가 공개 요구를 ‘사회주의적’이라고 공격했으며, 골프장 무더기 건설 등 부동산 경기 부양책도 함께 추진했다”고 문제점을 조목조목 열거했다.
김 원내대표는 금융 당국이 2003년 미국계 사모펀드인 론스타에 외환은행 인수를 불법적으로 승인할 당시 경제부총리였다. 그는 2005년 교육부총리 시절에도 국립대 법인화에 시
동을 걸고, 사립대 등록금 인상 경쟁을 방조했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2007년 민주당 정책위의장 시절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적극 추진했다. 오용석 소장은 “김 원내대표는 지난 두 차례의 민주정부 집권 시절 삼성 등 재벌의 앞잡이로서 이른바 ‘신자유주의 고속도로’를 깔아줘, 이후 이명박 대통령이 그 위를 고속 질주할 수 있게 했다”며 “서민경제 피폐화의 책임을 결코 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김진표 원내대표는 최근 새누리당이 경제민주화를 담은 정강·정책을 발표하자 “경제질서를 망쳐놓고 후안무치한 행동”이라고 공격했다가, 김종인 위원에게서 “그런 얘기를 할 자격이 있느냐”고 역공을 당하기도 했다.
김진표 의원의 정체성 논란은 지난해 5월 원내대표 취임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한국방송 수신료 인상안을 표결 처리하기로 당시 한나라당과 일방적으로 합의하고, 한-미 FTA 비준과 관련해 여당과 비밀리에 합의문을 작성했으며, 외환은행 매각에 대한 국정조사 추진을 포기한 채 국회 등원을 주도했다”고 지적했다. 김 원내대
표는 참여정부 이전부터 친재벌 경제관료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1993년 재무부 세제심의관 시절에는 김영삼 정부의 금융실명제 도입 사실을 삼성에 미리 알려줘 대비할 수 있도록 해줬다는 의심을 샀다. 그의 지역구는 삼성의 공장이 몰려 있는 경기도 수원 영통이다. 선 대표는 “김진표 원내대표는 경제민주화와 민생경제 개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며 “그가 원내대표로 있는 한 민주통합당은 도로 민주당이 될 우려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김 원내대표는 맞대응을 피하고 있다. 김 원내대표 쪽 인사는 “정면 대응을 하면 문제를 더 키우고 본질을 흐릴 수 있어 대응하지 않기로 했다”며 “당의 정체성이 중요하다는 데는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FTA 협상과 관련해 여당과 몸싸움을 하지 말자고 한 것을 문제 삼는 것은 너무하지 않느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정체성을 의심받는 모피아 출신 정치인은 김진표 원내대표만이 아니다. 3선인 강봉균 의원은 김대중 정부에서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냈고, 정책위의장과 원내대표를 역임한 거물이다. 그는 정책위의장 시절에 공공연히 재벌 규제의 상징인
출자총액제한제(출총제)의 폐지를 주장했다. 출총제의 적용 대상을 축소하고, 각종 예외 조항을 양산해 껍데기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지적도 받는다. 그 외에 모피아 출신으로 이용섭·홍재형·장병완 의원 등이 꼽힌다. 이 중에서 정책위의장과 조세개혁특위를 겸하고 있는 이용섭 의원은 상대적으로 가장 개혁적이라는 평을 듣는다.
민주당의 X맨으로 몰리는 또 다른 그룹은 토건족과 한-미 FTA 찬성파들이다. 박기춘 의원(경기 남양주을)은 국회 국토해양위 소속으로 건설업계에 유리한 정책과 법안을 입안해온 대표적 토건족으로 꼽힌다. 그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남양주시의 시대정신은 토건”이라며 스스로 토건족임을 인정하며, “당의 정체성에 맞지 않더라도 당선될 사람을 공천해야 한다”고 퇴진 요구를 일축했다. 박 의원은 이성호 전 한나라당 의원의 보좌관 출신이다. 원내수석부대표를 맡고 있는 노영민 의원은 한나라당과의 한-미 FTA 합의문 작성을 주도한 일로 비난을 사고 있다. 박 의원과 노 의원은 공천심사위원을 겸하고 있어 논란을 더한다. 김성곤·김동철 의원은 한-미 FTA 비준과 관련해 역시 한나라당과의 합의 처리를 주장해 X맨으로 몰렸다. 김진표·강봉균 의원은 한-미 FTA와 관련해서도 퇴진 대상에 포함됐다.
문재인·한명숙도 X맨이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오른팔로 불린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는 친노그룹 중에서 X맨의 핵심으로 불린다. 참여정부에서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이동걸 한림대 객원교수는 재벌 개혁이 실패한 요인의 하나로 그를 지목한다. “대통령 주변에는 재벌의 입 노릇을 하는 측근이 있었다. 개혁과 관계없이 자기 영향력이나 입지를 지키기 위해 재벌·관료와 영합한 이들이다. 그 사람들을 중심으로 내부에서 재벌 개혁에 대한 조직적 반대가 많았다.” 참여정부의 개혁을 위해 참여했던 인사들은 이 전 지사를 중심으로 한 대통령 측근들과 경제관료들의 연합 세력에 의해 개혁그룹이 밀려나 재벌 개혁이 용두사미로 끝났다고 분석한다.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장(전 국민경제자문회의 사무차장)은 “노 대통령은 사람을 임명하거나 정책을 맡길 때 개혁 인사와 관료가 서로 견제하도록 배치했는데, 대통령과 가까이 있는 이광재가 관료들과 손을 잡았으니 결과는 뻔했다”고 말했다.
이광재 전 지사의 친재벌 행각에 대한 증언은 다양하다. 윤석규 민주당 안산 상록을 총선 예비후보(전 열린우리당 원내
기획실장)는 2002년 대선 전후 노무현 후보 캠프에서의 경험을 소개했다. “2002년 초 참여연대의 장하성 교수가 소액주주운동의 일환으로 삼성주총에 참여해 이학수 부회장을 이사로 선임하는 안건에 반대했을 때, 이광재가 대선 캠프 안에서 장하성 교수를 빨갱이 아니냐며 격렬하게 비판해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전 지사는 노 후보가 정식 후보가 된 직후인 2002년 5월 삼성경제연구소가 출간한 이라는 책을 들고 다니며 대선 공약에 반영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전 지사는 2004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에는 노 대통령 직계 출신인 백원우·서갑원·이화영 등 386 출신 의원들과 의정연구회를 결성했다. 의정연구회는 국회에서 삼성경제연구소와 공공연히 공동 세미나를 열어 입길에 올랐다.
유력한 대선주자로 불리는 문재인 민주당 상임고문(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친노그룹의 큰형 격이다. 그는 새누리당의 텃밭인 부산 사상구에 출사표를 던지고 바닥을 훑고 있다. 문 고문은 최근 언론에 “경제성장의 혜택이 소수 계층에 편
중돼 서민의 삶이 팍팍해져 경제민주화가 절실히 필요하다”며 “노 대통령 시절의 실패 경험이 있어 더 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그를 대하는 시각은 엇갈린다. 한쪽에서는 노 대통령의 분신으로서 경제 개혁 실패에 대한 공동 책임이 크고, 재벌 개혁 실패에 대한 공식적인 참회가 없어 진정성이 안 보인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다른 쪽에는 그에게 큰 책임을 묻는 것은 너무 가혹하고, 더구나 재벌 개혁의 X맨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문 고문은 사석에서 참여정부의 개혁 실패에 대해 크게 탄식했다고 한다. 그는 2008년 2월 참여정부가 퇴장하기 직전 정권 초기에 참여했던 개혁 성향 인사들과 회동한 자리에서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욕먹더라도 재벌 개혁을 위해 노무현 대통령을 강하게 푸시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당시 참석자 중 한 인사는 “문 고문이 ‘너무 순진하게 내 일만 잘하면 된다는 좁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탄식했다”고 전했다. 문 고문이 재벌 개혁 실패를 방관만 한 것은 아니라는 증언도 있다. 박영선 민주당 최고위원은 “2005년 삼성 금융계열사가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을 어긴 것을 제재하려고 법 개정을 논의할 때 청와대와 친노 인사들이 모두 반대해 힘들었는데,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이 유일하게 도와줬다”고 말했다.
한명숙 민주당 대표는 참여정부 시절 총리를 지낸 대표적인 친노 인사다. 한 대표는 문 고문과 함께 과거 참여정부 시절 한-미 FTA 타결을 ‘참여정부 외교의 결실’이라며 칭송했던 사실과 관련해 시달리고 있다. 한 대표는 지난 2월8일 주한 미국대사관을 방문해 한-미 FTA 재협상을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했다. 한 대표는 서한에서 “이명박 정권이 추진한 한-미 FTA는 국가 이익이 실종된 것이어서 그대로 발효할 수 없다”며 “재협상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폐기를 위한 조처를 취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하지만 위키리크스가 지난해 공개한 주한 미국대사관의 외교 전문에 담긴 내용을 보면, 한 대표는 총리 시절인 2007년 5월 알렉산더 버시바우 대사와의 오찬 모임에서 “내년 봄 새 정부가 들어서기를 기다리기보다 이번 가을에 협정이 비준되길 희망한다”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이명박 정부가 재협상을 통해 자동차 부문 등에서 미국에 조금 더 양보한 것은 있지만 노무현 정부의 한-미 FTA 안과 본질적으로 큰 차이는 없다. 참여정부 시절 한-미 FTA에 찬성했던 정치 지도자들이 지금은 사회적 양극화를 심화할 것이라며 180도 돌변했으니 국민으로서는 혼란스러울 수 있다. 트위터에서는 ‘한명숙은 여자 김진표’, 문재인은 ‘남자 한명숙’이라는 말까지 돌고 있다. 문재인 고문 쪽에서는 “문 후보가 지난 2월13일 민주당 공천 면접장에서 한-미 FTA와 관련해 ‘문제 조항 폐기를 위한 재협상이 필요하다는 당론과 같다’는 견해를 밝혔고, 노무현재단 차원에서도 이미 그런 공식 입장을 정리해 발표했다”고 해명했다.
겉으로만 재벌 개혁 주장 의원 많아
노무현 정부의 정책 중에는 삼성이 아이디어를 제공한 게 여럿이라는 얘기는 꽤 알려져 있다.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 동북아경제중심 국가론, 한-미 FTA 추진 등이 대표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벌 개혁에 성공한 첫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했지만, 정권 초기부터 재벌에 자신의 뇌와 심장을 맡긴 셈이다. 정태인 원장은 “참여정부 초기 경제 개혁을 위해 함께한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 이동걸 금감위 부위원장 등 핵심 인사들은 모두 삼성 때문에 나갔다”며 “이정우 실장은 금산법 개정 때 삼성 봐주기를 반대하다가, 이동걸 부위원장은 삼성생명 상장과 관련해 보험가입자의 몫을 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그렇게 됐다”고 말했다. 박영선 최고위원은 2007년 5월 노 대통령과의 일화를 들려준다. “대통령이 따로 불러서 갔어요. 노 대통령이 ‘재벌 개혁을 정부 출범 초기에 빨리빨리 해야 한다는 박 의원 말이 맞았다’며 ‘그랬으면 시장권력이 재벌에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하고 후회하더군요.”
민주당 안에서 정체성과 관련해 당내 X맨 색출이 본격 제기된 것은 처음이다. 민주당에서 낡은 정치 청산 같은 수준을 넘어 당의 정체성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된 것 자체가 불과 몇 년 안 된다. X맨 파동은 무엇보다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실패 경험이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수도권의 한 중진 의원은 “정치적 민주화의 근저에는 내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유권자들의 기대가 있었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간 경제민주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 미흡했다. 이제는 그것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민주당의 현재 인적 구조나 인식 수준을 보면 설령 집권에 성공하더라도 경제민주화와 재벌 개혁이 또다시 용두사미로 끝날 수 있다는 걱정이 적지 않다.
일부에서는 ‘제2의 노무현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도 제기한다. 민주당 경제민주화 특별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외부 인사는 “(여기까지 온 것도) 기적”이라며 “그럴 위험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겉으로는 민주당 의원들이 모두 경제민주화 열기로 뜨거운 것처럼 비치지만, 실제 내부 온도는 싸늘하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올해 들어 잇달아 경제민주화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그 원동력은 지난해 여름 경제민주화 특위를 구성하고, 외부 인사들을 적극 영입해 정책 개발에 힘써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밖에서 보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고 한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위원회 구성에서는 당내 인사가 다수를 차지하지만 그동안 현역 의원들 중에서 회의 참석자는 거의 없었다”며 “특위에 참석한 한 의원은 출총제 부활 등 논의 안건에 사사건건 반대하고, 밖에서는 경제민주화의 전도사처럼 행세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실제 재벌 개혁에 관해 나서서 얘기하는 민주당의 현역 의원들은 천정배·정동영·박영선·박선숙 등 손에 꼽을 정도다.
다시 분주해진 재벌들의 손
그래서 특정 인사들 탓이 아니라 당의 전반적인 체질과 인식이 근본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한 중진 의원은 “김진표 대표에 대해 뭐라고 하는데, 그를 탓할 것 없다”며 “그를 원내대표로 뽑은 것은 다름 아닌 민주당 의원들 아니냐”고 말했다. 민주당의 한계는 2010년 7월 민주정부 10년 평가와 과제에서도 잘 드러난다. 민주당은 보고서의 총론 평가에 해당하는 35쪽에서 “재벌 대기업에 대한 특혜의 집중 및 문어발식 사업영역 확장, 산업자본의 금융지배 문제 등은 해소했다”며 재벌 개혁에 대해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듯이 표현했다. 개혁 실패에 대한 일반의 냉엄한 평가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한 중진 의원은 “지금 상태로는 (경제민주화를 제대로 이룰) 가망이 거의 없다”고 회의적으로 말했다. 반면 박영선 최고위원은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너무 크다는 것을 국민이 절감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재벌들의 보이지 않는 손도 작용하고 있다. 수도권의 한 재선 의원은 “이미 삼성 등 재벌들의 로비가 세게 시작됐다”며 “당선 가능성이 있는 의원들은 맨투맨식으로 만나 지원을 미끼로 회유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 특위 멤버는 “의원들이 굳이 재벌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는 눈치보기가 심하다”고 말했다.
재벌 개혁 이후의 한국 경제에 대한 청사진이 분명하게 제시되지 못하는 것도 미흡한 점으로 꼽힌다. 재벌 위주의 불균형 성장에 따른 폐해를 강조하지만, 재벌 개혁이 혹시 재벌의 경쟁력을 떨어뜨려 한국 경제가 좌초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두려움을 불식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 출범 초기에 재벌 개혁이 실종된 결정적 계기는 SK 분식회계, 신용카드 사태 등이 터져 경제가 휘청거리게 된 것이다. 다음 정부도 재벌 개혁에 나섰다가 경제가 조금만 흔들리면 언제든 후퇴할 수 있다. 민주당 경제민주화특위 멤버인 홍종학 경원대 교수는 “재벌 개혁과 경제민주화는 재벌은 물론 한국 경제의 경쟁력을 높이자는 것”이라며 “재벌 개혁과 함께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고, 보편적 복지도 그것에 순기능을 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재벌 위주에서 탈피한 새로운 성장전략에 대한 성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민이 신뢰할 정도로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다. 박선숙 의원은 “집권 이후 정책 우선순위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특정 세력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국정운영의 청사진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제2의 노무현’식 개혁 실종을 막으려면 과거 재벌 개혁 및 경제민주화 실패에 대한 반성과 한-미 FTA에 대한 태도를 더 명백히 밝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당 지도부가 자기 생각과 행동을 분명히 보여줘야 한다”며 “한진중공업, 제주 강정마을, 쌍용자동차 등 주요 현안들에 대해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노무현 정부 때부터 한-미 FTA를 반대해온 천정배 의원은 최근 “한-미 FTA가 잘못 협상된 것임이 명백하게 드러난 이상, 민주당은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국민께 사죄하고 잘못 체결한 협약을 폐기시켜야 한다”고 지도부에 촉구했다.
발등의 불은 코앞의 공천이다. 민주당의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은 강철규 전주 우석대 총장은 최우선 공천 기준으로 “재벌 개혁을 제대로 할 사람을 뽑겠다”고 강조했다. 당 밖의 낙천·낙선 운동도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선대인 대표 등은 “민주당이 만약 X맨들을 공천할 경우 경제민주화 의지가 없는 것으로 판단해 한명숙 대표의 사퇴를 요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오용석 소장은 “김진표 대표 등 원내 X맨들과 이광재 등 원외 삼성 장학생들을 민주당에서 가시적으로 배제하는 공천 기준을 밝혀야 한다”고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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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6인방 퇴출’로 시작하지만
이런 민주당의 X맨 퇴진론은 여당에서 제기되고 있는 이명박 실세 퇴진론과 비교된다. 현재까지 시민단체들의 타깃은 모피아 출신의 김진표·강봉균 전·현직 원내대표, 공천심사위원인 노영민·박기춘 의원, 한-미 FTA 합의 처리를 주도한 김동철·김성곤 의원으로 압축돼 ‘X맨 6인방’으로 불린다. 한 초선 의원은 “본인들의 결단에 맡길 일이지, 누가 누구를 돌로 내려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며 신중론을 폈다. 하지만 한 총선 예비후보는 “당의 정체성을 진보로 설정해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를 핵심 공약으로 제시하고, 이에 장애물이 되는 한-미 FTA 반대를 천명한 상황에서 이에 배치되는 인물들을 공천에서 탈락시키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며 “문제 인물들은 당과 본인을 위해 지금이라도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예비후보는 “최근 분위기가 좋다고 해서 민주당이 자만했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다”며 “국민이 민주당을 신뢰하게 만들려면, 좋은 정책의 개발과 함께 능력 있는 사람들을 대거 영입해서 이번 총선에서 당선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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