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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가지 법 빼고 보자

30년 지기 이진경, 사이버 논객 이택광, 여성 심리학자 심영섭, ‘진중권 키드’ 한윤형…
중딩부터 의원까지 상대하며 비합리와 싸우는 온라인 워리어 진중권을 말하다
등록 2012-02-16 05:21 수정 2020-05-02 19:26

조망지 따라 풍경이 갈리듯, 사람에 대한 평가도 매한가지다. 인연과 관심, 성정과 눈썰미에 따라 그려지는 인물의 됨됨이가 영향받는다. 진중권이란 ‘문제적 개인’을 재현하는 일도 그렇다. 이진경과 이택광, 심영섭과 한윤형의 진중권은 각자가 지닌 앵글에 따라 길항과 수렴의 지점들을 오간다. 진중권을 주제로 네 사람과 진행한 인터뷰를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해 싣는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사회학
나와 진중권은 30년 지기다. 1983년 서울대 지하서클에서 처음 만났다. 내가 보는 논객 진중권의 장점은 꼼꼼함과 성실성이다. 최근 트위터에서 선관위 음모론 문제로 논쟁하는 걸 봤다. 짧은 시간에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찾아내 상대를 논박했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과거 인터넷 게시판에서 활동할 때 어린 친구들의 악성 댓글에까지 하나하나 답변을 달던 모습이다.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해주면 하루이틀 뒤 아이들 태도가 달라진다”고 했다.

이런 진중권의 행동을 추동하는 것을 나는 ‘진실에의 의지’라고 본다. 황우석이나 영화 논쟁에서 보듯 진실이 아닌 것이 대중력 영향력을 갖는 것을 그는 견디지 못한다. 그러니 원고 쓰고 강연할 때를 제외하곤 종일 온라인으로 논쟁하고 소통하는 거다. 한때는 이런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좋은 머리와 글재주를 왜 더 깊고 넓은 일에 쓰지 않느냐고 타박도 했다. 지금은 이해한다. 진중권에겐 그의 길이 있다. 사회적 쟁점들에 기민하게 대응하면서 사람들이 간과하는 문제를 정확하고 재치 있게 짚어내고, 이를 통해 사회를 그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

1990년대 초까지는 혁명을 꿈꾸며 조직 생활을 함께 했지만, 지금은 정치 지향이 많이 다르다. 진중권은 혁명이나 사회주의 같은 거대한 문제를 갖고선 사람들과 소통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본다. 우리 사회에서 합의 가능한 최대치가 사회민주주의라고 말한 적도 있다. 조직형 인간도 아니다. 옛날부터 ‘이건 아니다’ 싶으면, 지도부도 친구도 없었다.

화법과 스타일을 두고 말이 많은 건 안다. 나도 한때는 공격적 글쓰기를 즐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피하게 됐다. 싸움이 아니라 설득이 목적이라면,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중권은 스스로 표현하듯 ‘워’(War)를 하고 있다. 비틀고 베고 찌른다. 그 힘이 영향력으로 나타난다. 그 과정에서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도 상처 입는다. ‘워리어’ 진중권의 업이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문학
진중권은 말 잔등에 붙은 ‘등에’ 같은 존재다. 대중의 열정은 원래 비합리적이다.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동시에 갖는데, 우리 사회는 종종 이 집단적 열정이 지나쳐 사달이 난다. ‘나꼼수’ 사태가 좋은 예다. 열정의 부정적 측면이 긍정성을 압도하려고 할 때, 진중권은 여지없이 나타나 따갑게 후벼판다. 아프고 불쾌하지만, 지나고 나면 사람들은 ‘그때 진중권이 옳았어’ 하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진중권이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네트워크에 매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진영에 신경 쓰지 않는다. 싸움을 하면서 내 편, 네 편 가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학맥으로 엮이는 것도 싫어한다. 그러니 눈치 보지 않고 할 말을 한다. 캐릭터도 독특하다. 피터팬이다. 한참 어린 20~30대와도 거부감 없이 말을 섞는다.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결합해 그를 중요한 논객으로 만들었다. 지식인 사회에선 좀체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유형의 논객이다.

한때 그는 전위정당 노선을 추구한 사회주의자였고, 이후엔 사회민주주의자를 자처했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식 진보적 자유주의로 확실히 기운 것 같다. 보수화됐다는 뜻은 아니다. 그가 싸움을 통해 확립하려는 것은 상식과 합리성, 그리고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권리’다. 그는 철저하게 상식과 논리에 근거해 발언한다. 상식은 그 자체로 급진적이거나 정치적이지도 않지만, 한국처럼 상식이 확립되지 않은 사회에선 상식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대단히 정치적인 기획이 된다. 한국적 맥락에서 진중권의 자유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은 박노자·김규항의 사회주의보다 급진적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일각에선 그에게 엘리트주의자의 혐의를 두지만, 동의 못한다. 트위터에서 종일 범부들과 치고받는 사람이 무슨 엘리트인가. 진중권을 엘리트주의자라 비난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반지성주의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지식인을 혐오하고 토론하지 않으려는 것, 논쟁의 장 자체를 회피하려는 것. 이 자체가 권위주의다.


심영섭 대구사이버대 교수·심리학
진중권의 캐릭터를 한마디로 요약하는 말은 ‘태도불량’이다. 동아시아, 특히 한국 사회에선 태도가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아무리 옳은 말도 말하는 자의 태도가 불량하면 커뮤니케이션이 안 된다. 그런데 진중권은 아랑곳 않는다. 알면서도 부딪친다. 그의 언어는 적확하고, 콘텐츠는 풍부하며, 판단력과 논리 또한 탁월하다. 역시 문제는 태도다. 위악적으로 보이는 논법과 제스처로 끊임없이 적을 만든다. 그의 말에는 둥근 데가 없다. 오로지 직선이다.

한편으로 진중권의 심리 저편에는 강력한 자기방어 본능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논쟁이든 일단 시작하고 나면 지거나 수세에 몰리는 것을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따라서 논쟁의 주제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집요하게 싸워보겠다는 의지가 충만하다. 상대의 나이와 지위를 가리지 않고 끝까지 쫓아가 논쟁하고 대꾸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상대가 중학생이든, 회사원이든, 국회의원이든.

우리 사회에서 이런 유형의 지식인 논객이 대중의 열렬한 호응을 얻기는 힘들다. 팬덤을 형성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김어준과 비교해보면 드러난다. 김어준에겐 독설뿐 아니라 유머가 있고, 때론 상담도 해준다. 적당히 눙칠 줄도 안다. 하지만 진중권은 시종일관, 촌철살인 후벼판다.

진중권에게 핵심적인 가치는 뭘까. 내가 보기엔 도덕성과 형평성이다. 내 편, 네 편 갈라 비판의 강도를 달리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내 편으로 여겨질 만한 사람에게 더 매서울 때가 있다. 이런 그를 보면 가끔 버나드 쇼가 떠오른다. 그가 유럽에서 태어났다면 한국에서와 다른 대접을 받았을지 모른다. 불행히도 한국의 척박한 문화적 풍토에선 진중권은 썩 환영받기 힘든 캐릭터다.

비슷한 유형을 꼽으라면 단연 유시민이다. 성격과 화법도 통하는 데가 많다. 하지만 진중권은 정치에 대해 자주 발언하지만, 유시민만큼 ‘정치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그에게 세상을 바꾸고 싶은 의지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만나면 물어보고 싶다.


한윤형 자유기고가
지금 ‘2030 논객’이라 불리는 무리의 상당수는 진중권의 우산 아래서 컸다. 그가 인터넷 논객으로 활약하던 시절은 운 좋게도 우리가 정치에 눈뜨고 글쓰기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와 겹쳤다. 이제 막 인터넷 글쓰기를 시작한 우리에게 진중권의 글은 전범이요 교과서였다.

많은 친구들이 진중권의 논리와 문체를 복기하며 자기만의 스타일을 연마해왔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따라갈 수 없는 게 있다. 진중권의 순발력이다. 1990년대 말 사이트에서 ‘밤의 주필’로 활동하던 시절, 우익 유저들의 공격을 상대해주면서 하룻밤에 무려 5가지 사안에 대해 논평을 쏟아낸 적도 있다. 그의 순발력에는 풍자와 비유 능력도 포함된다. 우리로선 인터넷을 뒤지고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겨우 조합해내는 비유를 그는 예사로 구사한다.

그는 싸울 때 상대를 안 가린다. 합리적 소통을 가로막는 모든 것과 싸운다. 이런 그를 보고 사람들은 ‘종잡을 수 없다’고 한다. 진중권이 이번엔 뭘 비판할지 모르겠다는 거다. 영화 로 논쟁할 때 특히 그랬던 것 같다. 그의 비판은 타당했지만, (사법 개혁이 화두로 떠오른) 지금 상황에선 처음부터 환대받기 어려운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완고한 합리주의자로 여기지만, 어떤 면에선 엄격한 윤리적 잣대를 갖고 움직인다. 그래서 가끔 그의 논변은 엄밀하고 논리적이라기보다, ‘이런 문제는 반성하고 해결하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당위론의 형태를 띨 때가 많다.

한때 그는 진보정당을 지지하면서도 정파 구도 안에 내재한 도그마와 비합리성을 끊임없이 문제 삼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정당에 대해서도 명시적 지지를 유보하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그가 앞뒤 안 가리고 모든 정당과 정파를 비판한다고 여기지만, 내가 볼 땐 아니다. 그는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여론을 조직해선 다음 정권의 향배를 결정할 중간층에게 호소력을 가지기 힘들다는 대단히 정치적인 판단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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