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앳된 청년. 그의 어깨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2300만 인민의 운명이 얹혀졌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공백이 된 북한 최고 권력을 넘겨받게 된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국제사회의 모든 눈이 그에게 쏠리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베일 속의 인물이다. 관심의 크기만큼 궁금증도 커져갈 뿐이다.
젊은 나이에 당뇨·고혈압?
김정은은 1984년 1월8일 평양에 있는 고위층 전용 병원인 봉화진료소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셋째부인 고영희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의 요리사를 지낸 일본인 후지모토는 김정은이 1983년생이라고 했지만, 북한 소식통들은 1984년생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부도 김정은의 출생연도로 1983년설과 1984년설이 있으며, 북한이 1982년으로 일부러 조정했다는 소문이 있다고 밝혔다.
북한에서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로 불리는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생년인 1912년의 끝자리 ‘2’에 맞췄다는 뜻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생년도 공식적으로는 1942년으로 돼 있다. 김정일 위원장이 살아 있었다면 내년은 김 주석이 100회 생일, 김 위원장이 70회 생일, 김 부위원장이 30회 생일이 있는 해가 되는 셈이다. 북한이 2012년을 ‘강성대국 원년’으로 선전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북한은 김정일 위원장의 출생지를 소련의 하바로프스크에서 백두산으로 ‘조정’한 선례와 마찬가지로, 김정은 부위원장의 출생지도 평안북도 창성으로 ‘조정’했다고 한다. 조정의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김정은은 이름을 두고도 한동안 혼선이 있었다. 현재 김정은이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원래 이름은 ‘김정운’이라고 한다. ‘구름 운’(雲)자를 사용하다 ‘은혜 은’(恩)자로 바꿨다는 것이다. 김정은의 개명된 이름이 알려진 것은, 북한 당국이 2009년 5월 해외 주재 대사관들에 내보낸 김정은 관련 북한 내부 문건에 ‘정은’으로 표기하면서부터다. 정확한 개명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북한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은덕을 상징해 이름에 많이 쓰는 ‘은’자를 사용한 것 아니냐는 추정이 나온다.
김 부위원장의 키는 168cm, 몸무게는 87kg 정도로 알려졌다. 작은 키 탓에 김정일 위원장처럼 7cm 정도의 키높이 구두를 신고 다닌다. 2011년 9월, 44년 만에 열린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와 이어진 10월 당 창건 65돌 열병식 등 공식 데뷔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김정은은 비교적 키가 커 보였다. 키높이 구두를 신은 덕이다.
김정은 부위원장은 어린 나이에도 건강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한 상황으로 알려져 있다. 가계 유전성 질환인 심장 질환과 고혈압을 앓고 있고, 당뇨병도 김정일 위원장에게서 이어지고 있다. 그가 어린 나이부터 당뇨를 앓은 데는 생모 고영희씨 사망에 따른 심한 스트레스를 풀려고 폭음을 한 게 원인이 됐다는 얘기가 있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DFE5CE"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EBF1D9"><tr><td class="news_text03" style="padding:10px"><font color="#C21A8D"><font size="3">김 부위원장의 키는 168cm, 몸무게는 87kg 정도로 알려졌다. 작은 키 탓에 김정일 위원장처럼 7cm 정도의 키높이 구두를 신고 다닌다.</font></font></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자본주의 ‘물든’ 김정남이 반면교사
김정은의 생모인 고영희는 북송 재일동포다. 제주도 출신 고경태씨의 딸인 고영희는 1960년대 재일동포의 대규모 북송 때 부모와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 만수대예술단 무용수로 활동하다가, 1970년대 중반 김정일 위원장과 동거에 들어갔다. 김 위원장은 4명의 아내 중 고영희를 가장 사랑했다고 한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고영희는 1998년께 유선암을 진단받고 항암치료를 받다가 2003년 파리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고영희는 생전에 김정은 부위원장을 포함해 장남 김정철, 여동생 김여정까지 2남1녀를 낳았다. 삼남매는 모두 스위스에서 유학했다. 김정은 부위원장은 ‘박운’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1998년 가을부터 스위스 국제학교를 몇 개월 다니다가 베른 인근의 공립학교로 옮겨 3여 년간 공부했다. 김정은이 실제로 다른 학생들과 함께 학교를 다닌 유일한 기간이다.
김정은 부위원장은 북한에서 정상적인 제도교육 과정을 밟은 적이 없다. 소학교(초등학교) 과정, 그리고 스위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에도 고려호텔 등 별도의 장소에서 개인 교사를 통해 중·고등학교 과정의 교육을 받았다. 김 부위원장은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이 역시 학교를 정식으로 다닌 게 아니라 ‘독선생’을 두고 개인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김 부위원장에게는 스승은 있어도 학교를 다니며 친분을 쌓은 친구, 동창생, 선후배가 없다.
북한 당국은 후계자 내정 이후 김정은 부위원장이 여러 외국어를 구사한다고 선전하는데, 단순히 우상화 차원만은 아니다. 스위스에서 공부한 만큼 영어와 독일어 등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정은은 스위스 유학 시절, 외부와 거의 담을 쌓고 생활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김정은을 비롯해 김정철·김여정의 유학 생활 중에 외부 문물을 차단하는 데 상당히 신경을 썼다고 한다. 김 위원장의 장남 김정남이 자유로운 유학 생활로 자본주의 생활양식에 ‘물들었다’고 판단한 탓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김정은의 스위스 유학 시절 주거지에 왕재산경음악단 여성 단원들을 상주시키는 등 평양의 관저와 똑같은 분위기를 만들어주며 이들과만 접촉하도록 했다. 김정은은 학교와 집을 오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외출을 거의 하지 못하게 했다. 간혹 외출할 때도 당시 리철 스위스 대사(리수용 합영투자위원장과 동일인)가 반드시 동행하도록 했다.
특히 고영희는 자신의 아들 중 하나를 김정일 위원장의 후계자로 만들려는 강한 집념에 따라 김정은 등 삼남매가 유학 기간 내내 자본주의 문물에 물들지 않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고영희는 자식들의 유학 기간에 가명 여권으로 스위스를 자주 오갔다. 이런 사정 때문에 김정은은 유학 시절 자본주의 문물에 대한 체화 정도가 낮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유학 기간에 자본주의 문물을 스폰지처럼 받아들인 김정남과 사뭇 달랐던 것이다.
자녀 ‘세력’ 형성을 우려한 아버지
김정은은 평양으로 귀환한 뒤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2002년 4월부터 2007년 4월까지 김일성군사종합대학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학교로 통학한 것은 아니다. 대신 이 대학의 교수들이 극비리에 소환돼, 노동당 조직지도부 부원으로 등록한 뒤 김정일 위원장의 관저에 드나들며 대학 교재로 교육했다. 개별 교육이다 보니 학과는 특설반이었고, ‘주체의 영군술’ 등 북한식 군사학을 극비리에 배웠다. 이 대학 교육은 고영희의 제안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김정은이 군사교육을 받기 시작한 시점은 김정일 위원장의 장남 김정남이 위조 여권으로 일본에 불법 입국하려다가 발각된 직후다. 이 사건으로 김정남이 김 위원장의 눈 밖에 나자 상황을 간파한 고영희가 재빠르게 정은·정철 두 형제에 대한 ‘선군교육’에 나섰다는 것이다. 고씨와 함께 지금은 고인이 된 김용순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와 현철해 당시 인민군 총정치국 조직담담 부총국장이 보조를 맞춰 김정일 위원장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리고 현철해 대장은 곧바로 총정치국 상무부국장으로 자리를 옮겨 정은 형제에 대한 군사교육을 전담했다.
그런데 김정일 위원장은 왜 자녀들에게 정상적인 제도교육을 시키지 않은 것일까. 속내를 알기는 어렵다. 다만 김정일 위원장으로선 ‘영명한 지도자’가 여러 여성과 동거해 생모가 다른 여러 자녀를 두고 있는 등 어지러운 사생활이 일반 인민들에게 노출되는 걸 우려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이와 함께 김정일 위원장 자신의 학창 시절 경험에 따른 다양한 교훈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 위원장은 초등학교를 일반인들과 함께 다녔고, 중·고등학교 과정은 차관급 이상 고위 자녀 전용 학교(남산고등중학교)를, 그리고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녔다. 북한의 정상적인 제도교육 과정을 밟은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어린 시절은 김일성 주석의 1인 지배 체제가 구축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북한이 오늘날 주장하는 것처럼 ‘절세 위인’으로 포장되지 못했다. 홍순호 등 남산고등중학교나 김일성종합대학 동창생들이 김정일 위원장의 학교 시절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을 떠들다가 정치범수용소로 보내지기도 했다.
또한 김정일 위원장으로서는 자녀들을 통해 ‘세력’이 형성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남산고등중학교는 김 위원장의 모교라기보다는 ‘정적’이던 이복동생 김평일(현 폴란드 대사)의 정치적 세력이 구축된 부정적 이미지가 더 강한 학교다. 이 때문에 김정일 위원장은 훗날 이 학교가 자신의 모교인데도 흔적도 없이 폭파해버리도록 지시했다. 이후로 고위 자녀 전용 학교를 영원히 없애버렸다.
북한 당국은 내부적으로 김정은이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했다고 선전해왔다. 김정일 위원장의 모교이자 북한 최초·최고의 대학이다. 북한 당국은 김정일 위원장이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한 배경에 대해, 1959년 옛 소련을 방문했을 때 대국의 위세를 뽐내며 자국에서 공부할 것을 권유하는 소련의 관계자에게 “우리나라에는 김일성종합대학이 있다. 나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하겠소”라고 대답했다고 선전해왔다. 김정일 위원장이 외국 유학이 아닌 김일성종합대학을 선택함으로써 ‘대국주의’와 ‘사대주의’에 보기 좋게 한 방을 날렸다는 우상화 사례다.
갑자기 젊은 후계자의 모교가 돼버린 김일성종합대학에 대한 김정일 위원장과 김정은 부위원장의 관심은 지대했다. 김 위원장은 2009년 김 부위원장을 대동하고 여러 차례 김일성종합대학을 방문했고, 수영장 등 최고급 시설을 갖추도록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북한 주민은 ‘장군님의 외아들’로 알아
사실 김 위원장은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후계 세습 문제에, 공식적으로는 거리를 둬왔다. 김정일 위원장은 평소 “세습을 하면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된다”며 주변 고위 간부들의 후계 내정 건의를 외면해왔다. 레임덕 우려도 있었고, 3대 세습을 하면 자신이 세습 덕분이 아니라 능력으로 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 선정됐다는 ‘정당성’까지 훼손될 수 있음을 우려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김 위원장은 1998년께 군부 측근들이 고영희와 손잡고 김정은 부위원장을 후계자로 내세우려는 사전 작업으로 고씨를 ‘평양 어머니’로 지칭한 강연을 군부대를 중심으로 진행한 사실을 뒤늦게 보고받고 불같이 화를 내며 중단시키기도 했다. 당시 ‘평양 어머니’ 관련 북한 내부 강연 자료가 남쪽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김 위원장은 그해 10월께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해 거동에는 큰 불편이 없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상당히 노쇠해 후계자 결정을 서둘렀다. 김정일 위원장과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김정은 쪽으로 후계 결정을 굳힌 것은 그해 11월이었고, 김정은은 이때부터 김정일 위원장의 현지 지도에 동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 위원장은 2009년 1월8일 김정은의 25번째 생일에 리제강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김정은을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했다고 통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 위원장의 ‘전화 교시’ 직후 리제강 제1부부장은 조직지도부 과장 이상급 긴급 모임을 열고 김 부위원장을 후계자로 낙점한 교시를 전달했다. 곧바로 각 도당에도 김정은 후계 체제 구축에 대한 조직적 지시가 하달됐다. 다만 도당에는 김정은의 이름과 나이 등 개인 신상에 대해 일체 함구한 채 “김 대장을 후계자로 추대했다”라고만 하달됐다. 김 위원장의 3남이라는 설명도 없이 그냥 ‘장군님의 아들’이라고만 밝혔을 뿐이다. 김 위원장의 아들이 마치 정은 한 명뿐인 것처럼 인식하도록 한 셈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북한 주민들은 김 위원장의 아들이 김정은 한 명뿐이라고 알고 있다고 한다.
김정일 위원장의 3남 후계 사실은 2009년 5월29일 2차 핵실험 직후 당·군·정에 공식 통보됐고, 모든 해외 공관에도 통보됐다. 북한 내부에서 김정은 부위원장의 후계자 선정을 공식화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해외 공관에 통지하면서도 대외적으로 보안을 유지하도록 지시했다. 후계자 내정을 북한 내부에서 공식화했어도 대외 공개는 나중에 하겠다는 뜻이다. 아울러 김정은의 생일이자 후계자 내정 한 돌이 되는 2010년 1월8일을 앞두고 2009년 12월25일 전당과 전군에 김정은의 생일을 ‘국가적 명절’로 지정하고 경축한다는 내부 지시를 일제히 내려보냈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DFE5CE"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EBF1D9"><tr><td class="news_text03" style="padding:10px"><font color="#C21A8D"><font size="3"> 김 위원장이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김 위원장은 그해 10월께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해 거동에는 큰 불편이 없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상당히 노쇠해 후계자 결정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김 위원장은 2009년 1월8일 김정은의 25번째 생일에 리제강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김정은을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했다고 통보한 것으로 전해진다.</font></font></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월드컵 본선 진출도 그분의 성과?
북한 당국은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정한 뒤 ‘청년대장’으로 찬양하며 우상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첫 찬양가로 을 만들어 주민들에게도 보급했다. 그런데 김정일 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가 됐을 때 첫 찬양가요와 김정은 부위원장에 대한 첫 찬양가요 노랫말이 사뭇 달랐다. 김 위원장에 대한 첫 찬양가요는 “따사로운 그 품이 그립습니다”로, 후계자로서 나름의 ‘업적’을 쌓은 김 위원장의 ‘품’이 그립다는 뜻이다. 반면 은 김정은의 일천한 정치적 경륜을 의식한 듯 후계자의 업적을 의미하는 내용 대신 김정은의 발걸음에 맞춰 김정일 위원장에게 충성하자는 게 주 내용이다.
김정은은 후계자 내정 이후 후계 시절의 ‘김정일 따라하기’에 나섰다. ‘축포야회’가 대표적인 예다. 이 행사는 김정은이 직접 기안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김정일 위원장의 생일인 2월16일 모처에서 불꽃놀이를 하도록 제안하고 직접 선보여 아버지를 감동시켰다고 한다. 김일성 주성의 97회 탄생 기념일에도 축포놀이를 벌였다. 아버지 김일성 주석에게 충성과 효도를 다하는 모습으로 후계자 입지를 구축한 김정일 위원장의 선례를 그대로 따라한 셈이다.
김정은은 후계자 내정 이전 중국과 대만을 자주 들락거렸다고 한다. 춘제(한국의 설) 때 대만 타이베이의 고층 빌딩에서 불꽃축제를 하는 것을 본 김정은은, “우리도 105층 류경호텔이 있지 않느냐. 거기에 매달고 대만처럼 하자”고 제안해 5월1일 류경호텔 축포놀이를 주도했다.
북한 당국은 후계 내정 이후 김정은의 ‘업적 쌓기’에 집중해왔다. 평양 도심의 만수대거리에 신주택단지 건설, 첨단과학으로 선전되는 ‘CNC’(컴퓨터수치제어), 44년 만에 축구대표팀의 월드컵 진출 등 후계자 내정 이후 북한과 관련된 모든 ‘좋은 일’을 김정은의 공으로 돌렸다. 정치 경력이 일천한 20대 후반의 김정은을 새 지도자로 내세우려면 주민들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명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김정일 위원장은 모든 현지 지도에 김정은을 동행시켜 주민들에게 얼굴 알리기에 나섰다. 김 위원장은 건강이 계속 좋지 않은 상황에서 44년 만에 당대표자회의를 열어 김정은 부위원장의 후계자 등극을 대내외에 공표했다. 그리고 종전까지 유명무실했던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를 부활시켜 김정은에게 ‘부위원장’이라는 직함을 부여하고 ‘대장’ 칭호까지 줬다.
김정일 위원장은 와병에 따른 권력 공백을 잠재우려 후계자를 내세워놓고도 여전히 레임덕 우려를 떨치지 못했다. 경험이 일천한 김정은에게 모든 권한을 넘기는 게 무리이기도 했을 터이다.
‘수습’에게 닥친 가혹한 운명
2011년 들어 김정일 위원장은, 후계자 김정은에게 ‘제한적 권한’만을 주던 기존 태도에서 벗어나 비로소 인민무력부 정찰총국,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의 업무를 관장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의 건강이 갈수록 나빠지자 정치적 기반이 허약한 김정은이 가장 빠르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이 3개 부처를 맡긴 셈이다. 이에 따라 김정일·김정은·장성택 3자가 이 3개 부처를 ‘공동 관리’하는 형국, 그러니까 김정일 위원장이 후계자 김정은에게 칼자루를 쥐어주고, 장성택과 함께 김정은의 칼자루 쓰는 방법을 ‘감독·지도’하기로 한 것이다.
김정은 부위원장은 그동안 ‘탈북 방지 조처’ 등 여러 사안에 대해 정책적 의견을 제시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수습’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아버지 김정일 위원장이 지난 12월17일 갑자기 사망했다. 20대 후반의 김정은 부위원장은 후계 수업을 받기 시작한 지 불과 3년 만에 ‘홀로서기’의 혹독한 운명을 헤쳐나가야 하는 처지가 됐다.
장용훈·최선영 기자
<font color="#A6CA37">*장용훈·최선영 기자는 2009년 1월 ‘김정은 후계자 내정’ 기사를 세계 최초로 보도해 2010년 한국기자상 대상, 2009년 관훈언론상·한국신문상·삼성언론상 등을 받았다.</font><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font color="#A48B00">김정은의 사람들은 누구인가</font>
<font color="#1153A4"><font size="5">장성택· 리영호는 협조할까 경쟁할까</font></font>
북한의 ‘새 영도자’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은 20대 후반이다. 나이가 어릴 뿐 아니라 후계 체제를 다져온 기간도 매우 짧다. 경험이 일천하다. 절대 권력자이던 아버지를 잃은 김정은의 ‘홀로서기’를 누가 도울지 관심이 쏠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김경희 부장은 알코올중독 증세가 심해 2004년 프랑스에서 치료를 받았고, 올해는 러시아에서 디스크 치료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건강 문제로 왕성한 활동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사람은 ‘2인자’ 장성택이다. 그의 ‘현실적 힘’은 매우 크다. 노동당을 장악한 데 이어, 2011년 6월에는 국방위 부위원장으로 최고정책결정기구에 자리를 잡았다. 2011년에는 나선경제무역지대·황금평·위화도경제지대 공동개발 및 공동관리를 위한 북-중 공동지도위원회 북쪽 위원장을 맡아 ‘금권’까지 거머쥐었다.
장성택이 김정은의 충직한 후원자가 될지 ‘경쟁자’가 될지는 두고 볼 문제다. 노회한 정치인인데다 노동당과 군부 핵심에[%%IMAGE4%%] ‘자기 사람들’을 심어놓은 만큼 그의 행보가 중요하다. 김정은을 상징적인 최고지도자로 앉히고 막후에서 섭정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성급한 전망이 나오는 까닭이다.
김정은 시대에 혈육인 김경희·장성택 부부만큼이나 중요한 세력이 군부다. 김정일 위원장이 ‘선군정치’라는 시스템을 만들어놓은 탓에 군심 잡기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군부 인물 중 선두주자는 리영호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겸 인민군 총참모장이다. 김 부위원장의 공개 활동 때 늘 바로 옆에 서는 최측근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후계 체제 구축을 고민하며 그를 핵심 요직에 앉혔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리영호의 위상은 김정일 위원장의 신임 덕이라기보다는 장성택의 ‘입김’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리영호는 장성택의 만경대혁명학원 동창이자 ‘오른팔’로 불릴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하지만 리영호가 장성택의 ‘분신’에 머물지, 김정은의 오른팔로 위상을 높이려 할지도 두고 볼 문제다. 장성택과 리영호의 ‘선택’이 중요한데, 김정은 체제의 안정 여부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공안기관에서는 우동측 국가안전보위부 제1부부장이 중요하다. 그는 김정은 부위원장의 후계자 내정 직후 후계 체제 구축에 앞장서서 국방위원 자리를 꿰찼다. 이 밖에 김영철 정찰총국장, 지난 4월 인민보안부장으로 임명된 리명수, 김정각 군 총정치국 1부국장, 김명국 총참모부 작전국장 등이 최근 2~3년 사이 ‘김정은 후계 체제’ 보위 임무를 띠고 급부상한 측근들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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