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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이 하면 로맨스, 박원순이 하면 불륜?

박원순 서울시장이 한-미 FTA 의견서 내놓자 정치 개입한다며 비난한 조·중·동…
이명박 대통령도 서울시장 시절에 수도 이전 의견 개진했고, 실제 정치와 행정 구분 어려워
등록 2011-11-16 06:11 수정 2020-05-02 19:26
박원순 서울시장(왼쪽)이 지난 11월8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앞서 이명박 대통령을 시장 취임 이후 처음으로 만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박원순 서울시장(왼쪽)이 지난 11월8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앞서 이명박 대통령을 시장 취임 이후 처음으로 만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서울시장의 권한은 어디까지일까. 또 시장의 정치는 어디까지 용납될 수 있을까.

박원순 서울시장이 보수언론들로부터 한동안 드잡이질을 당했다. 발단은 박 시장이 지난 11월7일 제출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의견서였다. 박 시장은 이 의견서에서 투자자-국가 소송제(ISD)의 전면적 재검토를 요구하며 FTA에 대한 사실상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보수언론들은 약속한 듯이 박 시장을 비난하고 나섰다.

박 시장은 주제넘게 나섰나?

는 11월8일 박 시장의 발언을 1면 머리기사로 소개했다. 6면까지 흐른 기사의 작은 제목은 ‘“박 시장, 행정과 정치 혼동하고 있다” 비판도’였다. 기사는 김형준 명지대 교수(정치학)의 말을 인용해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대권놀음이라고 비판했던 박 시장이 첫 시작부터 행정과 정치를 혼동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한 지자체 관계자의 입을 빌려 “시도 지사가 정치적 사안에 대해 시도 명의로 의견을 낸 경우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기사 내용대로라면 박 시장은 시장으로서의 정치적 균형을 잃은 위태로운 처지에 놓인 것으로 보였다.

는 다음날인 11월9일 사설을 통해 박 시장을 두들겼다. “서울시민의 삶이나 서울시의 행정과 관련된 조항에 한해서 의견을 내는 것이라면 몰라도 한-미 FTA에 반대하는 야권의 주장과 흐름을 같이하는 반대 의견을 내는 것은 지자체의 할 일이 아니다.” 사설은 이어 매우 ‘정치적인’ 분석을 내놓았다. “이번 의견 표명은 박 시장이 야권의 흐름을 따라가려는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것으로 분석된다. 그럴 바에야 박 시장은 민주노동당이나 민주당에 입당할 일이지, 무당파로 남아 있을 이유도 없을 것 같다.” 도 지난 11월8일 1면 기사에서 ‘반(反)FTA 박원순 옆엔 문재인·이해찬 있다’라며 박 시장 발언의 정치적 배경에 초점을 맞췄다.

궁금할 법하다. 서울시장의 업무 범위는 어디까지 미칠까. 새 시장은 정말 월권을 한 걸까. 행정안전부와 서울시에 두루 물었다. 서울시장의 역할을 딱 떨어지게 정리한 법 조항은 없었다. 인구 1050만 명 도시의 시장은 조직·행정 관리에서 산업진흥, 지역개발, 교육·체육·문화·예술 진흥, 지역 민방위와 소방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부문을 맡았다. 수많은 법령 속에서 서울시장의 역할은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서울시장이 ‘할 수 없는 것’을 보는 것도 시장의 권한을 보는 방법이다. ‘지방자치법’ 11조는 지방자치단체가 처리할 수 없는 국가사무 7개를 정해놓았다. 몇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는 ‘외교·국방·사법·국세 등 국가의 존립에 필요한 사무’다. 이 대목은 보수언론에서 박 시장을 비판하는 주요 근거가 됐다. 국가 간 조약인 외교관계에 대해 박 시장이 ‘주제넘게’ 나섰다는 것이 근거다.

다른 내용을 보면, 둘째는 물가정책 등 거시경제 정책, 셋째는 농산물 등의 수급정책에 관한 내용이었다. 넷째는 국가하천·국유림, 국토종합개발계획, 지정항만, 고속국도·일반국도, 국립공원 등 국토의 관리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내용을 찬찬히 보면, 국가와 지방의 업무가 생각처럼 명쾌하게 떨어지지 않는다.

강물처럼 뒤섞이는 정치와 행정

가장 쉬운 도로의 예를 보면, 중앙정부와 서울시청의 역할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도로법과 관련 규정을 보면, 고속국도와 일반국도는 국토해양부 산하 한국도로공사가 관리하지만, 이 도로들이 서울 땅으로 들어오면 관리 책임은 서울시로 넘어온다. 기준도 들쭉날쭉하다. 같은 고속도로라도 경기도 땅에서는 경기도청이 아니라 한국도로공사가 관리 책임을 지지만, 양재 나들목을 지난 다음의 서울 쪽 도로는 서울시가 책임진다.

하천의 경우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역할은 분명히 갈리지 않는다. 하천법과 관련 규정을 보면, 대략 유역면적 등 7가지 기준에 따라 전국 3883개 하천 가운데 61개를 국가하천으로, 나머지를 지방하천으로 나눈다. 이 가운데 국가하천은 국토해양부가, 나머지는 지방정부가 관리하고 있다. 서울만 보면, 한강·중랑천·안양천 3개 하천은 국가하천이고 나머지 33개는 지방하천이다. 한강으로 흐르며 뒤섞이는 물처럼 중앙과 지방의 권력은 이렇게 얽혔다. 안성호 대전대 교수(행정학)는 “국정과 시정은 완전히 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복잡하게 얽혀 영향을 주고받는다. 따라서 지방자치단체장은 중앙정부의 정책 결정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시장이 FTA가 지방에 끼칠 영향을 언급하는 것은 비판할 일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월권’도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안희정 충청남도 도지사와 김두관 경상남도 도지사는 4대강 사업에 대한 반대를 공약으로 내세우며 지난해 6월 당선됐다. 도청의 관리 대상도 아닌 국가하천을 대상으로 공약을 내세운 것 자체가 법만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넘은 셈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2004년 서울시장 시절에 중앙정부가 추진하던 행정수도 이전에 반발했다. 당시 노무현 정권이 추진하던 수도 이전은 지방자치법 11조에 제시된 대로, 중앙정부의 고유 권한인 ‘국토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이명박 시장은 ‘수도 이전은 반드시 재고돼야 한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 당시 이 시장은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수도 이전을 막고 싶다”고 말했다가 입길에 오르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지방단체장의 한 ‘모범’이었다.



이명박 대통령도 2004년 서울시장 시절에 중앙정부가 추진하던 행정수도 이전에 반발했다. 당시 노무현 정권이 추진하던 수도 이전은 지방자치법 11조에 제시된 대로, 중앙정부의 고유 권한인 ‘국토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어떤 정치’를 하느냐가 문제다

중앙행정과 지방행정의 역할을 구분하는 일만큼, 행정과 정치를 가르는 일도 쉽지 않다. 오세훈 전임 서울시장은 시장직을 내걸고 주민투표를 감행하며 극적인 정치적 도박을 했다. 과연 서울시장은 ‘타락한 정치’로부터 ‘순수한 행정’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진 것일까. 행정학자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박경돈 충북대 교수(행정학)는 “정치와 행정의 명확한 경계선은 없다. 행정이 정부기관의 관리 및 경영, 즉 인사·조직·재무와 관련된 것이지만, 정책의 영역을 포괄할 경우 정치성이 행정에 반드시 포함되게 된다”고 설명했다. 김명환 상지대 교수(행정학)의 설명은 명쾌하다. “시장더러 행정에만 집중하라고 할 거면, 대통령이 시장을 임명하면 된다. 뭐하러 수백억원을 들여 선거를 하나?” 자치단체장을 판단하는 기준은 정치를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떤 정치’를 하느냐라는 뜻이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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