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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도 가지 못할 닭짓

레임덕 막으려 이명박식 코드 인사 내세워 고색창연 ‘공안몰이’…대북인식 바뀐 국민여론 냉담하고 보수언론조차 역풍 우려해
등록 2011-08-25 07:49 수정 2020-05-02 19:26

여주인공 한예슬의 촬영 거부와 출국, 복귀로 입길에 오르고 있는 한국방송 드라마 은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 이야기다. 한류 스타 강우를 북한에 귀순시키려고 내려온 간첩 한명월이, 목적과 달리 강우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다. 드라마엔 한명월을 돕는 북한 특수공작원 최류와, 수십 년간 남한에서 고정간첩 생활을 해온 이들도 나온다.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방점이 찍히는 대목은 로맨스일 수도, 코미디일 수도 있다. 만약 ‘체제 수호자’ 관점에서 본다면 이 드라마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뒤집어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명월과 최류는 예쁘고 잘생겨서 ‘찬양·고무’하게 만들고, 고정간첩들은 위협적이기는커녕 허술하고 친근해서 ‘회합·통신’하고 싶게 만들기 때문이다.

» 이명박 대통령은 한상대 검찰총장 임명을 통해 '레임덕' 방지 효과를 노렸다는 비판을 듣는다. 지난 5월19일 서울 관악구 서울산업정보학교에서 열린 국민경제대책회의에서 이 대통령이 메모지를 보고 있다. 한겨레 김봉규

» 이명박 대통령은 한상대 검찰총장 임명을 통해 '레임덕' 방지 효과를 노렸다는 비판을 듣는다. 지난 5월19일 서울 관악구 서울산업정보학교에서 열린 국민경제대책회의에서 이 대통령이 메모지를 보고 있다. 한겨레 김봉규

종북좌파 금기를 깬 검찰총장

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론’은 억지 같은 가정일까? ‘그렇다’고 100% 장담하긴 어려울 듯하다. “검찰은 ‘체제 수호자’다. 북한을 추종하며 찬양하고 이롭게 하는 집단을 방치하는 것은 검찰의 직무유기다. 종북좌익 세력을 뿌리 뽑아야 한다. 종북좌익 세력과의 전쟁을 선포하겠다.” 한상대 신임 검찰총장이 8월12일 취임식에서 결기를 세우며 한 얘기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 드라마 관계자들은 즉시 수사를 받아야 한다.

‘종북좌익’은 어감상 ‘친북좌파’보다 강도가 더 세다. 귀에 익숙한 친북좌파만 해도 국정을 책임진, 혹은 책임지겠다는 이들이 누군가를 겨냥해 적대감을 실은 채 공개 석상에서 입에 올린 적이 거의 없었다. 눈에 띄는 예외는 4년 전에 있었다.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였던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선거 후보다.

그는 2007년 7월29일 알렉산더 버시바우 당시 주한 미국대사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이번 선거(17대 대선)는 친북좌파 세력과 보수우파 세력의 대결이다.” 대통합민주신당 쪽을 친북좌파로 낙인찍고, 자신은 보수우파의 대표주자라고 설명한 것이다. 이념적으로는 ‘무색’, 심지어는 ‘진보’로까지 인식되던 그였기에, 이런 과격한 발언은 정치권 안팎에서 큰 논란을 빚었다. 한나라당 쪽은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 “대선 구도를 설명하다 보니 나온 말”이라며 진화에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남북 화해협력 노선을 친북좌파로 단정함으로써 시대착오적인 색깔 논쟁을 불러일으키자는 것”(이낙연 당시 대통합민주신당 대변인)이라는 비판은 피할 수 없었다. 이후 이명박 대통령이나 현 정부의 고위 인사들은 친북좌파 발언을 공개적으로 내뱉은 적이 거의 없었다. 2008년 쇠고기 촛불 정국 이후 정부가 ‘배후세력’을 쥐 잡듯 닦달하면서도 이 단어는 일종의 금기어였다. 그런데 사정기관 수장이 이를 깨트린 것이다.

야당은 날을 세웠다. 이용섭 민주당 대변인은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 색깔론”이라며 “실정과 레임덕을 공안통치로 무마하려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신창현 민주노동당 부대변인은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공안 정국을 조성해 검찰을 정권 재창출의 돌격대로 만들어 야당을 탄압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담겨 있다”고 비판했다.

정권 차원 ‘공안 봇물 터뜨리기’

한 총장의 발언을 이렇게 받아들이는 건, 무엇보다도 임기 말 보수 정권이 레임덕을 막아보려고 반복적으로 선택한 ‘클리셰’가 바로 공안몰이였기 때문이다. 정권 말기가 되면 검찰 등 사정기관을 동원해 갖가지 조직·간첩 사건을 터트려 당장이라도 전쟁이 날 것처럼 안보 불안감을 조성해 정권 비판 세력을 탄압해온 것이다. 각계 인사들이 북한 노동당 225국의 지령을 받아 남한에 왕재산이라는 지하당을 구축했다는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왕재산 사건’, 노동조합 불법 후원금 모금 혐의로 민주노동당·진보신당 기소 등 최근 서울중앙지검의 공안 사건이 모두 한 총장의 지휘 아래 수사를 시작했다는 점도 야당으로선 심상찮은 징후다. 게다가 한 총장은 병역면제, 위장전입, 다운계약서 작성 등 각종 의혹 때문에 국회에서 인사청문보고서도 채택되지 못했지만 임명됐을 정도로 ‘이명박식 코드 인사’의 전형이다. 한 총장의 발언이 단순한 ‘개인 소신’이 아니라 정권 차원의 ‘공안 봇물 터트리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접근이 과거만큼 효과를 거두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일반적이다. 조현연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교수는 “‘공안 모드’가 통하려면 남북관계·대북인식이 중요한데, 이 정부는 시대 조류를 잘못 읽었다.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지지층을 결집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자신들이 원하는 레임덕 방지 효과는 거두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차 8월15일치 사설에서 “종북세력 수사는 자칫 ‘공안통치’ 논란을 불러올 수도 있다. 검찰이 무리하다 책을 잡히면 안 하는 것보다 못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공안몰이의 효과와 관련된 대북 인식은 민주정부 10년을 거치며 크게 달라졌다. 지난해 11월27일 동아시아연구원·한국리서치가 한 조사 결과를 보면, 연평도 사건의 발발 배경으로 ‘현 정부의 대북강경책’을 꼽은 이가 절반이 넘는 51.3%였다. 국방대학교 안보문제연구소의 2010년 국민안보의식조사에선 북한을 ‘우리가 힘을 합쳐 협력해야 할 대상’(35.5%)이라고 생각하는 이와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적대적 대상’(42.7%)이라고 생각하는 이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다. 같은 조사에서 한반도 안보 위협을 줄이는 방안으로는 ‘북한과의 교류 확대’가 33.%로 가장 많이 꼽혔다. ‘한국의 군사력 증강’(29.9%)은 그다음이었다. 이런 결과는 과거처럼 냉전적 사고가 맹위를 떨치지 못함을 보여준다.

“국민의 지지로 레임덕 늦춰라”

‘공안의 핵’인 국가보안법의 실효성도 의문스럽다. 인터넷 매체 의 8월11일치 보도를 보면, 지난해 검찰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입건한 건수는 2008년보다 두 배 늘어난 94건이지만, 기소된 건은 43건으로 45.7%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20건에 불과하고, 이 가운데 13건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검찰이 그만큼 국가보안법을 마구 들이댔다는 얘기다.

합리적인 보수 인사로 평가받는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과거 경험에 비춰보면 공안몰이는 다 헛일”이라며 “레임덕은 생로병사처럼 자연적인 현상이다. 정권 말기 힘이 빠지면 어떤 식으로든 그 힘을 회복하려 하지만 작위적으로 노력해도 안 된다”고 말했다. 윤 전 장관은 “지금은 ‘종북좌익과의 전쟁’을 벌인다고 해도 불필요한 오해만 부를 뿐 사회가 얼어붙지 않는다”며 “레임덕을 늦추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국민의 지지를 얻는 것뿐”이라고 덧붙였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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