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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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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성으로부터의 탈퇴

애국으로 포장된 남성성과 불화하는 병역거부자들… 성별분업 극복한 여성 리더십이 탈군사주의 문화 이끌어
등록 2011-05-25 08:52 수정 2020-05-02 19:26

2006년 6월 말이었다. 한 국제학회에서 민주주의와 남성화된 정치에 관한 논문 발표를 부탁받고,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만나면 소잿거리가 있을 것 같아 서울 서대문에 있는 사무실로 찾아갔다. 병역거부가 큰 사회적 이슈가 되고 오태양씨의 최초 선언이 있던 2001년에는 미국에 있어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동시대적 기억이 없는 상태였다. 어떤 사람들일까에 대한 사전 인상도 지식도 없었다. 두 평도 안 돼 보이는 조그마한 사무실에 앉을 자리도 변변치 않아 쪼그려 둘러앉았다. 예비자를 포함한 양심적 병역거부자 4명과 활동가 2명이 동석했다.
다들 편안하고 차분하게 늘 하던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내용의 신선함에 귀를 쫑긋대고 있었다. 기대했던 양심적 병역거부나 대체복무 등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 남성성, 여성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내가 꺼낸 화두가 아니었다).


» 지난 5월15일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 행사에 참여한 병역거부자 이준규, 이정식, 이용석, 이길준, 임재성(왼쪽부터)씨가 수감 중인 병역거부자를 알리는 피켓을 들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 지난 5월15일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 행사에 참여한 병역거부자 이준규, 이정식, 이용석, 이길준, 임재성(왼쪽부터)씨가 수감 중인 병역거부자를 알리는 피켓을 들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남성성을 죽이려고 노력했어요”

A: “남성성이 사라지는 것이 두렵다기보다는 남성성이 발현되는 것이 두렵죠. 병역거부를 하기 전에 여성주의를 알았다기보다는 학생운동을 먼저 했고, 병역거부를 하면서 평화운동에 관심도 가지게 되고 여성주의에 눈뜨게 됐어요.”

B: “폭력성을 꺼려했어요. 부모님이 비폭력적으로 키우셨고 이타주의적이려고 했어요. 은행에서 상담원으로 아르바이트하는데 술 먹고 욕하면서 전화하는 사람들이 있죠. 분노가 쌓이면 전화 끊고 나서 욕을 할 때도 있어요. 군대를 간다면 그런 게 두려웠어요. 분노가 쌓여서 내가 변하는 게. 고등학교 입학 뒤 내 안의 남성성을 죽이고 여성성을 살려나가려고 노력했어요.”

C: “남성적이었죠. 부모님과의 관계도 그렇고 시위 현장에서도 그렇고 대화 스타일도 남성적이고. 예를 들어 수배 생활도 하고 해서 양심적 병역거부 하기 전 6년 만에 부모님을 만나러 갔는데 누나와 여동생이 왜 그것을 하려느냐고 물으면 공격적으로 관심도 없으면서 그런 질문 하지 말라고 했죠.”

왜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에 참가하면서 남성성과 여성주의를 이야기할까? 궁금증을 풀려고 몇 명과 더 면접도 하고 문건도 읽었다. 여성 활동가 최정민은 병역거부자들은 단순히 민족적 반역자만이 아니라 비겁한 남성으로 비난받아왔다고 설명했다. 병역거부를 연구한 강인화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병역법 위반’으로 수감 중이던 ‘사례 H’는 본드를 불다 ‘유해화학’으로 감옥에 들어온 같은 방 수감자에게 ‘애국심 없는’ 하잖은 존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애국심은 사회적 범죄의 파렴치한 정도를 판가름하는 잣대가 되며, 남성으로서 애국심을 입증하는 방식은 군복무에 성실하게 임하는 것이다.”

기존 사회운동과 다른 출발점

그러나 거부자들에게 남성성은 비판받기에 문제가 되는 것만은 아니다. 두 가지 모습이 두드러졌다. 개인주의적 성향과 여성성이 강하거나 성정체성이 달랐던 거부자는 군대가 요구하는 남성성에 근본적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고, 병역거부를 선택하는 주요한 이유로 제시하기도 했다. 학생운동을 한 이들은 병역거부운동에 참여한 이후 자신의 가치관과 남성성을 재점검하는 기회를 가졌다. 학생운동을 하며 채득하거나 당연시했던 집단주의적·폭력적·남성중심적·가부장적·영웅적 기질이나 역할은 군대가 원하는 남성성과 거의 일치한다. 또한 개인의 다양성을 혐오하는 집단의식과 강하게 연결돼 있고 패권적 군사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평범한 남자다움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는 존재로서의 의미가 얼마나 깊게 배어 있는지도 확인했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남성성을 극복하지 않는 한 감옥을 다녀온 뒤 사회적 소수자로 살아가야 하는 새 정체성을 소화하기 힘들었다. 한 거부자에게는 이 과정의 해방적 의미가 두드러졌다. 병역거부운동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남성성을 깊이 고민하고 가족과의 소통이 달라졌다고 다른 만남에서 이야기하기도 했다.

거부자들의 남성성에 대한 치열한 고민은 평화운동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 남성에게 훨씬 더 복잡한 과정임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된다. 군대를 사실적으로 다룬 첫 영화라는 평을 들은 (2005)를 만든 윤종빈 감독은 인터뷰에서 “군대의 진실을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수많은 남성 지식인들이 군대를 다녀왔지만 누구도 그것을 분석하거나 표현하지 않았다는 것,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지적대로 그렇게 학생운동이 활발했는데도 2001년까지 정치적 병역거부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군대와 관련한 남성의 상상력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억압돼 있으며 비판적 의식 밖에 머물러 있는지를 보여준다. 국가가 규정하는 역할과 틀에 도전한다는 것이 남성에게는 자신의 본질적 변화, 정체성에 대한 재규정까지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실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은 탄생부터 많이 달랐다. 그동안 이슈로 떠오르지 못했던 사회적 소수자인 종교를 이유로 한 병역거부자들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출발했고, 오태양은 소수자들에 대한 연대감, 반전, 평화, 채식주의 등을 표방했다. 2000년 초는 학생운동 등 사회운동의 민족주의적·집단주의적·가부장적 패러다임에 대한 변화 요구가 본격화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병역거부운동의 참여자들은 운동을 하면서 탈권위적이고 개인의 정서적 욕망과 다양성이 살아 있으며 나이나 성에 의한 서열의식도 벗어나려 노력했다. 감옥에 간 병역거부자 뒷바라지를 위한 모임을 여자친구가 주도적으로 이끄는 것도 경계했다. 기존의 운동권적 남녀 성역할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탈군사주의 열쇠가 담겼다

여성 리더십의 영향도 컸다.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에서 최정민은 특별한 존재다. 1990년대 학생운동을 거친 뒤 운동권 내 가부장성이나 성폭력을 문제 삼았던 ‘여성100인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2000년 서울의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서 외국인 참가자한테서 병역거부운동에 대해 들으면서 운동에 관심을 가졌고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다. 지난해 영국 유학을 가기 전까지 운동의 리더로서 흔들림 없이 활동해왔다. 지금은 여성 활동가 여옥이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병역거부자들은 감옥 가기 전 상당한 심리적 혼란을 경험하고 나온 뒤에도 관심과 역할 등에서 정체성의 갈등을 겪는다. 감옥에 가지 않은 여성 활동가들은 리더십의 유지가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그러나 남자들만이 주인공일 것 같은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을 여성 리더들이 이끌고 있다는 것은 더 큰 의미를 부여할 만하다. 군대와 군사주의가 남성만의 이슈가 아니라는 것, 탈군사주의를 위해 여성의 지도력이 얼마나 날카롭고 의미 있게 자리잡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10년의 역사에서 대중적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고 병역거부자 수가 얼마나 늘었는지는 병역거부운동을 평가하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거부자들의 고민과 갈등, 노력, 여성 활동가들의 두드러진 지도력, 이 모든 것도 그만큼 중요하다. 새로운 사회운동의 대안적 모습뿐만 아니라 탈군사주의의 열쇠가 이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권인숙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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