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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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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6천 ‘백종건들’의 잔인한 70여년

1939년 ‘등대사’ 사건으로 시작된 여호와의 증인의 양심적 병역거부…아버지에 이어 수감 위기에 놓인 백종건 변호사 같은 병역거부자 1만6천여 명
등록 2011-05-25 08:20 수정 2020-05-02 19:26
» 백종건 변호사는

» 백종건 변호사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은 군복무보다 더 길고 힘든 대체복무를 기꺼이 할 의향이 있다"며 "국방부의 태도 변화가 아쉽다"고 말했다. 한겨레21 정용일

백승우(52)씨는 1988년 대구교도소 면회실에서 4살 아들을 만났다. 아직 어린 아들에게 자신이 왜 감옥에 갇혔는지 설명하기 어려웠다. ‘마태오복음’ 26장을 이해하기에 아들은 아직 어렸다. 을 보면, 예수는 제자들과 있다 가롯 유다와 함께 찾아온 대사제들에게 붙잡혀간다. 대사제의 종은 칼과 몽둥이로 무장했다. 베드로가 예수를 방어하려 나섰다. 칼을 들어 대사제의 종의 귀를 잘랐다. 예수는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가톨릭 성경)고 말하며 베드로를 말렸다. 백씨와 같은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은 이런 예수의 설교를 ‘무기를 들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해 군사훈련을 거부한다. 의대생 백씨도 집총을 거부했다. 인턴, 레지던트를 거쳐 안과전문의 자격증을 땄다. 8주의 군사훈련만 받으면 공중보건의로 군복무를 할 수 있었다. 백씨는 군사훈련을 거부했고 1988년 항명죄로 실형을 선고받아 1990년 초 만기 출소했다. 20여 년이 지난 2011년 이번엔 여호와의 증인인 아들 백종건(27) 변호사가 똑같은 혐의로 법정에 섰다.

2004년 합헌 결정 이후 수감자 3674명

여호와의 증인은 19세기 말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시작됐다.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만 인정한다. 세속권력의 군복무를 따르지 않는다. 선거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납세의 의무는 충실히 이행한다. 100여 년 역사에서 수많은 ‘백종건’이 감옥에 갔다.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은 1·2차 세계대전 때도 전쟁에 반대해 감옥에 갔다. 나치 독일의 핍박이 가장 참혹했다. 나치당은 여호와의 증인 자체를 법률로 금지했다. 유대인과 함께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독일에서 종전 때까지 2500~5천여 명의 신자가 감옥에서 숨졌다. 200여 명의 젊은 남자 신자가 군복무를 거부한 죄로 사형당했다.

한국에서도 같은 역사가 반복됐다. 제국주의는 무력으로 시장을 개척하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로 정의된다. 제국주의 일본에 군대를 거부하는 것은 중죄였다. 1939년 일제는 일본, 대만에 이어 조선에서도 여호와의 증인 신자 38명 전원을 체포했다. 5명은 감옥에서 숨졌고, 33명은 1945년 해방 뒤에야 감옥에서 풀려났다. 일제강점기에 여호와의 증인이 탄압받은 것을 ‘등대사(燈臺社) 사건’으로 부른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에는 일제강점기에 투옥된 독립운동가들의 신상기록카드가 채록돼 있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된 여호와의 증인 신상기록카드도 포함됐다. 백종건 변호사는 지난 5월18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다시 등대사 사건을 언급했다. “한국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가 이슈가 된 역사는 최근 10년이지만 (여호와의 증인의 병역거부는) 20세기에 계속돼온 역사입니다. 한국에서도 등대사 사건이 있었고요.”

» 일제 때 병역을 거부해 수감된 여호와의 증인 신자의 수형 기록.

» 일제 때 병역을 거부해 수감된 여호와의 증인 신자의 수형 기록.

병역거부와 처벌은 해방 이후에도 반복됐다. 2009년 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한국 군대가 1970~80년대에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에게 가한 폭력의 역사를 밝혔다. 많은 젊은 신자가 가혹행위로 숨졌다. 지난해 12월 대법원은 집단 구타당해 숨진 여호와의 증인 가족에게 국가가 배상하라는 첫 판결을 내렸다. 이처럼 해방 이후 병역거부로 수감된 여호와의 증인 신자는 1만6천여 명이다. 지난 3월 기준으로 지금도 전국에 819명의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수감 중이며 대다수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다. 2004년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각각 병역법 합헌 결정과 법 위반자 유죄판결을 한 뒤 2005년부터 지난해 7월 말까지 징역형을 살거나 재판 중인 병역거부자는 3674명에 이른다.

신념의 대가를 치를지라도

한국 사회는 이들에게 감옥 바깥에서도 신념의 대가를 요구했다. 어떤 신자는 의사면허가 취소됐다. 기업 면접에서 떨어지는 일이 잦다. 백종건 변호사도 병역법 위반 확정판결을 받으면 5년간 변호사 업무를 할 수 없다. 백종건 변호사는 “유죄판결 뒤 대부분의 국가고시를 오랫동안 칠 수 없는데 감정평가사 시험은 2년이면 응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평사를 택한 여호와의 증인 신자가 꽤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항소나 상고도 포기한다. “사회생활을 위해 얼른 구속돼서 얼른 살고 나오자는 거죠.”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 병역거부와 관련해 사회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2001년부터다. 변화가 있었다. 병역거부자를 구속해 군사재판에 넘기던 관행은 불구속 수사와 민간재판으로 바뀌었고, 법정 최고형(3년)을 선고하던 형량도 병역이 면제되는 최소 형량(1년6개월)으로 줄었다. 2002년부터는 병역 및 예비군훈련 거부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한 병역법 88조와 향토예비군설치법 15조를 두고 일선 법원과 개인들에게서 위헌법률심판 제청과 헌법소원이 잇달아 제기됐다.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는 2006년과 2010년에 이어 올해도 “한국 정부가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18조 1항을 위반했다”며 보상과 구제 조처를 권고했다.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대체복무제 도입을 권고했고, 2007년 9월 국방부는 종교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 허용 방안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여호와의 증인 등 병역거부자들은 군복무보다 길고 힘든 대체복무라도 흔쾌히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 양심적 병역거부 10년 '결정적 장면'

» 양심적 병역거부 10년 '결정적 장면'

문제가 풀리는 듯했지만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년부터 정부가 태도를 뒤집었다. 국방부는 2008년 대체복무제도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같은 해 12월 여론조사 결과를 근거로 “대체복무 도입은 시기상조”라고 밝혔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해결하라는 유엔과 국제사면위원회의 권고와 조언도 이명박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 이제 기대하는 곳은 헌법재판소뿐이다. 헌재는 현재 병역법과 향토예비군설치법을 놓고 전국의 법원과 개인이 청구한 위헌법률심판 사건과 헌법소원 사건을 병합해 각각 1건씩 심리하고 있다. 헌재는 지난해 11월 이 2건에 대한 공개변론을 진행했다.

교도소 면회실에서 자리가 맞바뀐 부자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 일제 때 병역을 거부한 것은 독립운동사의 자랑스런 한 장을 차지하는데, 지금은 정부가 계속 감옥에 보내고 저희 집처럼 대를 이어 감옥에 갑니다. 이런 현실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재판부에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신청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헌재에서 이 문제를 결론지어주시기를 희망합니다.” 백종건 변호사의 병역법 위반 혐의 공판 선고는 6월2일 내려진다. 새로운 헌재 결정이 없다면 전처럼 유죄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백종건 변호사는 항소·상고 계획을 이미 잡아놨다. 지난 4월엔 부산지방병무청장을 상대로 “병무청장이 병역법에 주어진 재량권 행사를 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여호와의 증인 신자에게 군사훈련을 강요한다”며 행정소송도 제기했다. 재판이 진행되는 기간엔 지금처럼 무료 변론 활동을 이어갈 뜻도 밝혔다.

백종건 변호사는 1988년 교도소 창살 너머로 봤던 아버지를 아직 기억한다. 20여 년이 지나 아버지와 아들이 교도소 면회실에서 자리를 바꿔앉는 현실이 슬프다는 게 백종건 변호사의 변론 취지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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