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하다. 스토리도 간단찮다. 성공과 좌절이 교차하는 변곡점마다 사람들이 모이고 돌아서고 흩어졌다. ‘친노 지도’ 그리기가 녹록찮은 이유다. 그 어려움은 노무현이란 인격의 독특함에서 비롯한다. 그는 위기의 순간에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드문 능력의 소유자였다. 반칙과 꼼수를 용납 않고, 옳은 길이라면 유불리를 셈하지 않고 몸을 던지는 원칙주의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복싱 스타일로 치면 불문곡직 파고들어 펀치를 날리는 우직한 인파이터였다. 카운터펀치를 허용하는 경우도 그만큼 잦았다.
부산팀, 비서팀, 노사모
친노의 발원지는 변호사 노무현이 활동하던 1980년대 초 부산이다. 30대의 조세 전문 변호사가 우연히 부산대 학생들이 연루된 시국사건 변론을 맡으며 정치와 사회에 눈을 떴다. 타고난 정의감과 반골 기질은 그를 지역 재야운동의 최전선에 서게 했다. 평생 동지 문재인과 이호철을 만난 것도 이즈음이다. 이른바 ‘부산팀’의 시작이다. 부산팀은 총선(1988년, 1992년)과 부산시장 선거(1995년)를 거치며 몇 차례 수혈이 이뤄졌다. ‘부산대 총학생회장 3인방’ 정윤재·최인호·송인배가 그런 경우다.
비서팀은 1988년 국회의원 당선(13대 총선)과 함께 형성됐다. 1기 비서팀은 부산팀의 이호철과 연세대 운동권 출신 이광재가 중심이다. 14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비서팀은 1993년 설립한 지방자치실무연구소로 옮아가는데, 이 시절 합류한 2기 비서팀이 안희정·서갑원이다. 1998년 종로 보궐선거를 전후해 충원된 3기 비서팀에는 백원우·여택수·문용욱 등이 있다. 연구소는 2001년 민주당 대선경선 캠프로 전환된다. ‘금강팀’으로 불리는 이곳에서 염동연·이강철이 당내 조직을 총괄했고, 유시민·정태인·유종일이 정책을 담당했다.
2000년 총선 낙선 뒤 결성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은 부산팀, 비서팀과 함께 친노의 ‘3대 뿌리’로 꼽힌다. 문성근과 명계남, ‘미키루크’란 필명으로 알려진 이상호가 핵심이었다.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헌신적 활동으로 대선 승리의 1등 공신이 되지만, 대통령 당선 뒤엔 첨예한 노선 대립에 휘말리며 친노 분화의 진앙지가 된다. 열린우리당 시절 당권을 두고 대립한 참여정치연구회(참정연)와 국민참여연대(국참연) 모두 뿌리가 노사모였다. 참정연은 노사모에서 갈라져나온 개혁당 출신의 유시민·유기홍과 자치분권연대의 김두관 등이 주축이었고, 국참연의 핵심은 정당 민주화를 내걸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한 명계남·이상호 등 노사모 활동가들이었다.
2002년 대통령 당선과 함께 청와대와 행정부가 친노의 새로운 인력풀로 등장했다. 금강팀의 운동권 참모진과 학연으로 얽힌 386세력, PK(부산·경남)와 호남 출신 관료, 정부 위원회에 몸담은 개혁 성향 학자들이 대거 친노 그룹에 가세했다. 관료 출신의 이용섭·김진표·송민순, 학자 출신의 김용익·이정우·성경륭·김수현, 기자 출신의 이병완·윤승용·이백만 등이 대표적이다.
2004년 이후 사분오열친노가 걸어온 30년 궤적에는 두 개의 변곡점이 있다. 노무현이 부산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한 2000년과 ‘친노 정당’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한 2004년이다. 2000~2004년은 구심력이 지배한 시기였다.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인 노사모가 결성됐고, 대선 후보 광주 경선(2002년 3월) 승리를 계기로 그의 캠프에는 유능한 전문가와 정치인이 속속 결합했다.
친노가 명실상부한 다수당의 주류로 등극한 2004년 총선은 구심력이 최대치에 이른 순간이자 분화와 분열의 원심력이 작동하는 시작점이기도 했다. 청와대·행정부에 이어 입법부까지 장악하게 되자 잠복해 있던 권력투쟁이 표면화했다. 참정연과 국참연이 당권을 두고 격돌했고, 대통령 지지도가 눈에 띄게 하락한 2006년부터는 대권을 노리는 차기 주자들의 차별화도 노골화됐다. 정동영계가 독자적 행보에 나섰고, 천정배계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로 대통령과 각을 세웠다.
대북송금 특검 수용(2003년 3월)과 이라크 파병 결정(2003년 11월)으로 동요하던 지지층 역시 대연정 제안(2005년 7월), 한-미 FTA 추진 선언(2006년 2월)을 거치며 분열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호남이 들끓었고, 우군이던 시민사회가 등을 돌렸다. 친노는 한나라당과 보수 언론뿐 아니라 당내 반대파, 진보세력으로부터 협공을 받는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대선과 총선이 다가오자 친노에서 ‘비노’로 돌아선 의원들의 탈당 러시가 이어졌다. 대권과 배지가 절실한 그들에게 노무현은 한시라도 빨리 내려놓아야 할 ‘짐’이었다. ‘100년 정당’을 꿈꾸던 열린우리당은 그해 8월 탈당파들이 만든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하며 간판을 내렸다. 친노 세력은 10월 대선 후보 경선에 이해찬을 단일후보로 내세웠지만 ‘한때의 친노’이던 정동영에 참패했다.
구심이 사라진 친노는 사분오열했다. 이해찬은 탈당해 시민단체 ‘시민주권’을 만들었고, 부산팀과 청와대 참모그룹, 학자그룹의 다수는 정치권을 떠나 미래발전연구원, 노무현재단, 봉하재단 등으로 흩어졌다. 참여정부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내걸고 당 외곽에 참여정부평가포럼을 결성했던 이병완과 이백만, 천호선, 이재정 등은 탈당한 유시민과 함께 국민참여당을 창당한다. 영남과 수도권에 기반을 두면서, 2002년 대선을 전후해 합류한 후발 친노그룹이 중심이었다. 반면에 안희정·이광재 등 측근 비서그룹과 김원기·한명숙·이강철 등 원로그룹, 관료 출신과 청와대 386그룹의 다수는 민주당(당시 대통합민주신당)에 남았다. “제3당은 안 된다”는 노무현의 만류 때문이었다.
친노, 운명의 시간이 온다
민주당에 잔류한 친노 세력은 노무현 서거 1년 뒤 치러진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광역·기초 단체장에 대거 당선되며 상황을 반전시켰다. ‘폐족의 부활’이었다. 반면에 참여당은 야권 단일후보로 나선 지난해 경기지사 선거와 올해 4·27 김해을 보궐선거에서 잇따라 패배함으로써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었다. 무엇보다 김해을 패배가 뼈아팠다. 노무현의 고향에서 치러진 선거였다는 점에서 패배는 친노 진영 전체의 몫으로 남았다.
지금의 분열 구도가 오래갈 것이란 관측은 많지 않다. 총선과 대선이 다가올수록 민주당과 참여당의 통합 압력이 거세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민사회 친노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다. 부산 경남권을 중심으로 참여당에 대한 비판론과 함께 민주당과의 공동 행보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문재인 역할론이 힘을 얻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운명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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