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되는 일이다.”
영문 월간지 로버트 쾰러(36) 편집장은 최근 한국 대학에서 늘어나고 있는 영어 수업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그는 1997년 한국에서 영어 강사를 시작한 뒤 줄곧 한국에서 생활해왔다. 쾰러 편집장은 “글로벌 경쟁력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영어를 잘하는 것보다 전공을 제대로 배우고 연구를 잘하는 것이 오히려 경쟁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일제시대도 아닌데 필요한 지식을 배우는데 왜 외국어로 수업을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60% 영어수업 반대, 23% 사교육 경험
4명의 카이스트 학생이 자살한 이후 그 원인 가운데 하나로 ‘영어 수업’이 거론되고 있다. 지난 4월13일 카이스트 본관에서 열린 비상학생총회에서도 영어 수업은 도마 위에 올랐다. 학생들은 이날 총회에서 ‘차등수업료 전면 폐지’와 함께 ‘전면 영어 강의 방침 개정’이라는 안건을 가결했다. 그만큼 글로벌 경쟁력이라는 미명 아래 진행된 영어 수업의 필요성에 대해 학생들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카이스트 최광무 교수(전산학)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 비해 공학은 영어 수업이 더 수월한 편”이라면서도 “현재의 영어 수업은 수학 시간에 영어를 공부하는 형편이어서 전공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지도 못하고 영어 실력을 제대로 키워주지도 못한다”고 비판했다. 또 “수업 시간에 한글로 어려운 용어를 설명하는 것이 교육적인 효과가 더 크다”며 “영어를 가르치려면 제대로 된 수업을 따로 마련해서 하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카이스트의 영어 수업 비중은 2010년 기준 91%다. 다른 대학들도 2005년부터 속속 영어 수업을 도입하며 카이스트를 뒤따르고 있다. 하지만 충분한 고민 없이 도입한 제도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이 취업포털 인크루트와 함께 337명의 대학생에게 영어 수업에 대한 의견을 물은 결과, 59.6%가 ‘교양 수업 외에 영어 수업이 필요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10명 가운데 6명가량이 영어 수업에 반대하는 것이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64.4%)이 교양 수업 외에도 영어 수업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수업 이해도는 떨어졌다. 가장 많은 34.1%가 ‘절반만 이해했다’고 밝혔다. 여기에 ‘절반도 채 이해 안 됨’(24.4%)과 ‘거의 이해 안 됨’(4.1%) 등을 포함하면 10명 가운데 6명 이상이 영어 수업의 이해도가 절반을 넘지 못했다. 이는 수업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만족도를 묻자 ‘그저 그렇다’(26.3%), ‘다소 불만’(15.7%), ‘매우 불만’(17.5%) 등 수업에 불만족하다는 응답자가 59.5%에 달했다.
이런 불만에도 학생들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영어 수업을 듣는 이유로 ‘학점을 따기 위해’(50.2%), 또는 ‘필수과목이어서’(12.9%) 등을 상당수 학생이 꼽아 다른 대안이 없음을 호소했다. 대학에 불어닥친 영어 수업 열풍으로 영어 수업을 듣지 않고서는 학점을 딸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한다. 이는 사교육비 지출을 부추기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23.5%는 ‘영어 수업을 듣기 위해 별도의 사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따뜻한 모국어가 낳은 인류의 유산
영어 수업의 성과도 분명하지 않았다. 15.4%만이 ‘영어능력 향상과 수업 내용 모두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반면 ‘영어능력 향상에만 도움된다’(42.4%)거나 ‘수업 내용 이해에만 도움이 된다’(11.3%) 등 절반의 성과만 인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30.9%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며 부정적인 태도를 밝혔다.
이에 대해 지방의 한 국립대 교수는 “교육과학기술부는 물론 언론사가 주관하는 대학평가에서 영어 수업과 원어민 교수 등을 지표로 넣자 경쟁적으로 영어 수업을 늘렸다”며 “영어 수업이 왜 필요하고 어떻게 도입해야 하는지 근본적인 고민은 부족했다”고 말했다. 올 초에 서울 유명 사립대를 졸업한 강아무개(24)씨는 “영어 수업이 장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전공에 대한 이해도가 없으면 전혀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며 “2학년 때 듣는 전공 기초 과목은 대부분 이해할 수 있었지만 4학년 때 들은 전공 수업은 60~70%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오히려 영어 수업을 강화하는 대신 모국어를 강조하는 목소리도 있다. 서울대 이광근 교수(컴퓨터공학)는 “모든 학문이 오리지널을 능가하는 것은 항상 어머니의 혀(Mother Tongue·모어)로 달성된다”며 “따사로운 모국어로 만들어진 전문서적이 축적되지 않으면 우리의 실력은 성장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광근 교수는 그 실례로 19세기 위대한 과학자 가운데 한 명인 마이클 패러데이를 꼽았다. ‘전자기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패러데이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의 공부는 13살 때 제본업체의 견습공 시절부터 시작됐다. 일하는 틈틈이 영어로 쓰인 책들을 보며 기회를 얻었다. 지식인을 위해 만든 백과사전과 과학 교재들을 통해 전기를 배웠다. 이후 그는 코일 속에 자석을 넣다 뺐다 함으로써 전류가 흐른다는 ‘전자기유도의 법칙’을 알아냈다. 오늘날 대부분의 발전소는 이 법칙으로 전기를 생산해낸다.
이 교수는 “패러데이가 제본하는 과학서적들이 모국어였던 덕택에 당시의 과학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며 “일본이 모국어로 꾸준히 축적한 성과들 덕분에 다나카 같은 중소기업 직원이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나카 고이치는 도호쿠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뒤 중견회사인 시마즈제작소의 연구원으로 일하며 단백질 등 생체고분자의 질량을 정확히 측정하는 방법을 개발해 2002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교감이 불가능한 영어 수업
연세대 문정인 교수(정치외교학)도 영어 수업이 효과가 없다고 비판했다. 문 교수는 “아무리 영어를 잘하는 교수라고 해도 모국어 대신 영어로 가르치면 자신의 지식을 80% 정도밖에 전달할 수 없다”며 “배우는 학생도 그것의 60~70%만 이해할 수밖에 없어 제대로 된 지식이 전달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가르치는 방식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상호 간의 교감인데, 영어 수업에서 그것이 가능하겠느냐”며 “한국에서 영어로 상호 교감을 이룰 수 있는 분은 많지 않다”고 덧붙였다.
문 교수는 특히 영어 수업 탓에 표현과 사고의 제약이 따른다고 지적했다. 그는 하이데거의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말을 예로 들며 “언어는 표현의 수단인데 그 수단으로 인해 사유와 표현에 제약이 생겨 자기 생각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면 (영어 수업을) 안 하거나 희망하는 사람 중심으로만 운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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