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자가 살아남는다. 승자에겐 보상이 주어지지만, 패자에게 돌아가는 건 냉혹한 징벌이다. 징벌의 양태는 다양하다. 자유의 제약이나 물리적 고통일 수 있고, 경제적 불이익(벌과금·감봉) 또는 지위의 추락(강등)이나 박탈(해고)이 될 수도 있다. 징벌받는 자에겐 견디기 힘든 수치심과 열패감이 강요되는 것은 물론이다.
학생 4명의 자살을 부른 카이스트 사태의 주범으로 ‘징벌적 등록금제’가 지목됐을 때, 학교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성적 미달로 수업료를 납부하는 학생은 10% 안팎에 불과하고, 목숨을 끊은 학생 가운데 등록금 부과선에 미달한 경우는 1명뿐이란 해명이었다. 그러나 징벌이 항상 질서에서 이탈한 소수의 열외자에게 가해진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럴듯하지만 설득력 있는 항변은 아니었다. 징벌받는 자가 다수라면 징벌이 아닌 폭력이다. ‘징벌받지 않는 다수’의 존재야말로 징벌의 ‘비자의성’과 함께 징벌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필수 요소다.
징벌이 낳은 공포의 전염
제도를 만들어낸 학교 당국도 징벌의 가혹함을 알고 있었다. 서남표 총장도 인정했다. “우리 학생들 압박이 많습니다. 학점을 B 이하로 받으면 수업료를 내야 하니 부담이 크죠. 부모님한테 전혀 그런 소리 안 하다가 돈 달라고 해야 하니까 그게 커다란 압박이 되지 않겠습니까?”(서남표 강연집 ) 하지만 그들은 ‘평점 3.0 미만’이라는 기준의 보편성과 징벌을 받아야 할 대상이 소수라는 사실로 징벌에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하려 했다. “좋은 대학에 왔다는 이유만으로 전액 장학금의 혜택을 누리는 상황을 바꿔보고 싶었다”는 말로 ‘징벌의 선의’를 공증받고 싶어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징벌의 효과였다. 징벌은 항상 소수의 이탈자·낙오자에 대한 징치의 형태를 띠지만, 고유한 ‘가시성’으로 인해 그 효과는 ‘아직 징벌받지 않은 자들’ 모두에 파급된다. 징벌이 가져오는 ‘공포의 전염 효과’다. 내 차례에 앞서 매 맞는 급우를 보면서 물리적 고통에 버금가는 심리적 통증(공포)을 느끼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자신도 징벌의 객체가 될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가 확산될수록, 집단 내부에 징벌받을 잠재성에 노출된 사람이 많아질수록 징벌의 효과는 커진다. 분명한 것은 우리 사회가 언제부턴가 징벌의 경제성을 극대화하고, 이를 통해 구성원의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내는 ‘징벌 사회’로 변모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승자독식사회’가 1등에게 모든 전리품을 몰아줌으로써 ‘1등이 되지 못한 자들’의 성취욕을 극대화하는 시스템이라면, 징벌사회는 패자에게 감당키 어려운 고통을 안겨주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아직 징벌받지 않은 자들’의 공포심을 집단적 생산성으로 전환시키는 체제다.
물론 승자독식의 메리트 시스템만으로, 징벌의 공포 효과만으로 작동하는 사회는 없다. 승자독식은 대부분 낙오자에 대한 징벌체계를 수반한다. 이런 점에서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완전한 승자독식사회, 순정의 100% 징벌사회는 머리 속에나 존재하는 ‘사회적 이념형’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두 시스템은 언제나 서로의 ‘거울상’으로 한 사회 안에 병존한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신 교수는 우리 사회를 징벌사회라 명명할 수 있다는 데 공감한다. “구성원의 순응과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 주로 의지하는 수단이 패자에 대한 징벌”이라는 게 그 이유다.
징벌사회의 작동 메커니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의 인기 포맷으로 자리잡은 ‘서바이벌 게임’이다. 문화방송의 ‘나는 가수다’는 쟁쟁한 현역 가수 7명을 한 무대에 올려 오직 가창력만으로 진검승부를 벌이게 한다. 매회 평가단이 점수를 매겨 꼴찌 탈락자를 가려내는데, 그때마다 퇴출된 출연자를 대신해 새로운 가수가 충원된다. 이 프로그램의 특징은 출연자들에게 어떤 명시적 보상도 약속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든 참가자가 퇴출의 쓴잔을 피하기 위해, 그저 매 순간 잠재된 역량과 에너지를 사력을 다해 뽑아낼 뿐이다.
과학계 ‘태릉선수촌’의 비극징벌사회는 이런 서바이벌 예능 프로의 게임 규칙이 지배적 원리로 작동하는 사회다. 피 말리는 경쟁을 통과한 다수는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지만, 안도의 시간은 짧다. 게임은 단판에 그치지 않고 무한 반복되기 때문이다. 게임이 거듭될수록 탈락자는 늘어난다. 최후까지 생존하는 극강의 실력자들을 제외하곤 언젠가 퇴출의 단두대 앞에 설 수밖에 없는 게 다수의 운명이다. 이는 ‘낙오자·일탈자에 대한 응징’이라는 명시적 목적 이상의 효과를 산출한다. 모든 참가자는 추락과 패배에 대한 공포를 내면화하고, 스스로를 제도가 요구하는 순종적 신체, 맞춤형 기계로 훈육해가는 것이다.
‘서남표 체제’의 카이스트는 이런 징벌 시스템이 가장 첨예한 형태로 구현된 ‘사회적 실험실’이었다. 징벌은 수업료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연차 초과자 불이익 규정과 강화된 교수 정년보장 심사제는 물론, “학생들이 영어 수업을 이해 못하는 것을 너무 큰 실패로 생각했다”는 한 외국인 초빙교수의 증언에서 드러나듯, 전 과목 영어 강의를 포함한 ‘서남표식 개혁’을 표징했던 모든 제도가 카이스트의 ‘징벌 경제’를 지탱하고 있었다.
카이스트는 실험실이 되기에 적합한 요소를 두루 갖춘 공간이었다. 공학 엘리트 양성기관이 갖는 균질성 덕분에 통제되기 어려운 ‘불순물’이 예기찮은 돌발 상황을 일으킬 위험성이 적고, 평탄한 엘리트 코스를 걸어온 교수와 학생 집단 역시 실험 대상에 요구되는 ‘순응의 아비투스’를 익숙하게 체화하고 있던 탓이다. 카이스트는 탄생부터가 실험이었다. ‘과학입국’을 위한 인재 육성을 목표로 설립된 ‘국가기관’이었던 까닭에 초기부터 막대한 재정 지원과 제도적 특혜가 주어졌다. 1970~80년대 돌진적 산업화 프로젝트의 ‘선택과 집중’ 전략이 가장 확실하게 구현된 교육기관이 카이스트였던 것이다. 카이스트는 과학계의 ‘태릉선수촌’이었다.
카이스트의 실험은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서남표 체제의 눈부신 성적표가 이를 뒷받침했다. 의 세계 대학 평가에서 카이스트의 종합 순위는 2006년 198위에서 2007년 132위, 2008년 95위, 2009년 69위로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언론은 앞다퉈 ‘카이스트발 대학 개혁’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고, ‘카이스트 실험실’의 빛나는 성과에 고무된 유수의 대학들이 카이스트식 징벌 경제의 도입에 속속 착수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앵커링 이펙트’(닻 내리기 효과)가 실현된 것이다.
호소할 대상 없는 제도적 모욕카이스트 사태는 이런 점에서 ‘실험실 사고’에 비유될 만하다. 물론 사고는 예고된 것이었다. 실험의 주관자들은 자신의 조작 대상이 ‘자존감을 지닌 인간’이란 사실을 애써 외면했던 것이다. 사회학자 엄기호(연세대 강사)씨는 카이스트의 징벌 체계가 구성원들의 공포심만을 양산한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징벌적 등록금의 핵심은 학생에게 인간으로서 치명적인 모욕감을 안기는 것이다. 극단적 수치심을 유발하고 그 수치심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다면 무한경쟁에서 승리하라고 등을 떠미는 장치다.”
이런 ‘모욕 주기’는 ‘공포심 확산하기’와 더불어 징벌사회를 움직이는 두 개의 동력장치다. ‘나는 가수다’와 함께 공중파 서바이벌쇼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신인가수 발굴 프로그램 을 보자. ‘멘토’라는 이름의 전문가들이 등장해 쉴 새 없이 참가자들을 다그친다. “이렇게 할 거면 때려치우세요.” “이런 태도로는 절대 가수가 될 수 없어.” 케이블 채널에서 적잖은 마니아 시청층을 거느린 란 요리 경연 프로그램 또한 마찬가지다. “이걸 먹으라고 만든 거야? 이건 음식이 아니라 쓰레기야.” 익숙한 풍경이다. 학교와 일터에서 우리는 반복적으로 비슷한 상황과 마주친다. “이러라고 월급 주는 줄 알아? 회사가 자선단체야?”
물론 모욕도 일상화되면 면역능력이 생긴다. 어지간한 모욕은 맷집으로 커버된다. 위험한 건 ‘제도화된 모욕’이다. 징벌은 제도화된 모욕이다. 문제는 제도에 의해 모욕당한 당사자는 훼손된 자존심을 어디에도 호소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당신이 열심히 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라고 제도적으로 정당화되는 탓이다. 카이스트에서도 그랬다. 영어 강의 수강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학생들을 향해 학교 당국은 “영어로 강의한다는 것, 다 알고 입학하지 않았느냐”고 일축했다. 징벌적 등록금의 가혹함을 이야기하면 “공부만 열심히 했으면, 3.0을 넘겼을 것 아니냐”고 입을 막았다.
의 지은이 아비샤이 마갈릿(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은 “모욕하는 주체가 제도일 때 모욕은 ‘실존적 위협’이자 씻을 수 없는 ‘낙인’이 된다”고 말한다. 모욕하는 제도를 주변에서 찾는 건 어렵지 않다. 모든 노동자를 S-A-B 등급으로 서열화해 급여를 차등지급하는 성과급제, 합법적 ‘이등 시민’을 양산하는 비정규직 고용 시스템이 대표적이다. 학교 성적 산출의 절대 규범으로 자리잡은 상대평가제는 또 어떤가.
그들의 죽음은 운명이 아니다제도에 의해 모욕당한 자는 절대적 무력감을 느낀다. 모멸감에 몸을 떨다 목숨을 던지기도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자들의 잇따른 자살이 그런 경우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은 곧잘 ‘의지가 박약한 개인의 불행’으로 간주된다. 징벌사회에서 작동하는 ‘개인화 프레임’의 완강함 때문이다. 카이스트 학생들의 죽음을 “0.1% 수재들만 겪는다는 ‘엘리트 스트레스’의 결과”로 규정한 의 시각도 다르지 않았다.
김영미 포항공대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는 “사태의 원인이 제도에 있다면 해법 역시 제도적인 차원에서 구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죽은 자들의 운명을 모두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모욕을 제도화하고 공포를 확대재생산하는 징벌사회에 맞서 공감과 협력의 대안 질서”를 상상하는 것. 그 시작은 평범하고 능력 없는 다수를 먹여살릴 탁월한 인재를 육성하려면 경쟁을 활성화하는 고강도의 혁신이 필요하고, 낙오자에 대한 불이익과 징벌은 다수의 행복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집단적 체념에 대해 책임과 부끄러움을 나눠갖는 일이다. 이 지점에서 67년 전 한 독일 작가가 남긴 짧은 시는 2011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무거운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 시는 이러하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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