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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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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안에서 소설적 도약을 이루다



100여 편 응모작 가운데 노량진 고시촌 다룬 김소윤씨의 <벌레> 당선…

‘큰 손바닥’ 부문 <구민을 위하여>, ‘작은 손바닥’ 부문 <방문> 가작 선정
등록 2010-11-26 11:33 수정 2020-05-03 04:26
제2회 ‘손바닥 문학상’ 수상작이 선정됐습니다. 단편소설인 ‘큰 손바닥’ 부문에서 김소윤씨의 가 당선작으로 선정됐고, 기민호씨의 가 가작으로 뽑혔습니다. 이번에 신설된 ‘작은 손바닥’ 부문(200자 원고지 5~20장)에서는 윤희정씨의 이 가작으로 선정됐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총 100여 편에 이르는 응모작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지난 10월31일 밤 12시에 공모를 마감한 뒤 박용현 편집장과 최근 소설가로 등단한 유현산 전 편집팀장, 한페이지단편소설(1pagestory.com) 운영자이자 소설가인 서진씨가 예심을 통해 큰 손바닥 부문 11편, 작은 손바닥 부문 8편을 가렸고, 본심은 김선주 전 논설주간, 소설가이자 시인인 유용주씨, 문학평론가 신형철씨가 맡았습니다. 지난 11월10일 최종 심사회의를 열고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수상작을 결정했습니다.
큰 손바닥 부문 당선작에는 300만원, 가작에는 100만원, 작은 손바닥 부문 가작에는 50만원의 상금이 주어집니다. 또한 모든 수상자는 일정 기간 필자로 기용됩니다.
이번호에 를 표지이야기로 소개한 데 이어 다음호에는 , 그 다음호에는 을 싣습니다.
손바닥 문학상 공모는 내년에도 계속됩니다. 많은 응모 바랍니다. _편집자
“가만히 있어도 슬그머니 웃음이 새어나온다.” 제2회 손바닥 문학상 수상자들. 왼쪽부터 기민호·김소윤·윤희정씨.한겨레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가만히 있어도 슬그머니 웃음이 새어나온다.” 제2회 손바닥 문학상 수상자들. 왼쪽부터 기민호·김소윤·윤희정씨.한겨레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올해 손바닥 문학상은 두 부문으로 분리해 공모했다. ‘큰 손바닥’ 부문은 일반 단편소설 분량의 원고를, ‘작은 손바닥’ 부문은 흔히 엽편(葉篇) 혹은 장편(掌篇)이라 부르는 콩트 분량의 원고를 받았다. 단편과 콩트는 분량이 다를 뿐 아니라 장르의 본질 자체가 다르므로 당연히 심사와 시상도 분리해 진행했다.

‘큰 손바닥’의 노동과 가족과 전쟁

큰 손바닥 부문에서는 11편이 본심에 올라왔다. 단순히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과 소설이라는 물건을 제작하는 일은 썩 다르다. 사람이 아니라 캐릭터가 있어야 하고, 줄거리가 아니라 플롯이 있어야 하고, 문장이 아니라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 이 점에 둔감한 작품들은 소중한 진심이 느껴져도 일단 내려놓았다.

심사위원들이 진지하게 의견을 나눈 작품은 6편 정도였다. 박목우씨의 은 전쟁으로 고통받은 이라크 국민에게 바쳐진 사랑 이야기다. 문장을 세공하는 데 들인 노력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가독성에 문제가 있다는 평, 소설을 쓰기 위해 확보돼야 할 산문적 거리가 확보돼 있지 않아 감상적이라는 평이 있었다.

윤희정씨의 에는 반도체 회사에 근무하다 백혈병에 걸린 인물과 이를 은폐하는 거대기업의 냉혹한 간부가 나오지만 서술은 제3자에게 맡겼다. 덕분에 생경함을 눅이고 울림을 높일 수 있었다. 삼성반도체 산재 사건을 다룬 것임을 알겠거니와, 현실을 직시하고 용기 있게 재현하려는 의지는 언제나 이렇게 감동적이다. 그러나 서술이 소박해서 소설로서의 긴장이 약했다.

박지현씨의 는 17살 소년의 가출과 실종을 다룬다. 심사위원들은 이 소설을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 가족의 아들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 소설로, 혹은 가족 구성원의 실종 이후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사실의 쓸쓸함을 되새기는 소설로 읽었다. 그러나 어떻게 읽어도 소년의 고민이 지나치게 추상적이라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김인씨의 은 가족 내 근친상간이라는 소재에 도전했다. 진지하고 집요한 태도가 미더웠고 마치 천운영의 소설을 읽는 듯 여운도 강렬했다. 2인칭 시점의 서술 운용 방식이 근년에 밀리언셀러가 된 작품을 연상시킨다는 평도 딱히 비판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공모라면 모르겠으되 ‘손바닥 문학상’이 지금 굳이 선택해야 할 작품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기민호씨의 는 어느 구청을 배경으로 몇몇 인물의 이야기를 느슨하게 펼쳐놓고 이를 노련하게 엮어나가는 한바탕 소동극이다. 여느 소동극이 그렇듯이 ‘그래서?’라는 반문을 남기는 허탈감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소설가 김종광을 연상시키는 입담이 우리를 충분히 즐겁게 했고, 손쉽게 선악과 미추를 분별하지 않으면서 삶의 역동적 현장을 따뜻하게 응시하는 시선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였다.

김소윤씨의 는 만큼 소재가 강렬하지도, 만큼 입담이 능란하지도 않았다. 대한민국 20대의 내면을 서울 노량진 고시촌을 배경으로 보여주는 방식도, 그 인물의 불안정성을 인물 자신에게만 벌레가 보이는 신경증으로 설명하는 착상도 딱히 신선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작품은 모든 면에서 가장 진솔했고(인물), 안정적이었으며(서술), 시의적절했다(주제).

 

절제의 묘미가 아쉬운 ‘작은 손바닥’
지난해보다 응모 편수는 줄었지만 작품의 완성도와 기교에서 뛰어난 작품이 많았다. 본심 회의 중인 문학평론가 신형철, 김선주 전 <한겨레> 논설주간, 소설가이자 시인인 유용주씨(왼쪽부터).한겨레21 정용일

지난해보다 응모 편수는 줄었지만 작품의 완성도와 기교에서 뛰어난 작품이 많았다. 본심 회의 중인 문학평론가 신형철, 김선주 전 <한겨레> 논설주간, 소설가이자 시인인 유용주씨(왼쪽부터).한겨레21 정용일

특히 소설 후반부에서 ‘커다란 나무에 점점이 매달린 붉은 꽃들’의 이미지가 ‘붉은 꽃이 화려하게 피어나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이미지로 이어지는 대목은 아름답다. 그 뒤에 주인공이 ‘나는 작은 벌레다’라고 말할 때 이 ‘벌레’는 더 이상 그로테스크하고 절망적이기만 한 벌레가 아니다. 바로 이런 것이 ‘소설적인’ 도약이다. 다른 작품들에는 이런 도약의 순간이 없었다. 우리는 김소윤씨의 손을 잡기로 결정했고 더불어 기민호씨의 어깨를 두드려주기로 했다.

공모 첫해인 탓이겠지만 작은 손바닥 부문에는 응모작이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 장르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는 응모작은 더더욱 적었다. 줄여 쓰고 짧게 쓰는 게 핵심이 아니다. 이 장르는 날카로운 잽이어야 하고, 우아한 측면 승부여야 한다. 결정적인 말은 하지 말아야 하고, 이야기는 적당한 순간에 슬그머니 놓아버려야 한다. 그런데 많은 작품이 짧은 분량 안에 정의로운 메시지를 단선적으로 눌러 담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함께 논의한 임상태씨의 는 알레고리를 도입했지만 메시지가 진부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여서 윤희정씨의 을 수월하게 가작으로 뽑았다. 현실 비판적인 언급들을 그다지 폼 나지 않는 주인공에게 맡겨 아이러니의 효과를 잘 살려냈고, 주인공의 진지하지 않은 비분강개를 “글쎄요… 저는 티비 검침원일 뿐입니다”라는 말로 무심히 받아치면서 이 장르의 묘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산뜻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작은 손바닥 부문의 응모작들이 내년에는 더 풍성해지면 좋겠다. 분량 제한은 제약이면서 동시에 기회다. 체호프나 카프카의 사례가 보여주듯 원고지 20매는, 날카로운 현실 풍자에서부터 형이상학적 문제 제기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테마가 움직일 수 있는, 생각보다 꽤 넓은 운동장이다. 번득이는 재능은 오히려 이 장르에서 더 빛날 수 있다. 이 매력적인 장르를 대상으로 하는 희소한 공모에 더 많은 독자가 관심을 갖길 바란다.

심사위원 김선주·유용주·신형철



수상 소감

내 유일한 항거와 변혁의 깃발
큰 손바닥 부문 당선 김소윤씨

글을 쓴다는 것은, 목소리를 내는 일이다. 차마 두 눈을 마주 보고 말할 수 없는 것도, 두 팔 들고 거리로 나설 수 없는 것도, 두 발로 뛰어들 수 없는 것도 글로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름의 생의 굴곡 속에서도 ‘하염없이 고독하고 기다리고 실망하고 그래도 여전히 사랑하는’ 이 일을 놓지 못하는가 보다.
스스로에게만 치열했던 이십대를 지나 조금쯤 주위를 둘러보게 된 삼십의 초입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야 나는 종종 두렵다. 그저 평범하다 여겼던 내 삶이 기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시끄럽고 부끄러운 세상 앞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나마 이러한 자각에서부터 ‘더 나은 세상’(할례에 신음하는 어린 소녀와 맹목적인 학대에 고통받는 아이들, 가난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노인들, 죽음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는 이들이 조금만 더 줄어드는)이 시작된다고 슬픈 위안을 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내 유일한 항거와 변혁의 깃발, 초라한 한 줄의 글을 써나간다. 설사 이것이 나는 물론 세상 어느 한구석도 바꿀 수 없는 풋내 나는 짓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역시 부끄러운 세상의 한 점일 뿐인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 말이다. 이제 막 익은 석류처럼 어여쁜 두 아이를 위해서라도, 돈과 명예와 허울 좋은 이름들을 좇는 이가 되지 않기를, 지쳐 포기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그녀와 포옹할 수 있는 날을 위하여
큰 손바닥 부문 가작 기민호씨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글 쓰는 일이 가장 싫습니다. 책을 읽는 것은 두 번째로 싫습니다. 어떤 비유나 농담이 아닙니다. 정말로 싫은 겁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문학이 나에게 단 한 번도 웃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짝사랑과도 같습니다. 무모하고 제어 불가능한 바로 그것 말입니다. 그녀는 정말 아름답고, 경쟁자는 많고, 나는 가진 것이 없고, 시간은 자꾸만 흐릅니다. 안타까운 마음은 섭섭함으로 변하고 섭섭한 마음은 미움으로 바뀝니다. 나를 몰라주니까요. 그래서 소설가가 꿈이었던 한 소년은 나이 서른이 되어서 글 쓰는 일을 가장 싫어하게 된 것입니다. 당선 소식을 접하고 처음으로 문학의 표정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직도 거기 있었어?” 아직도 거기 있었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계속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가 문학과 대단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좋은 친구는 될 수 있을 겁니다. 문학은 조금 앞서가고 나는 조금 뒤에 서서 따라가도 좋습니다. 언젠가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와 포옹할 수 있는 날도 오겠지요. 나는 계속 그녀 주변에 있을 겁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의 입이 근질거리게 하는 글
작은 손바닥 부문 가작 윤희정씨

글을 쓴다고 하니 누군가 말했다. “우리한테 힘을 주는 이야기를 써줘.” 나이 예순에 억울해서 못 살겠다고 환경미화 노동조합을 만든 이였다. 알겠다고 대답했으나, 글이 나온 뒤 그녀를 피해다녔다. 나는 솔직히 그녀들에게 ‘힘이 되는 글’이 무엇인지 몰랐다.
덜컥 당선 전화를 받았다. 놀랐다. 감사했다. 그리고 조급해졌다. 연말 시상식에서 ‘이 상을 채찍질로 알고…’ 이렇게 시작하는 배우들의 수상 소감을 들으며 입에 발린 말을 하는구나 했는데, 이제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어떤 글을 써야 할까. 고민이 든다.
사실 답은 정해져 있다. 나는 예순의 그녀에게 당당히 보여줄 글을 쓰고 싶다. 다만 방법을 모를 뿐이다. 고심했다. 그리고 편히 생각하자는 결론이 났다. 어차피 그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녀 자신이다. 뭐가 억울한지, 어떤 꿈이 있는지, 세상은 그녀를 어떻게 대했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그녀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자신의 이야기는 자신이 하는 게 좋다. 그럼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녀들이 말하고 싶어지게 하는 글을 쓰자. 읽다 보면 무언가 발바닥이 간질거리고, 내장이 꿈틀거리고, 입이 근질거려 “나도 할 얘기가 있는데”라고 소리치게 되는 글. 아, 이거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 누군가 말하고, 악쓰고, 때로는 함께 입을 모으고 싶어지게 만드는 글을 쓰고 싶다. 예순의 그녀에게 글을 보여줄 날이 조금 앞당겨진 것 같다. 부족한 작품에 기회를 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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