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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왜 불의를 방관하나” vs “국가가 어디까지 개입하나”

‘노무현 브레인’ 유시민과 ‘이명박 브레인’ 박형준의 한판 대결…
중소기업·부동산·복지 정책에서 국가의 역할은?
등록 2010-08-20 17:22 수정 2020-05-03 04:26
<b>유시민: </b> 단순히 없는 사람을 돌봐줘야 한다는 게 아니라, 재능을 발견하기 위한 투자로 생각해서 거기에 돈 쓰는 걸 아까워하지 않는 게 정의에 부합하는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재정 구조에선 교육·복지를 합쳐도 전체 예산의 50%가 안 된다. 
  <b>박형준: </b> 교육도 평준화의 역설이 있다. 고등학교까지 평준화해놓고 대학은 완전 서열화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단일경쟁 체제로 대합입시를 하다 보니 기형적인 결과가 강남은 일류대, 나머지는 하위권이라는 거다. 격차는 점점 벌어진다.

유시민: 단순히 없는 사람을 돌봐줘야 한다는 게 아니라, 재능을 발견하기 위한 투자로 생각해서 거기에 돈 쓰는 걸 아까워하지 않는 게 정의에 부합하는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재정 구조에선 교육·복지를 합쳐도 전체 예산의 50%가 안 된다. 박형준: 교육도 평준화의 역설이 있다. 고등학교까지 평준화해놓고 대학은 완전 서열화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단일경쟁 체제로 대합입시를 하다 보니 기형적인 결과가 강남은 일류대, 나머지는 하위권이라는 거다. 격차는 점점 벌어진다.

‘이명박의 핵심 브레인’과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이 ‘정의’를 놓고 대담을 벌였다. 박형준 전 청와대 정무수석과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맞장’을 뜬 건 지난해 11월 문화방송 에 출연한 뒤로 아홉 달 만이다. 8월13일 오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이들은 “옷을 잘 입으셨네요”(박 전 수석), “백수가 원래 옷은 잘 입습니다. 실세신데 뭘(옷에 신경을 쓰십니까)” 하며 웃었다. 그래도 토론에 들어가자, 개인 일정으로 대담 전날 밤에야 독일에서 귀국한 박 전 수석이나, 박 전 수석 일정에 맞춰 원래 있던 일정을 미루고 달려온 유 전 장관 모두 팽팽한 기싸움을 벌였다.

박 전 수석은 독일에 가면서 마이클 샌델의 를 읽었다고 했고, 유 전 장관은 이미 자신의 트위터에 이 책을 읽어보라고 추천한 적이 있다. 그 만큼 현실 정치인으로서 두 사람 모두 정의의 문제에 관심이 깊다는 징후다. 엄연히 여야가 갈린 상황에서 공격수는 유 전 장관일 터. “국가는 선을 실현하기 위한 존재”라는 논리로 이명박 정부에서 벌어진 ‘불의’를 공격할 땐 작심한 듯 거칠었다. 박 전 수석도 “참여정부 때 분권화를 위해 추진한 혁신도시의 결과로 서울 강남 집값이 제일 많이 올랐다. 이걸 해결하려고 징벌적으로 도입한 종부세는 정의에 부합하느냐”고 촘촘하게 반박했다.

대담 말미, 정의가 실현되려면 국가와 개인의 책임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점에선 두 사람이 “전적으로 공감”했다. 흥미로웠다.

대담의 사회는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이 맡았다.

지금 정의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

사회 정의엔 다양한 정의가 있지만, ‘각자가 어떻게 벌과 보상을 배분받아야 하는가를 현실에 적용시키고자 하는 의지’라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의 표현이 보편적으로 수용돼왔다. 2000년대 이후엔 사회의 이념적·철학적 차원에 따라 정의가 무엇이냐에 대한 생각이 달라 사회 통합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이기도 하다. 두 분은 2010년 현재 가장 시급한 정의의 원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박 전 수석(이하 박) 우리 사회에서 정의라는 주제에 관심이 일어나는 데는 두 가지 배경이 있다. 하나는 2008년 금융위기에서 제기된 자본주의의 새로운 위기와 윤리 문제다. 일부 금융자본이 전세계 자본주의와 그 속에 사는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줬고,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답을 시장경제의 합리성보다 윤리적인 차원에서 찾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확산됐다. 두 번째는 우리 사회에서도 중산층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게 사실이라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실존적 불안을 느끼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 통합의 문제와 그에 따른 정의의 문제가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정의란 어떻게 하면 가능한 수준에서 윤리적 차원을 회복하고, 그 차원에서 공정함과 기회 균등에 답을 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이다.

유 전 장관(이하 유)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왜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됐을까? 그건 사람들이 정의에 의문을 많이 가졌기 때문이다. 제목 자체가 사람들이 평소에 가진 의문을 표현했고, 내용이 우리가 평소 의문을 가졌던 현실적 주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관심을 끌었다고 생각한다.

철학적·이론적 규정이나 해석을 하기 전에 나는 사람들한테 정의감이라는 ‘본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의가 무엇인지를 배우지 않아도 사람은 누구나 감각 체계로서의 정의에 대한 직관을 갖고 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정의의 원칙을 알고 있어서 그에 부합하느냐 아니냐를 따져 분노하는 게 아니라, 어떤 현상을 목격하거나 체험했을 때 곧바로 불쾌한 느낌, 분노, 연민을 느끼게 돼 있다. 왜 그런 느낌에 사로잡혔을까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정의를 규정하는) 학자의 논리를 받아들이거나 배척하게 되는 것이다. 정의에 대한 관념은 사회적 본능이고, (사람의) 오감 중 하나다. 지금 사람들의 직관적 도덕관념을 침해하는 일이 많이 벌어지고,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어떻게 보고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많이들 고민하고 있어서 이 책이 널리 읽힌 게 아닐까.

민주주의가 확산되면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도 실현되고 있다. 자유는 개인을 발견하고, 누구로부터 부당하게 간섭받지 않으려는 소극적 자유부터 자아를 실현하는 적극적 자유까지 확산되는데, 여기서 정의의 문제가 발생한다. 자유를 적극적으로 실현하려면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게 불가피하고, 이 경쟁에서 승자와 패자가 만들어지는 질서를 어느 정도나 용인할 것이냐가 바로 정의의 문제다.

민주주의는 평등의식도 확산시킨다. 당연히 공정함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요구하게 되는데, 기회의 공정함뿐만 아니라 분배와 결과의 공정함에 대한 문제의식으로까지 확산된다. 이 또한 정의의 문제고, 모든 사람이 이에 대한 의견을 감각적으로 갖고 있다. 그래서 정의의 문제는 상당히 논쟁적일 수 있다.

 

정부의 정책 수단이 제한돼 있기 때문?

사회 우리가 가진 정의라는 본능적 감수성은 민주주의의 가치와 연결돼 훈련됐는데, 현재 자본주의의 진행 방향은 그렇게 민주주의적으로 훈련된 감수성과 괴리될 여지만 보이는 국면 아닌가.

정의에 대한 관념은 매우 본능적이지만 내용은 실제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유전받고 당대에 체험·학습함으로써 만들어진 합의다. 완벽하진 않지만 폭넓은 틀에서 이뤄진 합의가 깨진다고 생각할 때 정의의 관념이 도전받는 거다. 지금은 우리 삶의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영역에서 상당한 시간 동안 합의로 존재했다고 생각한 정의의 관념이 도전받고 깨지는 현상을 보고 있는 거다. ‘내가 가진 정의의 관념과 관련해 국가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 ‘누군가 정의의 원칙을 무너뜨릴 때 국가가 방관하느냐’ ‘국가가 정의를 훼손하는 일을 만들어내고 있느냐’는 의문이 크게 제기되고 있다. 국가가 정의를 훼손하거나 이를 방조·묵인, 혹은 적극 조장한다는 인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청년실업이 심각하고 30~40대부터 직업 안정성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다. 경쟁이 꼭 공정한 결과를 보증하지는 못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정부와 국가에 대한 새로운 요구도 제기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딜레마가 있다. 정부가 이를 해결할 만한 충분한 정책 수단이나 자본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거다.

국가에 지나치게 소극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것 아닌가. 참여정부 때도 정의의 관념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사회·경제 현상에 국가가 어디까지 어떻게 개입해야 하느냐를 놓고 많이 고민했다. 그때도 소극적으로 임했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굉장히 리버럴한 사람이었고, 나도 그렇다. 양극화에 대한 담론 시장에서의 열세 때문에 생각을 과감하게 실천에 옮기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 그게 정의의 실현과 관련해 참여정부에서 가장 부족했던 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정부는 정책 수단이 제약돼 있어 고민한다기보다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취급하거나 정의를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 같다. 부정의한 현상을 심화하는 정책을 능동적으로 실행한다든가, 시장에서 벌어지는 부정의에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다든가. 민간인 사찰 사건처럼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들이 그 권력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문제도 있다. 이렇게 우리의 정의 관념을 침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데 시민들이 ‘생각을 얘기해봤자 별로 반영할 길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할 때 공동체가 위험한 영역으로 들어가는 거다.

 

용산 참사, 공권력 개입은 어디까지

정의의 이상적 기준을 설정해놓고 그에 맞춰가려고 목적론적으로 접근하면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문제가 훨씬 더 많아진다. 정부가 일일이 개입해서 공평한 상태로 만들려면 정부의 개입이 과도해진다. 결국 어디까지 당사자가 자율적으로 해결하도록 하고, 어디까지 정부가 기준과 규범을 만들 것인가로 귀착된다. 시장의 불공정성을 목적의식적으로 바꾸는 것 말고, 시간이 걸려도 당사자끼리 해결하도록 하고 정부가 테두리를 만들어주는 방법도 있다.

이명박 정부가 경쟁과 효율만 강조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공정한 기회를 주고, 창의성·다양성을 키울 기회를 줄지 고민했다. 그래서 교육 정책에서 마이스터고교를 만들었고, 입학사정관제도 실시한 거다. 부동산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의도와 배치되는 결과는 많다. 참여정부에서도 부동산 투기 억제가 가장 중요한 정책 목표였지만, 분권화를 위해 혁신도시를 만드니까 보상비가 강남으로 집중됐다. 참여정부에서 강남 집값이 제일 많이 올랐다. 이걸 해결하려고 징벌적으로 종부세를 도입했는데, 이게 정의에 부합하는지 또는 효율적인지는 다시 논의될 수 있는 거다. 이상에 맞춰 끌고 가서 생긴 문제다.

나는 목적론적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국가가 ‘악의 주체’, 불법·부정의·억압의 주체로 활동하던 시기가 그리 멀지 않다. 전두환·노태우 정권을 보지 않았나. 실제 다수의 대중이 ‘국가는 왜 존재하나, 뭘 하는 곳인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고, 이게 목적론적 질문이다.

사회 부동산 개발은 다 민간이 하기 때문에 정부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개입해야 하느냐가 쟁점이다. 서울 용산에선 법을 집행하다 사람이 죽었다. 부동산 문제는 민간 당사자끼리 해결하는 건데 정부가 개입하는 것이 정의로운가.

‘망루’가 이 정부 들어 갑자기 생긴 게 아니다. 참여정부 때도 수없이 그런 일이 있었지만, 가만히 놔뒀다. 그 대신 공무원이나 정보과 형사가 가서 농성자들을 만나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 이러면 당신들도 갑갑하고, 시행사·시공사도 어렵고, 금융 비용도 발생한다. 얼마 더 필요하냐”고 물었다. 이렇게 한달 두달이면 협상을 했다. 심각하게 정의가 침해됐다고 생각해서 농성한 사람들이지만, 그런 생각을 완화할 정도가 되면 악수하고 의례적인 절차를 거쳐서 해결됐다. 시행사나 시공사, 지주가 약간의 손해를 봤지만, 국가는 어느 쪽도 손들어주지 않았다.

지난 수년간 세입자들도 그렇게 이익 분배에 참여했으니까 (용산) 농성자들도 별일 없을 거라 생각하고, 전국철거민연합이 망루를 지은 거다. 그런데 (경찰이) 들어와서 밟아버렸다. 이명박 정부도 과거에 어떻게 했는지 잘 안 살폈고. 농성자도 이렇게 들어올 줄 몰랐다. 볼트 좀 던지고 화염병도 해가 안 될 정도로 던지면 “야야, 대화하자” 그럴 줄 알았던 거다. 민주정부 10년 동안 관행적 의식으로 굳어진 측면이 있는데, 국가가 정의의 실현자처럼 “떼법” “도시 게릴라” 운운하면서 밀어버렸다. 현명하지 않은 개입 시점과 방식 때문에 문제가 커진 거다. 더구나 우리의 정의 관념 중엔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아무리 심해도 죽이면 되나. ‘먹고사니즘’만큼 중요한 게 어딨나” 하는 게 있다. 그런데 국가가 권위를 내세우고 시민 위에 군림하는 방식을 택했다. 조문하거나 성금을 보낸 사람은 소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가슴 아파하고, 죄책감과 참혹함을 느끼고, 사회정의가 짓밟힌다는 느낌을 받는 거다.

<b>유시민: </b> ‘내가 가진 정의의 관념과 관련해 국가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 ‘누군가 정의의 원칙을 무너뜨릴 때 국가가 방관하느냐’ ‘국가가 정의를 훼손하는 일을 만들어내고 있느냐’는 의문이 크게 제기되고 있다. 
  <b>박형준: </b>경쟁이 꼭 공정한 결과를 보증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정부와 국가에 대한 요구도 제기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딜레마가 있다. 정부가 이를 해결할 만한 충분한 정책 수단이나 자본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거다.

유시민: ‘내가 가진 정의의 관념과 관련해 국가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 ‘누군가 정의의 원칙을 무너뜨릴 때 국가가 방관하느냐’ ‘국가가 정의를 훼손하는 일을 만들어내고 있느냐’는 의문이 크게 제기되고 있다. 박형준: 경쟁이 꼭 공정한 결과를 보증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정부와 국가에 대한 요구도 제기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딜레마가 있다. 정부가 이를 해결할 만한 충분한 정책 수단이나 자본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거다.

 

대·중소기업 문제, 어떤 정치가 필요한가

용산 사건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그 과정에 대한 책임은 공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국가는 많은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려고 존재한다. 사회적 피해자를 보듬는 기능도 하지만, (피해자의 요구가) 과도하게 표출돼 모두가 누려야 할 권리를 침해하면 국가가 개입할 정당성을 갖는다. 공권력은 탄압이 아니라 공평함을 추구하는 수단이다. 정당한 법질서를 지키는 건 정의 관념에 배치되는 게 아니다.

정의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정의롭다고 말하기 어려운 방법을 쓰는 건 어떻게 봐야 할까? 중소기업이 혁신을 해서 생산 단가를 낮추면 대기업은 장부를 빼앗아가서 조사한 뒤 낮아진 생산 단가만큼 납품 단가를 낮춰버린다. 이런 대기업을 특별 세무조사하면 어떨까? 참여정부 관련 기업을 세무조사한 것처럼 국세청이 장부를 요구하면 대기업은 “왜 이러냐”고 물을 거다. 그럼 “이 회사가 협력업체를 착취한다고 해서 대통령이 화가 났다”고 하는 거다. 직권남용 등의 의혹은 받을 수 있겠지만, 기업의 이익이 굴지의 기업에서 3차 협력업체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낙수효과(트리클다운)를 극단적으로 위축시키는 지금의 현상은 막을 수 있다.

권력기관을 활용해 정의를 실현하는 건 정당한 절차를 해치는 거다. 때론 권력을 유지·강화하기 위해 권력기관을 활용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대기업·중소기업 문제는 정의뿐만 아니라 경제발전에도 심각한 문제다. 혁신하는 중소기업을 키울 수 있느냐는 대기업의 이익도 걸린 문제다. (중소기업 압박은) 장기적 미래 이익에 꼭 좋지 않다는 게 진리고, 대기업을 그에 맞게끔 유도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공정거래법 개정 등을 적극 논의할 필요가 있다.

국가와 시장은 화합하는 관계가 아니다. 접점을 찾는 과정이다. 정의 문제가 제기됐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양극화와 자본주의 위기를 해소할 수 있나. 정당한 절차를 얘기하는 건 이 때문이다. 문제를 의식하고 (그 해결을 위한) 새로운 합의의 토대를 만들어내는 과정으로서 민주주의든 거버넌스든 다원적 참여민주주의든 동원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문제를 제기하는 게 그런 방식이고, 바로 그게 정치다. 정치의 새로운 역할이 필요하다. 사회적 영역에서 정의가 관여되는 문제를 정치적 층위에서 조정·합의해야 한다.

사회 지금까지 논의한 주제는 다소 단기적인 성격을 띤다. 그런데 정의라고 할 때 계급 세습과 부자 증세가 가장 먼저 와닿는 문제고, 이와 관련된 교육과 복지는 장기적·구조적 문제다.

공동체가 해야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건 기회의 공정성 보장이다. 이 시대는 개인이 스스로 삶을 관리하라는 책임을 과거보다 훨씬 많이 부여하는 사회다. 하지만 그걸 둘러싼 위험이 워낙 많기 때문에 정부는 그 위험을 제어하고, 개인이 자기를 실현하고 행복을 추구할 기회를 가지도록 지원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개인의 삶을 지원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교육이다. 평생교육 개념으로 삶의 매 국면에서 새로운 도전이 필요할 때 교육의 기회를 줘야 한다.

두 번째로 중요한 건 복지다. 취약계층 지원에 머무르지 말고, 삶의 질을 개선할 새로운 지원 체제가 필요하다. 즉, ‘신공공영역’을 발굴해야 한다. 소득이 적어도 이 사회에서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동네마다 있는 스포츠 동호회 조직들을 통해 갈수록 중요해지는 건강 문제를 지원할 수 있다. 자기실현과 관련해 윤리적 차원의 자원봉사든, 심미적 차원의 운동이든 새로운 공공영역으로 포착하고, 이를 시민이 그냥 이용할 수 있게 하면 ‘행복할 기회’가 더 많아질 거다.

사회 교육 문제에서는 출발선이 동일한지가 정의다. 신공공영역 발굴도 중요하지만 복지에선 증세가 더 예민하고 원초적인 정의의 문제다.

노동시장에서 스스로 생계를 해결 못하는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재원을 공동체에 요구할 권리가 있는가.

이미 역사적으로 인정됐다.

어디까지 보장해야 하는가. 그게 최저생계비나 기초생활보장제도와 관련된 문제다. 이게 충분치 않다는 공감대가 있다.

누진세가 정의롭다는 데는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만, 돈 있는 사람들은 세금을 안 내려고 “(복지가 확충될수록) 근로 의욕이 줄어들어 공동체 전체의 부가 적어지고, 결국 가난한 사람에게 해가 된다”는 논리를 편다. 전체 국세 수입 중에 누진세는 25%가 안 된다.

단순히 없는 사람을 돌봐줘야 한다는 게 아니라, 재능을 발견하기 위한 투자로 생각해서 거기에 돈 쓰는 걸 아까워하지 않는 게 정의에 부합하는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재정 구조에선 교육·복지를 합쳐도 전체 예산의 50%가 안 된다. 나머진 일반 행정, 4대강 같은 토목사업, 기업 지원, 국방이다. 교육·복지 예산이 60%를 넘지 못하면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갑자기 증세하면 조세 저항에 부닥칠 것이 틀림없다. 복지 재정은 (고령화 때문에) 재정 수요가 계속 늘어나기 때문에 현재 추세 그대로 놔둬도 35%까지 간다. 거기에 (예산을) 더 얹으려면 증세를 해야 한다. 그럼 누진세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적으로 당장 되기는 어려울 거다.

교육도 평준화의 역설이 있다. 난 평준화를 반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고등학교까지 평준화해놓고 대학은 완전 서열화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단일경쟁 체제로 대학입시를 하다 보니 나온 기형적인 결과가 강남은 일류대, 나머지는 하위권이라는 거다. 격차는 점점 벌어진다. 입시제도를 다원화해 대학이 자율성을 갖고 학생을 뽑도록 해야 한다. 지금 대학 진학률이 85% 가까이 된다. 기업도 (대졸) 신입사원을 뽑는 방식을 학력이 아니라 적성·재능·다양성을 검토하는 쪽으로 바꿔야 한다. 정부는 이런 것 때문에 입학사정관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간 건데, 이것조차 사교육 시장에 휘둘리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초기엔 좀 안 먹히더라도, 시간을 갖고 일관성 있게 가야 기회의 공정성을 실현할 수 있다.

 

개인과 국가의 책임이 균형 이뤄야

복지는 많이 해야 정의다. 그런데 보건정책의 경우, 우리의 정의는 몸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거다.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은 건강보험료와 국고 보조금을 올려서 보장률을 90%로 하자고 하는데, 정의로운 건강정책은 사람이 병원에 안 가도 되도록, 평소에 건강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건강하게 만드는 덴 돈을 안 쓰면서 정신적·육체적·정서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무제한으로 치료하자는 게 진보의 목소리라는 걸 믿을 수 없다.

모든 일의 주체는 개인이다. 나는 자유주의자다. 개인이 아이를 키우고 인지적 능력을 키우는 걸 스스로 주체가 돼 선택할 수 있게 하되 국가가 여기에 투자를 하자는 게 정의다. 자구 지원을 하자는 거다. 하지만 개인의 책임과 국가의 책무 사이엔 균형이 있어야 한다.

정부가 개인의 자아실현을 지원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앞에서 신공공영역을 얘기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개인이 자아를 실현하는 데 위험에 노출되고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은 정부가 시장·기업·시민사회와 협력해 도와야 한다. 진보·보수를 떠나 21세기에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유다. 개인이 자신을 존중하고, 자아를 실현하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지원하는 공동체를 활성화하는 것이 진보다. 그런 점에서 정의도 개인과 국가의 책임이 균형을 이루는 방식으로 실현돼야 한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정리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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