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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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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준·이영호, 공기업 단협에도 개입

불법 사찰·인사 개입 이어 노조 탄압 주도 의혹…
노사관계 회의 열어 사 쪽의 강경 대응 주문한 사실 드러나
등록 2010-07-23 21:38 수정 2020-05-03 04:26

각각 ‘왕 차관’과 ‘왕 비서관’으로 불린 ‘박영준·이영호’ 라인의 역할은 어디까지였을까? 박영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과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이 민간인 불법 사찰 의혹에 이어 이른바 ‘메리어트 모임’을 통해 정부·공기업 인사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가운데, 이번에는 두 사람이 현 정권의 노동정책 강경 드라이브를 주도해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노동연구원 시작으로 잇따른 단협 해지

박영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

박영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

특히 한국가스공사 등 공공기관이 노조와 맺은 단체협약(단협)을 일방적으로 해지하는 과정에 박영준·이영호 두 사람이 개입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확인됐다. 민간인 사찰, 공기업 인사 개입 의혹에 이어 두 사람에게 ‘노동 탄압’ 의혹이 덧붙여진 셈이다. 노동계와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공공기관 노조에 본격적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2009년 2월이었다. 박기성 당시 한국노동연구원 원장이 노조에 단협을 해지하겠다고 통보했다. 단협이란 노조와 사용자(혹은 사용자 단체)가 근로조건이나 노조 활동에 필요한 사항을 협정으로 체결한 자치적 노동법규다. 현행 노조법은 협약 당사자 가운데 한쪽이 이를 해지하려면 상대방에게 6개월 전에 통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박 원장의 단협 해지 통보가 그 자체로 크게 잘못된 것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노조는 기존 단협의 효력이 사라지기 전 새 단협을 체결하기 위해 6개월의 유예기간 동안 꾸준히 교섭을 요청했지만 박 원장은 협상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뒤늦게 노무사를 협상 대리인으로 내세운 연구원 쪽은 ‘회사 규정’에 가까운 무리한 단협안을 내놓았다. 도저히 합의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노사 양쪽은 결국 2009년 하반기 85일간의 파업과 직장폐쇄로 맞섰다.

이상호 한국노동연구원 노조지부장은 “당시 정부가 ‘공공부문 노사관계 선진화’라는 명목으로 단협 해지를 밀어붙이며 한국노동연구원을 시범 케이스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박기성 원장이 직접 우리에게 ‘단협을 해지했다고 하니까 청와대에서 잘했다는 칭찬이 내려왔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한국노동연구원 단협 해지의 배후로 사실상 ‘청와대’가 지목된 것은 충분히 의미심장한 대목이었다. 노사 자율교섭이 원칙인 단협 과정에 정부가 지침을 내리거나 개입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전에는 정부가 단협 개입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나 2009년 2월 한국노동연구원의 단협 해지 사태가 터질 때까지만 해도 노동계는 한국노동연구원 사태를 개별적 상황으로 인식했다. 당연히 문제의식이 크지 않았다. 이어 5월 한국해양수산개발원, 그리고 6월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서도 단협 해지 사태가 빚어졌다. 급기야 7월9일 공공부문 사업장 가운데 비교적 규모가 큰 편에 속하는 예금보험공사 노조에도 단협 해지 통고가 날아왔다.

지난해 7월14일 한국노동연구원 복도에서 파업 농성 중인 노조원들을 지나치는 박기성 원정(왼쪽). 한국노동연구원을 시작으로 공공기관의 단협 해지가 이어졌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지난해 7월14일 한국노동연구원 복도에서 파업 농성 중인 노조원들을 지나치는 박기성 원정(왼쪽). 한국노동연구원을 시작으로 공공기관의 단협 해지가 이어졌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가스공사 사장 “정부 쪽에서 다른 생각을”

단협 해지라는 폭탄을 연이어 얻어맞은 노동계는 당황했다. 폭탄이 어디서 다시 터질지 몰랐고, 어디서 날아오고 있는지도 몰랐다. ‘공공기업 선진화’를 밀어붙이는 정부가 공공기관 노조 무력화를 노리는 것으로 짐작할 따름이었다. 단협 해지 상태에서 6개월이 지나면 노조 사무실 사용, 전임자 임금 지급, 근무시간 중 노조 활동, 사내 게시판 이용 등이 대부분 금지된다. 단협 해지는 곧 ‘노조 와해’와 마찬가지였다.

일방적 단협 해지라는 방식의 노조 탄압 논란에 박영준·이영호 두 사람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최근이었다. 진원지는 한국가스공사였다.

한국가스공사도 공공기관 단협 해지의 찬바람을 피해가지 못했다. 한국가스공사 노사 간 단협이 처음부터 삐걱댔던 것은 아니다. 2009년 상반기부터 노사 교섭이 진행됐다. 그러다 2009년 11월11일 공사 쪽이 단협 해지를 통보했지만, 교섭은 계속 이어져 지난 3월 말 쟁점 사안에 대한 견해 차이를 거의 좁혀 합의에 이르렀다. 예정대로라면 단협은 올 4월30일 공식 타결됐어야 한다. 그런데 노조와의 협상에 나름의 성의를 보인 주강수 한국가스공사 사장이 자꾸만 말을 바꿨다. 핑계는 ‘정부’ 탓이었다. 노조가 확보한 공사 쪽의 ‘단체협약 개정 관련, 정부 실무협의 결과’ 자료를 보면 정부 입장은 이랬다. “단체협약 체결은 해지 목적에 맞게 제대로 개선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므로 단체협약 해지 효력 발생(’10. 5.12.) 이후 근본적인 개선이 이루어질 때 타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임.” 지식경제부 에너지산업정책관실에서 이뤄진 정부 협의 결과, 명백히 정부가 한국가스공사 단협의 내용과 시점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내린 것이다.

한국가스공사가 공개한 5월3일 노사 본교섭 녹취록은 정부 개입을 더 분명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노조를 상대로 한 주강수 사장의 발언이다. “우리(노사)끼리 합의한 건 사인을 한 거지. 그 방향으로 나가려 했는데 그 약속이라는 게 두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해. 지키고자 하는 의사와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그런 능력이 있느냐가 의문이다. 내 생각에는 그쯤 했으면 여러분(노조)이 많은 협조를 해주셨고 정부 쪽에서도 이해해줄까 생각했는데 정부가 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이거야.” 주 사장은 또 “나는 이것이 우리의 합의 사항임을 부인하지 않는다”며 “우리는 우리대로 정부를 더 설득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화물연대 파업에서 노조 쪽은 “청와대에서 협상을 계속 비튼다”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6월10일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열린 화물연대의 기자회견. 한겨레 김종수 기자

지난해 화물연대 파업에서 노조 쪽은 “청와대에서 협상을 계속 비튼다”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6월10일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열린 화물연대의 기자회견. 한겨레 김종수 기자

박영준 주재 회의 “적극적 대처 당부”

주 사장이 의식한 ‘정부’의 실체는 단순히 지식경제부 수준이 아니었다. 민정태 한국가스공사노조 사무처장은 “노사 협의 과정에서 주 사장이 ‘4월26~28일 사이 청와대 (이영호) 고용노사비서관을 만났는데, 거기서 제동이 걸렸다. 소관부처인 지식경제부도 청와대 눈치 때문에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더라’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말했다.

한국가스공사노조가 확보한 박영준 국무차장 주재 회의 관련 문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사관계 주요 현안 보고’라는 제목의 문건을 보면 박 차장은 2009년 9월 자신이 주재한 노사관계 회의에서 “해당 기업에서 고소·고발하면 경찰에서는 적극적으로 대처 당부”라고 발언했다.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의 주문은 좀더 구체적이다. 문건을 보면, 이 전 비서관은 “철도공사는 적극적으로 노조 대응을 하고 있으나, 가스와 발전은 계획만 있지 실천은 없음”이라고 말한 뒤 “인사권, 경영권에서 양보하지 말고 원칙적으로 대처할 것”을 주문했다. 그는 “이면계약 등 노사 간의 이면 합의는 절대 용납 불가”라는 말도 덧붙였다.

물론 정부의 각종 현안을 총괄 지휘하고 차관급 회의를 운영하는 위치에 있는 박영준 국무차장이 공공기업 선진화 추진 작업을 지휘했다는 사실은 새로울 것이 없다. 이영호 당시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이 노사관계 회의를 주재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만 단협과 관련해 두 사람이 개별 공공기업에 구체적 지침을 내리는 행위는 월권 논란을 낳을 수밖에 없다.

특히 문건에는 당시 회의와 별도로 9월24일 ‘고용노사비서관 주재 BH(청와대) 회의’가 예정돼 있었다는 사실도 엿보인다. 주제는 ‘공무원노조, 가스·발전노조, MBC노조, 전교조 대응방안’이었다. 총리실과 노동부, 행정안전부, 교육과학기술부, 방송통신위원회 등 관계 부처 국장급 회의였다. 이영호 전 비서관 주재 정부 대책회의의 결과는 ‘강경 대응’이었다. 공무원노조와 전교조는 이후 이명박 정부의 노동 탄압의 상징이 됐고, MBC노조도 파업을 감수해야 했다. 가스·발전노조는 단협 해지 사태를 맞았다. 이 전 비서관을 중심으로 논의한 대응방안이 어떤 것이었는지 뻔히 예상되는 대목이다.

한국노총 출신 김성태 한나라당 의원은 “(단협 해지 과정에서) 청와대나 기획재정부가 지침을 내려 공기업을 압박하고 강요했다는 구체적 팩트는 없지만, MB 정부가 공공부문 노사관계 선진화라는 미명 아래 너무 일방적으로 단협 해지를 주도하고 기존 노사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박영준·이영호 두 사람이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을 직접 지휘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강경 대응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다 보니 파국으로 끝난 노사분규 현장에는 어김없이 두 사람의 이름이 남았다. 대표적 사례가 지난해 화물연대 파업이었다.

“화물연대 파업 때도 청와대가 협상 비틀어”

화물연대는 2009년 5월16일 조합원 총회에서 파업을 결의했다. 이날 경찰과 화물연대 사이에 충돌이 빚어져 조합원 457명이 연행됐다. 노사 간 교섭 조정을 담당한 이근원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조직팀장은 “협상 주체는 대한통운·화물연대였지만, 통상 노사 간 쟁점이 첨예하게 맞붙는 상황에서는 정부 유관 부처와 경찰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채널을 통한 막후 협상을 시도하게 된다”며 “대개 일정 수준까지 양보하면 되겠다 싶은 상황이 있는데, 2009년 화물연대 협상 때는 수차례 타결 직전까지 갔던 협상이 ‘청와대에서 계속 비튼다’는 이야기가 나와 결렬되곤 했다”고 말했다. 이 팀장은 “교섭이 난항에 부딪힐 때면 협상 당사자끼리는 서로 가진 걸 다 내놓고 머리를 맞대는데, 그때 ‘청와대에 있는 한국노총 출신 강경파’ 때문에 안 된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고 말했다. 이영호 전 비서관을 가리킨다.

박영준·이영호 라인이 정부의 노동정책 강경 드라이브를 주도한 사실은 민간인 사찰 의혹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찰 대상 가운데 한 사람인 배정근 공공노동조합연맹 위원장은 한국노총 안에서 정부의 공공기관 선진화 방안에 가장 반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2009년 11월4일에 민주노총과 함께 ‘기만적 공공기관 선진화 정책 저지를 위한 공동기자회견’을 여는 등 박영준·이영호 두 사람에게는 불편한 존재였다. 국무총리실 소속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배 위원장을 미행한 사실이 드러난 뒤 “배 위원장은 국민건강보험공단 과장급 직원으로 신분은 공공기관 직원”이었기 때문에 “합법적 감찰 대상”이었다고 밝힌 총리실 해명은 그래서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문제는 ‘노조’였던 것이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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