낳으라고만 하지 않고 키워줄 때까지 출산파업 포에버!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그동안 ‘출산파업’이란 용어는 사회·경제적 이유로 아이 낳기를 꺼리는 세태를 일컫는 레토릭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개적으로 “아이를 낳지 않겠다”며 집단행동에 나섰다. 진정한 ‘파업’이다. 왜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것일까? 출산파업 참가자 가운데 10명을 골라 이유를 물었다. ‘파업 해산’에 도움이 될 만한 스웨덴과 프랑스의 출산·육아 제도도 함께 소개한다. 편집자
전업주부 김은경(37)씨는 3살짜리 아들을 키운다. 남편은 고민했지만 김씨는 주저하지 않았다. 아이를 꼭 낳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의 탄생은 새로운 지출의 탄생이기도 했다. 산후조리원에서 2주를 지내는 데 200만원이 들었다. 젖마사지를 받는 것만 30만원이었다. 예방접종에 연간 100만원씩 쓴다. 일반 병원에 가면 비싸고, 보건소에 가면 사람이 너무 많다. 한 번 접종에 10만원이 넘는 예방주사들이 있다. 그럴 때 접종을 포기하는 엄마는 세상에 없다.
아무리 비싸도 예방주사는 아이의 끼니가 될 수 없다. 분유 한 통에 2만원. 한 달이면 8만원이다. 기저귀값도 10만원씩 든다. 먹고 싸고 건강하게 자라는 데 필요한 기초를 위해 월 30만~40만원을 쓴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김씨는 앞으로 닥칠 교육비도 걱정이다. 그 고단함은 3살배기의 탓이 아니다. 그러나 아이는 당분간 동생을 갖지 못할 것이다. 김씨는 “육아 문제가 국가 정책의 1순위가 되지 않는 한 둘째를 낳지 않겠다”며 출산파업 선언에 서명했다.
1994년 유엔은 ‘인구와 개발에 관한 국제회의’를 열어 다음의 선언을 채택했다. “양성평등과 형평성을 진작하고 여성에게 권리를 부여하며… 여성 스스로가 출산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인구 및 개발 관련 정책의 초석이다.” 한국에서 여성은 ‘스스로 출산을 통제’하지 못한다. 김씨는 아이를 기르고 싶어 직장까지 그만뒀지만, 추가 출산은 포기했다. 한국 사회가 그 꿈을 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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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비를 해결하려고 한국의 부부는 맞벌이를 한다. 결혼 13년차인 남지연(40)씨는 작은 다이어트 클리닉을 운영한다. 남편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다. 10년 전, 딸을 낳았다. 아이가 6개월이 되자 과외로 부업을 시작했다. 두 돌이 되자 가게를 열었다. 생활비의 25%가 아이한테 들어갔다.
아이를 키우려고 일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그 일이 아이를 낳는 데 걸림돌이 된다. 결혼할 때 젊은 부부는 “아이 두 명은 낳자”고 장밋빛 약속을 나눴다. 이젠 옛날 이야기다. 딸아이가 우두커니 혼자 있을 때, 남씨는 동생을 낳아볼까 잠시 생각한다. 그러나 딸아이가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잠들었을 때, 남씨는 생각을 고쳐먹는다. 동생을 낳으면 또 돈이 필요할 것이다. 남씨는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아이는 사랑을 받으며 자랄 마땅한 공간이 없어 외로워할 것이다. 남씨는 “제대로 된 교육환경과 보육시설이 없는 한 출산하지 않겠다”며 출산파업 선언에 서명했다.
☞ 김씨와 남씨가 스웨덴에서 아이를 낳았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생후 1개월부터 18살이 될 때까지 국영보험회사에서 부모에게 양육비를 지급한다. 소득이 낮을수록 많이 받는다. 한 아이당 최고 월 1050크로나(약 17만원)를 받을 수 있다. 한국인의 정서로 보아 17만원은 적은 액수 같지만, 아래에서 살펴보게 되듯 보육·교육이 완전 무상에 가까운 스웨덴에서 이 정도의 지원금은 충분히 제 기능을 한다. 아이를 낳을수록 지급액은 더 늘어난다. 스웨덴에선 출산이 곧 가구 소득을 높이는 방법인 셈이다. 양육비 지원은 아이가 16살이 될 때까지 조건 없이 이뤄지고, 이후 2년 동안은 학교에 다니거나 장애가 있는 경우 계속 유지된다. 사실상 아이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양육비를 받는 것이다. 스웨덴과 함께 출산·육아 정책의 모범으로 꼽히는 프랑스는 1984년부터 아동양육수당 제도를 도입했다. 아이를 낳고 직장을 쉬면 아이가 18살이 될 때까지 정규 임금의 85%에 이르는 수당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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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세계 각국의 합계출산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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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무대책은 남녀 분리 정책”
새벽 5시40분, 부부가 일어난다. 남편의 직장은 경기 수원이다. 새벽 6시20분이면 서울 집을 나선다. 뒤이어 아내도 일터로 간다. 남편은 밤 11시가 넘어야 집에 돌아온다. 토요일에도 출근한다. 부부는 일요일이 되어야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서로 얼굴을 본다. 결혼 6년차 정미경(44·가명)씨는 그런 남편이 안쓰럽다. 그러나 그런 남편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다.
정씨는 “남편의 직장이 바뀌지 않는 한 출산하지 않겠다”며 출산파업 선언에 동참했다. 지금 상태라면 육아는 고스란히 정씨의 몫이 될 것이다. 공교육 체계가 무너지면서 엄마들이 떠안은 부담은 더 커졌는데, 아빠들은 여전히 강도 높은 노동에 붙들려 있다. 아이를 낳으면 정씨가 직장을 그만둬야 할 텐데, 그러면 “부부의 노후 대책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정씨는 생각한다. 그 생각에 남편도 동의했다.
미혼 직장인 채리미영(36)씨도 비슷한 결심을 굳혔다. 아이를 지방의 부모에게 맡기고 엄마는 서울의 직장에 다니면서 생이별을 하는 경우를 그는 수없이 봤다. 결혼해서 아이 낳고 직장 다니는 여자 가운데 행복한 ‘워킹맘’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울면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 비극”을 목격하면서 채리씨는 출산 없는 결혼을 꿈꾸게 됐다. “좋은 사람 있으면 결혼은 하겠지만, 출산 계획은 아예 없고 그 문제에 동의하지 않는 남자와는 아예 연애를 하지 않는다”고 채리씨는 말했다.
그는 출산·육아에 대한 한국의 ‘무대책’이 “남녀 분리 정책 같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애를 낳아 집에 있고, 남자는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성 역할론’을 사실상 나라가 앞장서 전파하고 있다는 것이다. 채리씨는 특히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만이 많다. 그가 보기에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는 여성 배려가 늘었지만 이명박 정부에서는 “아무것도 없다”. 현 정부에 대한 30대 여성의 지지율이 낮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채리씨는 “이명박 정부 아래서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며 출산파업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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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문제 전문가인 필립 롱맨 뉴아메리카재단 선임연구원은 이런 현실이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가족을 형성하는 비용, 책임 있는 부모가 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경제적 힘 앞에서 개인은 무력하다. 이것은 도덕의 붕괴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다.”
스웨덴의 한 여성이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공원을 산책하고 있다. 1950년대 이후 스웨덴은 출산·육아·교육에 걸친 사회복지제도를 꾸준히 강화해왔다. <한겨레21> 조혜정 기자
스웨덴은 1974년부터 부모가 함께 육아휴가를 나눠 쓰는 제도를 도입했다. 육아휴가는 ‘정규 휴가’와 ‘임시 휴가’로 구분된다. 정규 휴가는 모두 16개월인데, 이 가운데는 아버지 몫의 2개월 휴가가 포함돼 있다. ‘아버지 휴가’는 쓰지 않으면 사라진다. 따라서 국가가 ‘반강제로’ 아버지를 두 달 이상 쉬게 하는 셈이다. 2005년 기준으로 스웨덴 아버지의 75%가 두 달짜리 ‘아버지 휴가’를 사용했다.
나머지 14개월은 부부가 번갈아 나눠 쓸 수 있다. ‘정규 휴가’는 아이가 8살이 될 때까지 분할해 사용할 수 있다. 시간 단위로 나눠 쓸 수도 있다. 정규 퇴근 시간이 오후 6시라면, 육아휴가를 이용해 더 일찍 퇴근할 수 있는 것이다. 2008년부터 ‘성평등 보너스 제도’도 도입됐다. 16개월의 육아휴가를 부모가 8개월씩 평등하게 나눠 사용하면 그 기간 동안 월 3천크로나(약 48만원)를 국영보험회사에서 추가로 지급한다.
‘임시 육아휴가’는 ‘정규 휴가’와 별도로 아이가 12살이 될 때까지 매년 60일 동안 유급휴가를 사용하는 제도다. 이 권리는 부모 대신 아이를 돌보는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도 있다. 예컨대 할아버지가 ‘임시 휴가’를 사용해 손녀를 돌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육아휴가 기간에는 ‘부모 수당’이 국영보험회사에서 지급된다. 390일 동안은 정규 임금의 80%가 나온다. 나머지 90일은 월급에 상관없이 월 5400크로나(약 86만원)가 지급된다.
스웨덴은 세계에서 남성 가사노동이 가장 많은 나라 중 하나다. 6살 이하의 아이를 둔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스웨덴의 경우 3시간 21분(2004년 유로통계)으로, 한국 남자들이 집안일에 쓰는 시간 32분(2007년 통계청)의 6배가 넘는다.
‘출산파업’도 계층에 따라 처지가 다르다. 안정적 수입이 없거나 최저생계비 수준의 돈을 버는 경우, 출산·양육은 더욱 벅찬 짐이 된다. 9개월 딸을 둔 임정규(33)씨는 “안전한 보육 환경을 정부가 제공하기 전에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며 출산파업에 참여했다. 그는 집에서 일을 할 때 보이는 곳에 아이를 두기 위해 의자 옆에 잠시 묶어둔다. 혹시 아이가 다치는 일이 생길까 언제나 걱정이다. 부모님은 가까이 살지 않는다. 갓난아기를 믿고 맡길 어린이집도 없다.
그런 어린이집이 있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한 달에 50만원을 보육료로 내야 하는데 형편이 빠듯하다. 임씨는 100만원이 채 안 되는 월급을 받는다. 화물차를 모는 남편은 한참 동안 돈벌이가 없다. 혹시 혜택이 있을까 동사무소를 찾아가도 “조건이 안 된다”는 답변만 돌아온다. “돈 내라는 정보는 알려주면서 돈 주는 정보는 미리 안내해주지 않는” 행정기관의 관성이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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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 뒤 자녀를 돌봤거나 돌볼 사람
극빈과 중산층 사이, 사각지대
기초생활보장을 받는 극빈계층은 아니지만 형편이 넉넉한 중산층도 아닌 임씨는 스스로를 “사각지대에 놓인 계층”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정부는 그런 서민에게 별 관심이 없다. 임씨는 “무상교육·무상의료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육아를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태경(40)씨 가족은 정부 지원금을 받는 ‘차상위계층’이다. 남편의 벌이는 일정치 않다. 이씨는 공동육아시설의 보육교사를 하면서 1년에 1800만~1900만원을 번다. 보증금 500만원, 월세 35만원짜리 집에 살고 있다. 8년 전 아들을 낳을 때만 해도 “셋 이상 낳자”고 가족계획을 세웠다. 세상을 너무 낙관했다. 이씨는 “가난으로 인해 꿈을 껴안을지 버릴지 선택해야 할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공동육아 교사 일이 마음에 들지만, 현재의 낮은 임금으론 아들의 양육비를 감당할 수 없다. 아들은 지난 3월2일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앞으로가 더욱 걱정이다.
☞ 스웨덴은 세계 최고 수준의 공적 보육시설을 갖추고 있다. 임씨와 이씨가 스웨덴에서 태어났다면 아무 걱정 없이 아이들을 보육시설에 맡길 수 있었을 것이다. 스웨덴의 공립 유치원은 수요에 100% 맞춰 증설된다. 필요한 만큼 국가가 반드시 공립 유치원을 짓는 것이다. 심지어 전통적인 여름휴가(3주) 기간에도 아이를 맡기려는 가정이 있다면, 해당 유치원이 아이를 직접 돌보거나 가까운 다른 유치원을 연결해줘야 한다. 따라서 한 지역에 있는 유치원은 한꺼번에 쉴 수 없다. 모든 국민이 쉬는 동안에도 ‘아이 한 명을 위해’ 스웨덴의 유치원은 여름휴가를 포기한다.
이 유치원은 한국의 탁아방·놀이방 등을 아우른다. 스웨덴에서는 아이가 1살이 되면 유치원에 보낼 수 있다. 아침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된다. 비용은 부모의 소득수준에 따라 다르게 매겨진다. 그래도 총소득의 3%를 넘지 않는다. 스웨덴 정부는 2002년 ‘보육시설이용요금 상한제’를 도입했다. 첫째아이는 총가족 소득의 3%, 둘째아이는 2%, 셋째아이는 1% 이내에서 보육시설 이용료를 내도록 못박은 것이다. 넷째부터는 완전히 무료다.
스웨덴의 2살 미만 아동 가운데 이같은 공립 유치원에 맡겨진 비율은 65%(2002년)에 이른다. 16개월에 이르는 부모 육아휴가 기간에 가정에서 아이를 직접 돌보는 경우를 제외한 모든 어린이가 갓난아기 시절부터 공적 보육시설에 의해 돌봄 서비스를 받고 있는 것이다. 스웨덴에도 민간 보육시설은 있다. 전체 보육시설의 17%(2007년 기준)가 민간이 운영한다. 그런데 민간 시설의 절반은 부모들이 스스로 조직한 ‘공동육아’다. 유치원 시절이 끝나도 걱정할 일은 별로 없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정규 수업 뒤 오후 6시까지 방과 후 탁아소를 운영한다. 모든 프로그램은 무료이며, 해당 학교의 교사·임시교사·학부모 등이 운영에 참가한다.
프랑스는 공적 보육시설과 민간 보육시설의 비중이 비슷하다. 어느 곳을 선택하건 정부가 지원한다. 중산층이 주로 이용하는 공적보육시설의 경우, 3~6살 아동은 비용 전액을, 3살 미만은 비용의 50%를 국가가 지원한다. 프랑스의 3~6살 아동의 88% 정도가 공적 보육시설을 이용하고 있다. 집에서 보모를 불러 아이를 맡기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가정보육수당’을 지급한다. 보모에게 주는 임금에 대해 부모의 세금을 환급해주는 방식이다. 민간 보육시설 교사의 사회보험기금도 지원한다. 민간 보육시설에 내야 하는 부모의 비용 부담을 줄이는 효과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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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0년간 한국의 출생아/한국의 합계출산율 추이
스웨덴도 1960년대엔 여성 노동시장 참여율 50%
오직 아이를 낳기 위해 여성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당연히 자기실현의 욕구가 있다.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출산장려 정책’은 허구다. 미혼 직장인 오세은(26)씨는 외국계 회사에 다닌다. 취업한 지 1년이 조금 넘은 오씨는 한창 일의 재미에 빠져 있다. “나중에 진작 아이를 낳을걸 하고 후회할지언정, 지금은 내 인생을 희생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출산을 강요하는 듯한 사회 분위기도 마뜩지 않다. 출산파업 선언에 참여한 이유다.
지난 2월 대학을 졸업한 김영지(26)씨는 현재 일자리가 없는 상태다. 김씨는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를 낳을 수 없고, 일하다 출산하면 경력까지 단절된다”며 출산파업에 참여했다. 김씨 역시 결혼·출산 등에 연연하기보다 “내 자신이 행복을 느끼면서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대학생 김아름(24)씨는 “결혼하게 되면 두 명의 아이를 낳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김씨는 다섯 명의 남매 틈에서 자랐다. 김씨는 형제가 많아 좋았다. 자신의 아이들도 그런 즐거움을 만끽한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더 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졸업을 유예했다. ‘워킹맘’의 길을 걷기 전에 먼저 ‘워킹’부터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김씨는 “일하면서 아이를 기르는 여성들이 행복해지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며 출산파업을 선언했다.
스웨덴에선 ‘출산장려 정책’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현재 운용되고 있는 출산·육아 관련 사회 서비스의 출발은 ‘빈곤 정책’이었다. 1960년대 들어 사회보장제도만으로는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반성이 일었고, 그 대안으로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제시됐다. 빈곤 정책이 ‘양성평등 정책’으로 이어진 셈이다. 여성이 일을 하려면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고, 오늘날 제공되는 공적 보육시설, 유급 육아휴가 등의 골간이 이때부터 만들어졌다.
그 결과 스웨덴 여성의 노동시장 참가율은 1960년대 50%였다가 2000년대 이후 세계 최고 수준인 80%에 육박하게 됐다. 2003년 스웨덴 통계를 보면, 자녀를 둔 어머니 가운데 45.1%가 출산 뒤 복직했고, 유급휴가 중인 어머니가 26.8%였다. 두 경우를 합하면 자녀를 둔 여성 가운데 72%가 노동시장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회 풍토에서 미혼 여성·출산준비 여성 등의 노동시장 참여도 활발할 수밖에 없다.
특히 육아휴가 때 지급되는 수당은 휴가 직전 근무한 직장 임금을 기준으로 지급되므로, 스웨덴 여성은 출산하기 전에 일부러 일자리를 구한다. 출산을 이유로 해고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으므로, 출산을 꿈꾸는 스웨덴 여성일수록 구직에 더 적극적일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 여성의 노동시장 참가율은 50%에도 못 미친다. 스웨덴이 여성 경제활동 참여를 독려했던 1960년대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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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을 위해 필요한 사회적 지원/아기를 낳지 않는 이유
그러나 박미려(32·가명)씨는 아이를 바란다. 아이를 낳으면 지금보다 훨씬 기쁘고 힘날 것이라고 믿는다. 다만 나머지 생활이 모두 엉망이 될까봐 두렵다. 그는 장애인이다. 대학 입학 뒤 뇌질환을 겪고 다리를 절게 됐다. 오래 걷지 못하고 변비가 심하다. 임신·출산이 가능한지는 아직 병원 상담을 받아보지 않아 잘 모른다. 미혼인데다 현재 애인도 없는데 공연히 산부인과를 찾아가 그런 일을 물어보는 게 꺼림칙했다.
몇 년 전 잠시 사귄 애인이 있었는데 관계를 맺은 뒤 두 달 동안 생리가 없었다. 임신이 아닐까 걱정을 많이 했다. 박씨가 애인에게 말했다. “어떻게 아이를 지울 수가 있지?” “그럼 아이 낳고 찌질하게 살든지.” 박씨는 실망을 많이 했다. ‘찌질한’ 남자와도 헤어졌다. 결국 임신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그때의 경험은 강렬하다. 박씨에게 임신은 공포와 동경이 교차하는 일이다. 그는 자신의 몸이 출산과 일을 동시에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도 힘든데 장애 여성이 두 가지를 동시에 치르기는 더 힘들 것이다.
박씨는 “건강한 여성의 기준에 비춰봐도 출산·육아 지원책이 턱없이 부족한데, 하물며 장애 여성에게 임신·출산은 오르지 못할 나무와 같다”고 말했다. 그는 진정으로 국가의 지원 없이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 그런 일이 가능할 때까지 박씨는 불편한 다리를 인내하며 출산파업을 이어갈 것이다.
☞ 스웨덴은 ‘장애인의 천국’으로 불린다. 장애인 복지정책의 핵심은 장애인에게 일자리를 소개하고, 노동이 힘든 경우엔 연금 등을 지급해 비장애인과 아무 구분 없이 평생 지낼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스웨덴 여성은 임신 순간부터 출산에 이르기까지 무상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아이들도 18살이 될 때까지 보건소에서 정기 건강검진, 예방접종, 질병 치료 등을 무료로 제공받는다.
스웨덴은 불임도 적극 치료해야 하는 질병으로 취급한다. 시험관아기 시술에 따르는 비용도 무료다. 약간의 장애가 있는 박씨가 임신·출산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스웨덴에서라면 무상 의료 서비스를 통해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박씨가 장애 때문에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 힘들다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지난 2008년부터 스웨덴은 ‘가정양육수당’을 새로 도입했다. 육아휴직을 끝낸 부모가 직장에 복귀하지 않고 가정에 머무는 것을 선택할 때, 별도의 수당을 지급하는 제도다. 월 최고 3천크로나(약 48만원)까지 받을 수 있다.
안전한 임신·출산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무상 의료 서비스, 장애인에게 더욱 적극적인 취업 알선, 장애 정도에 따라 평생 지급되는 연금, 가정 육아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돕는 추가 수당까지 각종 사회 서비스 프로그램을 두루 갖춘 스웨덴 정부라면 박씨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다. 한국 정부가 그런 능력을 갖춰, 한국 여성들의 ‘출산파업’이 즐겁게 해산당하는 날이 과연 오기는 올까.
여성의 날 맞아 ‘출산파업’ 선언한 여성 10명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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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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