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폴리티컬 컴퍼스’ 조사에서 가장 ‘정직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진보 논객들이다. 자신의 진보적 이념 성향을 공공연하게 밝혔던 이들이 ‘자유주의 좌파’를 위해 마련된 왼쪽 구석 자리에 모였다. 김규항 발행인, 홍세화 기획위원, 진중권 문화평론가는 2000년 5월 격월간지 를 함께 발행한 적이 있다. “우리는 지식사회의 논쟁과 비판 문화를 개혁하는 ‘아웃사이더’로 자리매김하길 원한다”고 이들은 공언했다.
진보 논객, 가장 정직한 모습
이 ‘아웃사이더 3인방’은 특정 조직을 대표하기보다 제 이름을 내걸고 활동해왔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언론인·출판인·지식인 등으로 곧잘 소개되지만, 어떤 형태의 권위나 위계에도 속박당하지 않고 개인 저술·강연 등을 통해 사회 활동을 펼쳐온 이들의 삶이 이번 조사에서 잘 드러났다.
김규항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그는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과 함께 ‘좌-우’ 축의 왼쪽 끝 경계에 바싹 붙은 좌표를 나타냈다. ‘상-하’ 축에서 드러난 개인주의 성향은 권 의원보다 더 강하다. 50명의 응답자 가운데 ‘가장 좌파적’이다. 그가 쓴 저서의 제목이자 그의 별칭으로 굳어버린 ‘B급 좌파’는 기성 좌파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그래도 좌파로 남아 있겠다는 결기의 표현이다. ‘폴리티컬 컴퍼스’에 나타난 그의 좌표에도 그런 결기가 서려 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도 ‘아웃사이더 3인방’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유주의 좌파’가 됐다. 인권연대는 주로 검찰·경찰·국정원·군·교정기관 등의 인권침해를 감시한다. 권력기관의 피해자 개인에게 철저히 천착하는 것이 인권연대 활동의 특장이다. 권위로부터 멀고 개인과 가까운 오 사무국장의 좌표는 인권운동가의 ‘정위치’이기도 하다.
고은광순 ‘더불어행복한세상을여는여성모임’ 운영지기, 변영주 영화감독, 정혜신 마인드프리즘 대표 등이 거의 비슷한 지점에 모인 것도 흥미롭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여성 3인방’은 ‘아웃사이더 3인방’보다는 덜 급진적이지만, 시민운동 그룹 또는 경제학자 그룹보다는 자유주의 좌파의 성향이 더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좌표 근처에는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도 있어, 진보적 여성 인사들의 공통된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정우 경북대 교수, 이병천 강원대 교수, 김상조 한성대 교수 등은 ‘여성 3인방’과 비교할 때 덜 자유주의적이지만, 더 좌파적이다. 한국 진보 경제학계를 대표하는 이들은 분배와 정의를 중시하는 변형윤·조순 등에게서 경제학을 배웠다. 제도경제학, 케인스주의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정우 교수는 참여정부 초기 정책기획위원장을 지냈다. 이들의 좌표는 한국 진보 경제학계의 지향을 웅변한다.
이와 관련해 공병호 자유기업원 초대 소장, 좌승희 경기개발연구원장,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 안병직 시대정신 이사장 등 보수 성향의 경제학자 및 경제인의 좌표를 비교할 수 있다. 이들의 좌표는 ‘진보경제학자 3인방’에 견줘, 권위주의 및 우파에 가까운 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신조로 내걸고 있다. 공 소장과 좌 원장은 저술·강연 등을 통해 자유주의 시장경제 원리를 정력적으로 전파해왔다. 안 이사장이 이끄는 시대정신은 “국가 주도형 방식에서 시장 주도형 방식으로 경제 시스템을 전환해 선진 경제를 달성하는 것”을 활동 목표로 삼고 있다.
자유시장주의 공병호, 반공국가주의 서정갑그러나 ‘보수 경제인사 4인방’ 은 좌표에 나타난 다른 무리와 구분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다른 그룹에 비해 각 인사의 거리가 대단히 멀다. 공 소장과 좌 원장은 자유주의 우파, 김 회장은 권위주의 좌파 쪽에 자리잡았다. 안 이사장은 자유주의 좌파로 분류된 인사 가운데 가장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다. 이번 조사만으로 단정하긴 어렵지만, 우파 경제학자 내부의 이념적 편차가 적지 않음을 방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조사에서 서정갑 국민행동본부 대표는 권위주의 성향을 가장 많이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행동본부의 정식 명칭은 ‘친북좌익척결 국민행동본부’다. 서 대표는 베트남전에 참전해 대령으로 예편한 군인 출신이다. 시장주의를 강조하는 ‘뉴라이트’ 단체와 달리 주로 반북·반공의 기치를 강조해왔다.
강한 권위주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서 대표를 ‘권위주의 우파’로 평가할 수는 없어 보인다. 좌-우 축을 기준으로 보면 서 대표는 거의 중심에 자리했다. ‘폴리티컬 컴퍼스’에서 오른쪽으로 치우칠수록 시장자유주의, 왼쪽으로 갈수록 국가개입주의를 선호한다. 서 대표는 ‘국가-시장’의 관계에서 국가 개입주의에 끌리고 있는 모양새다. 공병호 소장이 ‘자유시장주의자’를 대표한다면, 서정갑 대표는 ‘반공국가주의’를 대표하는 셈이다.
이들 보수주의 시민사회 인사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또 다른 특징이 나타난다. 공병호 소장, 좌승희 소장, 서정갑 대표 등 ‘보수주의 3인방’은 정치인을 포함한 전체 52명의 조사자 가운데 가장 ‘돌출적’인 좌표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49명이 비교적 촘촘하게 하나의 군집을 이루고 있는데, 오직 세 사람만 오른쪽 위를 향해 한참 떨어져 있는 형국이다. 한국 이념 지형에서 이들의 사상이 대단히 특이한 지점에 서있음을 방증한다.
그 특이성은 보수 정치인과 비교했을 때 두드러진다. 진보·개혁 인사들의 경우, 안희정·박원순, 정동영·하승창, 문재인·오창익, 권영길·김규항 등 정치인과 시민운동가·지식인이 일정한 짝을 이루며 좌표를 형성하고 있다. 진보 진영 내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정치-학문-운동’ 분야가 비교적 일정한 통일성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 보수주의 사회인사들은 보수주의 정치인들과도 멀리 떨어져 있다. 정치인 가운데 권위주의 성향이 가장 강한 김문수 의원조차 서정갑 대표의 권위주의에는 한참 못 미친다. 상-하 축에서 ‘김문수-서정갑’의 간격은 ‘김문수-안희정’의 간격과 같다. 정치인 가운데 시장자유주의 성향이 가장 강한 박재완 청와대 수석과 공병호 소장의 거리는 그것보다 더 길다. 박 수석을 기준으로 공 소장까지의 거리만큼 왼쪽으로 옮겨가면 하승창 희망과연대 상임위원, 정동영 의원 등이 있다.
이런 현상은 보수 정치인들이 권위주의적·시장자유주의적 ‘속내’를 온전히 털어놓지 않은 데서 비롯했을 수 있지만,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한국의 보수주의 사회인사들이 보수 정치인조차 소화하기 벅찰 정도의 ‘우파적 이념 지향’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 경우 이번 조사에서 드러난 보수 진영 내부의 멀고 먼 간격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진보·보수 중간 지대에 박원순·윤여준‘촘촘한 진보’와 ‘성긴 보수’가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박원순 희망제작소 이사장과 윤여준 한국지방발전연구원 이사장이 있다. 윤 이사장은 박 이사장보다 권위주의 성향이 조금 더 강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두 사람의 좌표상 위치는 비교적 가깝다.
박 이사장의 왼쪽 아래편에는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을 역임한 김호기 연세대 교수, 하승창 희망과대안 상임위원 등 시민운동의 주요 인사들이 자리잡았다. 윤 이사장의 오른쪽 위에는 신혜식 대표,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등 보수 재야 인사들이 등장한다. 남 장관은 ‘합리적 보수’, 신 대표는 ‘젊은 보수’로 평가받아왔다.
이번 조사에 참가한 인사들만으로 판단할 때, 박원순 이사장과 윤여준 이사장은 한국의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중간 지대’에 위치하는 셈이다. 두 사람은 지난해 5월 가 마련한 특별좌담에 마주 앉은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이명박 정부의 경제결정주의, 소통 불능, 권위주의적 통치 등을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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