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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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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복지·대마초·사형이 성향을 갈랐다

62문항의 다양한 성격의 질문…
‘공익 침해 기업 처벌·어린이 인권·다문화’ 문항에선 좌표 관계없이 한목소리
등록 2010-03-05 07:11 수정 2020-05-02 19:26

이 ‘폴리티컬 컴퍼스’ 모델의 매력에 빠진 것은 풍부하고 다양한 설문 문항 때문이다. 전화 설문조사나 미리 녹음된 전화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ARS 방식의 조사는 보통 스무 문항 정도가 한계치다. 응답자가 견디지 못하고 끊어버린다. 그런데 폴리티컬 컴퍼스 모델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해 자신의 정치 성향을 알아보고 싶은 적극적인 이들이 참여하다 보니 62문항이 가능했고, 문항 수가 많은 만큼 다양한 성격의 설문이 가능했다.

좌파·우파 인사 모두 땀 흘리지 않고 돈을 굴리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는 데에는 부정적이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좌파·우파 인사 모두 땀 흘리지 않고 돈을 굴리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는 데에는 부정적이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시장이 자유로우면 사람들도 자유로워질까

은 정치인과 시민사회·학계·문화계의 주요 인사 52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진행하면서, 각 문항의 총합으로 나타나는 좌표의 위치는 실명으로 공개하되 개별 문항에 대한 각자의 응답 내용은 보도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좌우상하의 극에 위치한 인사들은 어떤 질문에서 어떻게 응답했기에 좌표상 거리가 멀어졌는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응답 내용을 폴리티컬 컴퍼스 좌표 위에 찍어보면, 좌우 양극단에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와 공병호 경영연구소 소장(자유기업원 초대 소장)이 있다. 위아래 끝에는 서정갑 국민행동본부 대표와 김규항 발행인이 자리하고 있다. 권영길 의원과 공병호 소장의 거리, 그리고 김규항 발행인과 서정갑 대표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됐을까?

시장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가로축은 주로 경제 분야 문항이다. 좌파와 우파의 차이가 극명하게 갈린 대표적 설문 문항은 역시 시장경제에 대한 기본적 철학을 물은 21번 ‘시장이 자유로울수록 사람들도 더욱 자유로워진다’는 설문이었다. 이에 동의하는 쪽은 사회 구성원의 자유로운 삶을 위해서라도 시장은 완벽하게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대하는 쪽은 시장의 자유 정도와 개인의 자유 정도가 반비례하거나 최소한 무관하다고 여기는 쪽이다. 좌표에서 왼쪽에 몰려 있는 인사들은 이 설문에 대부분 “매우 반대한다”는 의견을 냈다. 반면 상대적으로 오른쪽으로 쏠린 사람은 “매우 동의한다”는 답변을 선택했다.

복지정책의 역할과 범위에 대한 태도를 확인한 35번 설문도 좌우의 차이를 뚜렷이 갈랐다. ‘일할 능력이 있는데도 일자리를 거부하는 사람은 국가적 지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물을 때, 오른쪽으로 갈수록 “매우 동의한다”가 많았다. 왼쪽에 있는 사람은 거의 “매우 반대한다”였다.

13번 ‘토지는 사거나 팔 수 있는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국가의 부동산 정책과 시장 개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엿보기 위한 설문이다. 21번이나 35번만큼 좌우 양극단의 차이가 확연히 갈리지는 않았지만, 왼쪽에는 “동의하는 편”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많았고, 오른쪽에는 “반대하는 편”이라고 답한 사람이 더 많았다.

흥미로운 대목은 14번 설문 결과다. ‘사회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으면서 단지 돈을 굴리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는 문항이었다. 세금 등 소득에 따른 사회적 기여의 태도를 묻기 위해 설계된 질문이었지만, 좌우 양극단에 위치한 사람 대부분은 한목소리로 “매우 동의한다”고 답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김종욱 P&C정책개발원 연구위원(정치학 박사)은 “좌우 양쪽에 있는 인사가 비슷하게 동의한다고 대답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 본격적으로 쟁점화되지 않은 이슈여서 좌우 이념이나 이론에 근거를 두기보다는 윤리적으로 접근한 것 같다”고 풀이했다.

가로축이 국가와 시장의 역할 가운데 어느 쪽에 무게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차이가 갈렸다면, 세로축은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이다. 주목할 만한 차이를 보인 설문은 30번 ‘개인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대마초(마리화나)를 소유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다’였다. 개인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좌표 아래쪽 인사들은 “매우 동의한다”라고 답했다. 이들은 사형제 존폐에 대한 설문(43번)을 통해 적극적으로 사형제 폐지 의지도 드러냈다. 반면 그래프 위쪽에 분포한 응답자는 ‘대마초 비범죄화’와 사형제 폐지를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랐다. 49번 ‘여성이 직업을 가질 수는 있지만, 첫 번째 의무는 가정을 돌보는 것이다’ 항목에서 권위주의 쪽으로 쏠린 응답자는 주로 “매우 동의한다” “동의하는 편이다”라고 말했고, 자유주의자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난 응답자는 거의 “매우 반대한다”를 선택했다.

좌표상 거리가 가까우면 응답에서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는데, 11번 문항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간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좋은 생각이다’라는 물음은 예외였다. 공산주의 이념의 실현 가능성 여부를 떠나 근본적으로 좋은 생각이라는 데 동의하느냐는 질문이었는데, 좌우상하에 쏠린 응답자들의 답은 제각기 여러 방향으로 튀었다.

한편 △정부는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면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을 처벌해야 한다(문항 19) △아이들에게 부모가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은 자연스럽다(문항 29) △야만인이나 문명인은 없다. 단지 다른 문화가 존재한다(문항 34) 등 항목에는 응답자 대부분이 한쪽으로 쏠렸다. ‘서로가 동의하는 성인 사이의 성생활에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문항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답변이 거의 일치했다. 시장 자유 축의 진보와 보수, 개인 자유 축의 권위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차이가 없었다.

사실 폴리티컬 컴퍼스의 설문 문항에는 이것을 물어 무엇을 어떻게 측정하겠다는 것인지 모호한 질문도 있다. ‘적의 적은 우리 편’(문항 5)이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문항 24)는 설문에 응한 기자들도 당혹스러워했던 질문이다. 추상예술(문항 45)에 관한 설문도, 그것이 시장의 자유, 개인의 자유 축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내 위치가 어딘지 나도 궁금하다”

그래서인지 설문에 응한 여론주도층 인사 가운데서도 “독특하고 재밌는 설문이었다”거나 “좌표에서 내 위치가 어디에 표시될지 궁금하다”며 호기심을 내비친 이들도 있었다. 또 질문의 허술함을 파고들며 토론식 문답을 즐긴 응답자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경제적 세계화가 불가피하다면 세계화는 초국적기업의 이익보다는 인류에 대한 기여에 우선적으로 도움이 돼야 한다’(문항 1)에 “기업의 이익과 인류에 대한 기여는 서로 다른 층위의 문제인데 어떻게 한쪽에 우선적인 가치를 매기냐”고 되물었고, 사형제 유지에 대한 동의 여부(문항 43)에도 “사형제도는 유지하되 집행하지 않는 게 현실적인 방법인데 그런 답변은 없느냐”고 되물었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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