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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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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구한말 개화파의 재림

민중과 대립했던 개화기의 자유주의, “소수 경제 엘리트의 권력 장악 프로젝트” 신자유주의와 유사해
등록 2010-03-05 07:02 수정 2020-05-02 19:26

문제는 자유주의다. ‘폴리티컬 컴퍼스’는 이념의 호수에 ‘자유’라는 돌을 던진다. 당신은 어느 파문을 따라갈 것인가? 정치적 자유(권위주의 대 개인주의)와 경제적 자유(시장자유주의 대 사회민주주의)의 두 갈래를 어찌 엮어낼 것인가? 오늘 한국에서 벌어지는 사상·이념의 문제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이 결정한다.

‘자유주의연대’는 민주화 이후 한국 보수 세력이 자유주의에서 새로운 정치적 동력을 길어낸 결실이었다. 2004년 11월22일, 공식 출범을 앞둔 자유주의연대 창립 멤버들이 서울 중구 세실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남소연 기자

‘자유주의연대’는 민주화 이후 한국 보수 세력이 자유주의에서 새로운 정치적 동력을 길어낸 결실이었다. 2004년 11월22일, 공식 출범을 앞둔 자유주의연대 창립 멤버들이 서울 중구 세실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남소연 기자

보수주의·사회주의 모두 자유주의의 후손

‘폴리티컬 컴퍼스’의 ‘좌-우’ 축과 ‘상-하’ 축은 자유주의에 대한 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좌-우 축은 사회 문제에 대한 국가 개입을 어느 정도 지지하는지를 나타낸다. 여기서 시장 자유주의자는 좌-우 축에서 오른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상-하 축은 개인의 기본권적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나타낸다. 정치적 자유를 강하게 지지할 경우 상-하 축에서 아래쪽으로 내려갈 것이다.

사상·이념의 좌표를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려는 ‘폴리티컬 컴퍼스’가 자유주의의 쟁점을 측정의 잣대로 삼은 데는 이유가 있다. 자유주의가 정치 사상의 처음이자 끝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유주의는 근대사상의 효시다. 근대 사상·이념에 족보가 있다면 자유주의가 시조의 자리를 차지한다. 홉스·로크·밀·루소 등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종교·왕정·귀족 등 봉건 체제에 반기를 들었을 때, 그들이 내건 제일의 가치가 자유였다. 보수주의·사회주의 등은 모두 자유주의의 후손이다.

미국 컬럼비아대 명예교수인 로버트 니스벳은 자유주의·보수주의·사회주의를 “지난 2세기를 지배한 3대 정치 이데올로기”로 꼽는다. 이 가운데서도 자유주의가 다른 이념의 시초와 경계를 이룬다고 평가한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자유주의의 절정이었다. 에드먼드 버크가 주창한 보수주의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반발이었다. 카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프랑스혁명을 급진적으로 끌고 간 결과였다. 자유주의는 가장 먼저 탄생했고 가장 오래 살아남은 이념이다.

그러나 ‘폴리티컬 컴퍼스’는 아무래도 서구적 잣대다. 무엇보다 이 측정 방식의 고갱이를 이루는 자유주의의 편차가 한국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한국의 자유주의가 진화한 과정이 서구의 것과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사상이 자유주의였고, 오늘까지도 자유주의가 정치이념의 주요 쟁점이라는 점에서는 서구와 흡사하다. 다만 ‘한국적 자유주의’는 숱한 우여곡절을 치렀다. 한국인들은 자유주의 담론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길어냈다. 그 잣대는 서구인과도 많이 달랐다. 52명의 정치·사회 명망가들이 거의 대부분 자유주의자로 ‘커밍아웃’한 이번 조사 결과는 그런 사정을 반영한다. 다만 그들 사이에는 격자 눈금으로 모두 표현할 수 없는 큰 차이와 긴장이 있다.

한반도에 근대 정치사상을 소개한 것은 구한말 개화파다. 그들의 이념적 궤적은 을 통해 알 수 있다. 은 1896년에 창간됐다. 개화파의 사상을 전파했고, 실제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개화파 지식인은 물론 대한제국의 관료들도 탐독했다.

그 내용을 분석한 이나미 고려대 연구교수는 “에서 민주주의 또는 민주사상이 본격적으로 다뤄진 일이 단 한 번도 없다”고 지적한다. “민족과 백성을 위하는 내용과 외세 의존적이고 민중 불신적인 내용”이 상충하기도 한다. 이 수용해 확산시키려던 서구 근대 이념이 민족주의 또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개인의 생명권·재산권·자유권, 즉 자유주의였기 때문”이라고 이 교수는 설명한다.

그런데 으로 대표되는 개화파의 ‘초기 자유주의’에는 엘리트주의가 내장돼 있었다. 개화파의 대다수는 민중을 불신했다. 자유의 주체인 ‘개인’은 근대사상에 눈뜬 서구적 지식인으로 한정됐다. 개화파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동학을 비판하고, 외세를 신뢰하다, 마침내 친일로 돌아서게 된 것도 ‘초기 자유주의’의 한계에서 비롯했다고 이 교수는 분석한다. 한국에 자유주의가 등장했을 때, 그것은 ‘모든 개인’이 아니라 ‘엘리트적 개인’에만 주목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도입된 한국의 자유주의는 프랑스혁명의 자유주의와 다르다. 구래의 사상체계를 극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진보적’이었을지언정, 백성·시민·민중을 불신하고 배제하려 한 점에서 ‘보수적’이었다. 이는 해방 이후 한국 정치세력의 정체성에 결정적 영향을 줬다. 반공정권·군사정권은 자유주의를 천연스럽게 ‘권력의 이념’으로 채택했다. 바로 ‘자유민주주의’다.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유를 억압했다.

이승만 정부의 ‘냉전 자유주의’
‘독립협회’는 한국에 자유주의를 전파한 주역이었다. 1898년 10월 독립협회가 대한제국 황실의 매국 행위를 비판하며 경운궁 대한문 앞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위). 1987년 6월 항쟁은 ‘반공 자유주의’로 변질됐던 한국의 자유주의를 민주주의 이념 아래 다시 발견한 계기였다. 1987년 7월9일 서울 연세대 정문 앞에서 이한열 열사 장례식 행렬이 서울시청을 향해 출발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독립협회’는 한국에 자유주의를 전파한 주역이었다. 1898년 10월 독립협회가 대한제국 황실의 매국 행위를 비판하며 경운궁 대한문 앞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위). 1987년 6월 항쟁은 ‘반공 자유주의’로 변질됐던 한국의 자유주의를 민주주의 이념 아래 다시 발견한 계기였다. 1987년 7월9일 서울 연세대 정문 앞에서 이한열 열사 장례식 행렬이 서울시청을 향해 출발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 해방 직후 미군정의 역할이 없지 않았다. “한국은 이데올로기의 전쟁터입니다. 우리에게 민주주의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민주주의’의 소비에트적 의미는 대중의 복지로 표현됩니다. 미국은 민주주의 및 4대 기본 자유권을 보급하기 위해 한국에서 선전·계몽 운동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한국인들은 소련이 민주주의의 최고 형태라고 찬양하는 공산주의에 대해서만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1946년 미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한국을 찾은 에드윈 폴리가 트루먼 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해방 직후 미군정은 ‘미국식 민주주의’가 ‘소련식 민주주의’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 대대적인 선전 활동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받아들였다. 자유민주주의는 ‘미국처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주의’를 뜻했다.

다만 그 실질적 의미는 이승만 정부에 의해 다시 한번 뒤틀린다. 공산주의에는 언론·사상의 자유를 적용할 필요가 없다는 ‘냉전 자유주의’가 그것이다. 박찬표 목포대 교수는 “구한말 개화기의 자유주의는 독립·부강을 위한 체제 이념으로 수용됐고, 해방 이후의 자유주의 역시 남한 반공 체제를 정당화하는 국가 건설의 이념으로 자리잡았다”고 분석한다. 이는 한국 보수 세력의 유전자에 자유주의가 깊이 각인된 계기이기도 했다. 그 실제 내용이 어떠하건, 스스로를 자유주의의 반대자로 인식하는 보수주의자는 한국에 없다.

1970~80년대에 이르러 한국식 자유주의를 둘러싼 ‘해석’에 변화가 생긴다. 반공주의와 같은 말로 여겨지던 자유민주주의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적 자유주의를 재발견하는 세력이 등장했다. 이른바 ‘민주화 세력’이다. 박찬표 교수는 체제 경쟁 차원에서 헌법에 삽입됐던 기본권적 자유주의 조항이 “국가에 저항하는 시민사회의 무기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1980년 광주항쟁, 87년 6월 항쟁 등으로 이어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자유’는 ‘반공주의’가 아닌 ‘민주주의’의 슬로건이 됐다. 1990년대 민주정부의 등장은 그 결실이었다.

다만 민주화 세력이 주창한 자유주의는 여전히 민중성·민족성과 강하게 결합돼 있었다. 문지영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원은 “(저항 이념으로서의) 한국 자유주의 역시 ‘개인’보다 전체로서의 ‘민족’ 또는 ‘민중’을 권리의 담지자로 강조했다”고 평가한다. 자유의 주체인 ‘개인’을 제시하지 못하고 민중·민족·국가 등 ‘공동체’에 몰두했다는 점에서 민주화 세력의 자유주의도 여전히 미성숙한 상태였다. 자유주의의 심연을 넓히는 일은 민주화 이후의 과제로 남았다.

뉴라이트, 영미식 경제적 자유주의의 등장

그러나 자유주의에서 새로운 동력을 찾은 것은 오히려 보수 세력이었다. 2004년 ‘자유주의연대’가 출범했다. 이른바 ‘뉴라이트 운동’의 효시가 됐다. 이들이 내건 자유주의에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결합돼 있다. 자유주의연대의 주축은 이른바 ‘전향 386 운동권’이다. 이들은 “북한의 실상에 눈을 뜨고 진정한 보수주의 운동에 나서게 됐다”고 공언한다. 그런 점에서 이들이 표방한 ‘자유주의’는 과거 체제 경쟁 이데올로기를 답습하는 측면이 있다. 동시에 이들은 영미식 신자유주의 교리를 수용했다. 과거 이승만·박정희 시절의 자유민주주의와 구분되는 새로운 요소다.

서구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처음으로 자유주의를 주창했을 때부터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의 긴장을 품고 있었다. 계보를 따져보면 정치적 자유주의의 토대가 먼저 마련됐다. 학자들은 17세기의 존 로크가 정치적 자유주의의 토대를 완성했고, 18세기의 애덤 스미스가 경제적 자유주의의 근본을 마련했다고 평가한다.

신자유주의는 이 가운데 경제적 자유주의를 극단까지 밀고 나간 이념이다. 1950년대 하이에크에서 시작되어 80년대 영국 대처 정권과 미국 레이건 정권에 의해 정착된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권리 가운데서도 ‘재산권’에 주목한다. 사적 소유권과 시장의 자율성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거부한다.

그러나 반공주의 대신 자유주의를 전면에 내건 한국의 보수세력이 이러한 영미식 신자유주의를 ‘마음 깊이’ 수용했는지는 의문이다. 문지영 케임브리지대 연구원은 “개화기에 자유주의를 수용한 이래 임시정부, 건국 헌법, 민주화 담론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모든 자유주의는 자유경쟁을 원리로 하는 효율적 시장에 대한 믿음을 꽃피운 적 없이 항상 ‘사회적 자유주의’로 나아갔다”고 평가한다.

영국의 대처 총리는 “사회 같은 것은 없고 오직 개인으로서의 남자와 여자만 있다”고 연설했다. 그런 믿음이 바로 신자유주의다. 반면 ‘신보수 운동’을 주창했던 박세일 서울대 교수는 ‘공동체 자유주의’를 내세운다. 박 교수는 ‘공동체 자유주의’에 대해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전통적 공동체 정신으로 자유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려는 시도”라고 설명한다. 하이에크류의 완전시장경쟁에는 한계가 있다는 인식이 한국 보수 세력에게 제법 널리 퍼져 있는 것이다.

2010년 현재, 한국의 자유주의는 일단 신자유주의 또는 뉴라이트 운동이 지배하는 영역이 되어 있다. 다만 구한말 개화파가 그러했듯 최근 한국 보수 세력의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까지 건드리고 있다. 한국의 ‘하이에키언’으로 평가되는 민경국 강원대 교수는 “자유 사회를 위태롭게 하는 적이 있다. 민주주의의 이상으로서 주권재민 사상이 그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강조할 때마다 등장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예컨대 19세기 자유주의자였던 토크빌은 “민주주주의 국가에서 과연 자유가 존속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했다. 낯선 질문처럼 보이지만, 사유재산권 보장이 자유주의의 핵심이라고 여기는 경우 급기야 민주주의를 불신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 세계 보수주의자들의 공통된 궤적이다. 수적 다수를 이루는 노동자들이 민주주의를 통해 계급 입법을 추진하게 되면 (자산가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하게 될 것이라는 논리다.

그래서 데이비드 하비 뉴욕시립대 교수는 신자유주의를 “소수 경제 엘리트들의 기득권 회복을 위한 권력 장악 프로젝트”라고 비판한다.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대신 탈취에 의한 축적을 통해 부를 불균등하게 재분하여 상위 계급의 권력을 회복하려는 것이 신자유주의”라는 것이다.

이 문제가 깊어지면 ‘정치적 자유주의’ 문제가 다시 등장한다. 자유주의를 표방한 보수 기득권 세력은 경제적 부의 불균등을 가속화한다. 이를 바로잡으려는 다수 시민의 참정권·표현권까지 억압한다. 이제 시민은 ‘정치적 자유’의 실종을 규탄하고 나설 것이다. 광화문을 메웠던 ‘촛불 시민’과 권력의 장악을 거부하는 언론인들은 정확히 그 방식을 따라 한국 자유주의를 다시 작동시키고 있다.

한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한국의 좌우 세력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유주의를 해석했다. 자유주의의 의미도 계속 변화했다. “진정한 자유주의가 있는가”라는 질문은 진보 세력은 물론 보수 세력 안에서도 곧잘 터져 나오는 탄식이다. 서구의 자유주의가 기형적 형태로 이 땅에 이식됐다는 인식은 한국의 좌우 세력 모두에게 공통적이다.

자유주의는 맨틀 위에 떠다니는 지각판과 같다. 미동조차 없는 듯하지만, 항상 꿈틀거리고 있다. 에너지가 축적되면 거대한 지각변동으로 세상의 모습을 바꾼다. 한국의 자유주의는 진보와 보수의 지각판 사이에서 거대한 에너지를 모으고 있다.

참고 문헌 : (박세일 외·나남), (로버트 니스벳·이후), (데이비드 하비·한울), (김한원 외·부키), (박찬표·후마니타스), (김병국 외·인간사랑), (남시욱·나남출판), (이나미·책세상)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네오콘, 버크를 재발견하다


보수주의의 창시자는 영국의 정치인이자 사상가였던 에드먼드 버크다. 버크 이전에는 ‘보수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통용되지 않았다. 버크는 1790년 이라는 글에서 프랑스혁명을 주도한 (급진) 자유주의 세력을 강력히 비판했다.
그러나 많은 정치학자들은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 대단한 ‘친연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핵심 고리는 사유재산권의 주목에 있다. 버크가 비판한 것은 ‘정치적 자유주의’였다. 무책임한 대중에게 권력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논리였다. 그러나 19세기에 완성되는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한 지지는 버크의 머릿속에 내장돼 있었다. “정부는 긍정적인 효과를 미치는 일을 거의 할 수 없다. 행정의 개입은 재산권을 침해한다. 이득에 대한 사랑은 모든 국가에 번영을 가져다주는 위대한 원인이다.” 버크의 말이다.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미국의 ‘네오콘’ 운동은 버크의 재발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오랫동안 잊혀졌던 버크는 미국 보수 세력에 의해 1950년대부터 부활했다. 미국 보수 학자들이 발간하는 가 1959년 창간됐고, 1970년에는 도 발간됐다. 자유주의자였던 교수·학생들이 60년대 후반 우익으로 전향하면서 미국 네오콘이 시작됐는데, 이들이 버크의 현대적 재해석을 이끌었다. 대중에 대한 불신, 민주주의 확산에 대한 우려, 사유재산권의 강력한 옹호 등을 버크로부터 길어올린 것이다. 이후 하이에크, 프리드먼 등이 사유재산권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고, 영국 대처 정부와 미국 레이건 정부가 이를 채택했다.
자유주의의 정치적 급진성을 거세하고, 사유재산권의 신성불가침성을 강화한 뒤, 대중의 개입을 차단하는 방식의 신자유주의는 그렇게 반세기에 걸쳐 완성됐다. 데이비드 하비 뉴욕시립대 교수는 “오늘날 자유에 관한 담론은 신자유주의적 노선을 택하는 데 기여하고 있으며, 그 반대의 입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자유주의의 주도권이 보수주의에 넘어가 있다는 이야기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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