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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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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수 아니라 술, 딱 걸렸어?

촛불집회 ‘성금횡령죄’의 어처구니없는 속내,
기껏 기소유예로 그칠 일을 용감하게 기소하더니
등록 2010-01-29 05:48 수정 2020-05-02 19:25

사례 1. 재개발 조합의 정관에는 조합 임원 중 보수를 받는 상근 임원의 수를 3명으로 제한하고 있고, ‘조합 임원 또는 대의원의 친·인척인 자’를 조합의 직원으로 채용할 수 없도록 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합장이 조합 총회를 거치지 않은 채 상근 임원이 아닌 조합 이사 중 3명에게 1년여간 매월 150만원씩을 급여 명목으로 지급했다. 임원 보수 규정을 변경하려면 조합 총회를 거쳐 정관을 변경해야 하는데, 이러한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 결국 조합원들이 이를 알아내어 고소했다.

사례 2. 한 시민이 촛불집회 참가 중 자신이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는 사이트의 회원들에게 ‘촛불성금’ 모금을 제안했다. 개인 명의 계좌와 길거리 직접 모금 방식으로 2200만원가량을 모금했다. 그런데 모금된 돈의 사용처에 대해 사이트 내에서 논란이 일었다. 88만원 상당의 사용처가 불분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수사 결과 76만원가량은 술과 안주 등을 구입해 시위 참여자들이 나눠 마셨고, 나머지 12만원은 사다리 등 시위 용품을 구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더 큰 부정의에도 눈을 감는 검찰은 유독 촛불과 관련한 사안에서는 쌍심지를 켜고 달라붙었다. 2008년 촛불집회 당시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으고 있는 시민들.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더 큰 부정의에도 눈을 감는 검찰은 유독 촛불과 관련한 사안에서는 쌍심지를 켜고 달라붙었다. 2008년 촛불집회 당시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으고 있는 시민들.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횡령죄 필수 요소 결여 “무죄”

위 두 가지 사례 중 검찰이 형사처벌을 목적으로 기소한 사례는 어느 것일까? 사례 1의 경우에는 매월 450만원씩 14개월 동안 6300만원의 조합 공금이 임원들에게 급여 명목으로 지급됐다. 사례 2의 경우엔 성금 모금의 애초 목적인 생수나 초코파이 등의 구입에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모금자가 개인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집회 참가자들을 위해 사용한 것으로 밝혀진 사안이었다. 더구나 그 금액도 88만원이라는 비교적 소액이었다.

검찰은 사례 1에 대해서는 “조합의 임원 또는 대의원의 친·인척인 자”가 직원이 될 수 없을 뿐 “조합 임원이 스스로 조합의 직원이 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이 아니”라며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사례 2에 대해서는 횡령 등의 죄로 벌금 100만원의 약식명령을 청구했다.

조합원들의 동의 없이 조합장과 이사들이 짜고 조합 공금을 함부로 사용했으니, 조합장과 임원을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고 고소인인 조합원들은 생각했다. 임원의 친·인척조차 직원으로 채용할 수 없는데 임원은 스스로 직원이 될 수 있다니, 검찰의 이런 해석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사례 2에 관해 1심 법원은 유죄, 2심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1심 법원에서는 술과 안주, 사다리를 구입한 것이 시위 참가자들을 위해 사용된 것이 맞다 하더라도 당초의 모금 목적(생수와 초코파이 구입 등)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횡령죄의 유죄를 인정하고,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다. 반면 2심에서는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수십만 명에 이르렀고, 모금한 돈으로 구입한 술과 안주 등이 특정 집회 참가자들에게만 제공된 것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사다리 등의 구입 역시 집회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횡령죄의 성립에 필수적 요소인 ‘불법영득의사’(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생각)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횡령죄는 원래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물건을 보관하던 사람이 보관을 맡긴 취지와 다르게 물건을 처분할 때 성립하는 범죄인데, 당초 취지와는 다르지만 원래 소유자를 위해 보관자가 물건을 처분한 이상 횡령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다.

결국 검찰이 사례 2의 사안을 기소했던 것은 ‘성금 모금 당시에는 생수와 초코파이를 사서 집회 참가자들에게 나눠주겠다고 해놓고, 웬 술과 안주, 사다리(오, 불법집회의 증거물?)를 구입했다고? 딱 걸렸어!’ 뭐 대충 이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보아하니, 당사자가 다른 전과가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여느 사건이라면 아무리 중하게 보더라도 기껏 기소유예를 넘기 어려운 사안을 용감하게 기소까지 한 것을 보면, 촛불집회를 흠집 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은 아닐까?

촛불 흠집내기가 급했나

아님, 검찰이 촛불집회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은 탓에 길거리 곳곳에 둘러앉아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오징어와 땅콩을 안주 삼아 맥주잔을 기울이던 수많은 시민을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더구나 사례 2의 당사자는 자신이 직접 구입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집회 참가를 위해 구입한 물건에 대해서도 성금으로 회계처리를 해줬고, 문제된 물건의 구입 역시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구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 공소 제기의 정당성에 더욱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권정순 변호사·법무법인 로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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