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추세대로 온난화가 진행되면 2050년께 지구의 평균온도가 19세기 말보다 2℃올라, 남극 빙산이 녹고 29억7천 명이 기상이변 피해를 입으며 해수면 상승, 물 부족 등으로 연간 3천억달러가 넘는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리란 전망도 나온다.
지구환경 관련 국제회의에 역대 최대 규모의 ‘원자’들이 달려갔다.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15차 당사국 총회(COP-15)가 열리는 덴마크 코펜하겐을 향해서다. 이전 최대치였던 13차 회의 때에 견줘 공식으로 집계되는 참가자만 3배 늘었다.
그 가운데 스웨덴에서 출발해 700km를 자전거로 원정 간 다국적 청년들이 있다. 한겨레신문사 미디어전략연구소 하수정 연구원이 5대륙 6개 나라에서 온 그들의 여정을 뒤밟으며 각자의 열정과 희망을 들어봤다. 거기엔 코펜하겐 회의를 둘러싼 전 지구적 쟁점이 얽혀들어 있었다. 편집자
수은주는 겨우 영상에 걸쳐앉아 있다. 하지만 해협을 내질러온 바람이 살갗을 꼬집는다. 지구의 거친 신음일지 모른다.
“이런 계절에 스웨덴에서 자전거를 타고 덴마크까지 가겠다니까 다들 정신 나간 도전이래요.” 지난 12월8일, 때 묻은 무리가 정신 나간 듯 괴성을 지른다. “야, 드디어 코펜하겐 도착이다.” 하루 전,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제15차 당사국회의(COP-15)의 시작이 울려퍼진 곳이다.
이런 계절에 정신 나간 짓
‘코펜하겐 의정서’를 촉구하는 ‘자전거 원정단’이다. 이란·에티오피아·독일·뉴질랜드·파키스탄·캐나다 출신의 다국적 청년 6명으로, 스웨덴 웁살라대학 유학생들이다.
희한하다. 스웨덴 출신이 없다. “처음 프로젝트를 계획했을 땐 희망자가 훨씬 많았는데 그때도 스웨덴 친구들은 주저하더라고요. 아마도 북유럽의 12월이 어떤지 잘 알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 독일인 필리프 로더(22)가 웃었다.
눈치를 채야 했다. 웁살라에서 코펜하겐까지 700km를 자전거로 관통하는 건, 우리로 치면 서울에서 부산을 갔다가 대전까지 올라오는 거리인데, 그게 다가 아니다. 아침 9시나 돼야 희미하게 볕이 느껴지고 점심 먹고 나면 어둑해지는데다 매일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는 음산한 북유럽의 겨울날은, 오후 4시 남짓 기어코 암흑으로 둔갑한다.
하지만 누구 하나 불평이 없다. 자동차 대신 페달을 밟으며 지구를 살려보겠다는 순수한 열정은 현실보다 강하다.
‘아프리카 대표’ 다윗 할리우(30·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온 내가 눈비 내리는 추운 겨울에 자전거로 코펜하겐까지 간다고 하니 다들 놀랐다”고 한다. 이유가 없지 않다. “기후변화가 자연에 끼친 해악에 비하면, 내가 느끼는 눈의 위협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요.” 철저히 체험적이다. 에티오피아의 현실이 말해준다. 그러나 “당장 먹을 음식이나 위생 문제가 시급한 아프리카에서 기후변화는 저 높이 있는 문제”란다. 그래서 자전거 모험은 도전이자, 그로선 의무가 된다.
사실 이제 겨우 육류를 맛볼 수 있거나 중고 버스가 오지 마을에 와닿는 후진국에서 ‘탄소 규제’는 뜬금없는 일일 수도 있다. 때로 날벼락이다.
파진 라비(31·이란)는 “우리 이란에서도 기후변화에 별로 관심이 없다”며 국내 정치 상황을 한 이유로 꼽는다. “덴마크에 들어오기 바로 전날인 12월7일은 이란에서 ‘학생의 날’이에요. 1953년 이날 독재에 반대하다 죽임을 당한 세 학생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올해도 테헤란대학 앞에 모여 독재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잡혀갔어요. 이렇게 당장 해결해야 할 정치적 과제가 남아 있다 보니, 이란에서 환경문제가 대중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는 아직 이른 것 같아요.”
첫 제안은 필리프가 했다. 이들은 두 달 전부터 팀을 꾸려 연습을 시작했다. 특히 더운 지역에서 온 다윗과 나샬완 가파(22·파키스탄) 등은 새로운 환경에 대비하기 위해 매 주말 모여 40km부터 시작해 점점 거리를 늘려가며 100km까지 훈련을 해왔다.
하지만 체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거대한 자연과 기후 앞에선 의지나 열정도 왜소해 보였다. 지리에 어두운데다, 눈과 비로 도로가 미끄럽고 얼기까지 한다.
“우리의 최대 적은 날씨였어요.” 크리스천 윌리엄스(29·뉴질랜드)가 말한다. “보통 스웨덴의 겨울은 이틀에 한 번꼴로 비가 내려 습하고 평균기온이 영하 5℃ 정도로 바람도 많아 추운데, 이번 겨울은 비도 적고 날씨도 0℃ 언저리에 머물러 스웨덴 사람들 말이 예년에 비해 아주 친절한 날씨라더군요.” 하지만 지구는 더 불친절하고 독한 적이 되어간다.
스웨덴, 어쨌든 자전거길이 있기에 가능하다특히 저개발국가에 더 모질다. ‘온난화의 저주’를 받아 제 나라를 통째 잃고 뉴질랜드에서 난민 생활을 하는 투발루인을 크리스천은 만나봤을까? “기후는 정말이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그의 말은 울림이 깊다. 차갑고 시린 바람이 크리스천의 자전거 뒤에 매달린 ‘기후변화 반대’ 깃발을 온종일 보챘다.
이들이 달려온 거리는 웁살라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는 길을 쭉 따라 693km다. 아침 6~7시 출발해 시간당 20km 속도로 주행하고 중간중간 바나나·초콜릿 등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농장 오두막에서 신세를 지기도 했고,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이들의 음식 대접을 받기도 했다. 명색이 ‘환경 원정대’라 주로 채소를 먹었다.
길목마다 수많은 사람을 스쳤다. 필리프는 “여행하며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우리의 도전을 나누며 뜻을 전했는데, 대부분 우리 의견을 격려하고 지지해줬다”며 “이렇게 아래에서 위로 압력을 이끌어내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목표”라고 말했다.
가파는 개인적 이유가 크다. 9살 때 처음 ‘온난화’란 단어를 접한 그는 “글로벌 이슈를 다른 사람들이 심각하게 받아들이도록 뭔가를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서구인처럼 익숙한 시도가 아니다. 그는 “내 고향은 여름에는 섭씨 45℃까지 올라가고 겨울도 5℃ 이상이라 (처음 제안이) 미친 소리처럼 여겨졌다”고 말한다.
원정의 배경과 목적이 제각각이듯, 이들은 실제 각각 ‘오대주 대표’를 자임하고 있다. 그럼에도 ‘자전거’란 수단으로 쉽게 뜻을 모았다. 어떤 논리나 저마다의 처지로 부인되거나 왜곡될 수 없는 자전거의 환경적 가치가 절대적인 덕분이다.
탄소배출권 거래제나 환경 원천기술이 선진국의 ‘금융 아이디어’거나 ‘독점적 권리’여서 쉽게 합의되지 못하는 것과 다르다. 이번 코펜하겐 회의가 불투명하게 전망되는 이유다. 국가별 입장이 기후·지역별, 산업·경제 수준별로 적분된다. 그곳에 ‘자전거’는 없다.
대학에서 엔지니어링을 전공한 파진은 “자전거는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훌륭한 교통수단이고, 또 미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며 “이번 여행을 통해 사람들에게 이 메시지를 직접 보여주고 싶어 제안을 듣자마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막내 브로디 그레인저(21·캐나다)만 빼고, 모두 지속가능발전 석사과정을 공부 중이다. 이들에게 기후변화협약 당사국회의는 일찍부터 화두였다. 그런데 의식도 무장도 브로디가 가장 철저하다. 그는 “사실 장비와 옷만 잘 갖추면 자전거는 1년 내내 탈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들의 자전거 원정이 진짜 가능한 배경은 유럽의 자전거길이 국경을 초월해 두루 발달해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 아니 한국에서 회의가 열렸다면 가능했을까.
웁살라만 해도 스웨덴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인데, 인구 14만5천 명 가운데 자전거 없는 사람을 휴대전화 없는 사람보다 찾기 어렵다. 네 살배기 꼬마부터 일흔이 넘는 노인까지, 개인당 많게는 서너 대까지 보유하고 있으니 대수로 치면 휴대전화 수를 넘는다. 스웨덴은 당장 2020년까지 ‘석유 사용’을 ‘0’으로 하는 에너지 자립국가가 되겠다고 2006년 발표했다.
물론 선진국이라 해서 다 같진 않다. 필리프는 “유럽연합은 애초에 감축 목표를 1990년 배출량 대비 30%까지 발표했지만 이것도 여러 가지 지표를 놓고 볼 때는 아직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이번 회의에서 중요한 열쇠를 쥔 경제 강국 미국 등 선진 8개국(G8)의 입장은 물론 중국·인도의 입장도 점점 벌어지기만 한다.
“힘들다, 죽겠다” 했지만 사실 피곤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어렵게 꾸린 여행인 탓이다. 일단 학교 수업부터 빠져야 했다. 경비도 한 사람당 1750크로나(30여만원)가량이 들었다. 저가 항공을 이용하면 따뜻한 스페인에서 며칠 놀다 올 수 있는 비용이다.
아프리카 환경단체의 탄생, “돈 때문”장비도 만만치 않다. 산악자전거에 겨울용 타이어와 야간 라이트를 장착했다. 헬멧, 장갑, 비바람을 막아주는 방수 재킷에, 형광색 안전조끼, 두툼한 속옷과 방한용 바지, 양말은 두 켤레씩 신고 신발은 비닐로 한 번 싸고 헬멧 위에는 얇은 덮개를 또 씌웠다. 그러고도 30kg이 넘는 짐을 또 끈다.
피곤해도 바로 잠을 잘 수 없다. ‘이동’ 자체가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루 여정을 마치면 그곳에서 비로소 사람들을 만나고, 제 의견을 전하고 생각을 나눈다.
대화의 주제는 무한하다. 제 나라에 대한 비판부터 시작한다. 다윗은 “요즘 아프리카에도 환경운동 비정부기구(NGO)가 많이 생기고 있지만, 그건 진심으로 환경 변화를 염려해서라기보다는 돈 때문”이라고 말한다. “환경문제를 내세우면 기업이나 국제기구에서 후원을 얻기가 쉽거든요.” ‘환경 장사치’들은 실제 회의가 열리는 코펜하겐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최근 202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을 2005년 대비 17%까지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파급력이 있을까? 필리프는 말한다. “인도나 중국의 확실한 (감축) 약속도 받아내야 합니다. 게다가 기후변화는 이산화탄소 배출만 줄이면 되는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까지 숱한 회의가 있어왔지만 말뿐인 경우가 많았어요. 환경문제도 경제만큼 중요한 논제로 다뤄야 해요. 지구에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요.”
이들은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스웨덴 대표 무가지 에서 인터뷰 기사를 냈다. 지역 방송도 탔다. 스웨덴은 지역 신문이 발달해 큰 매체에 실리고 나면 여러 언론사에서 연락해오는 모양이다.
“한국의 한겨레신문사에서 온 친구가 홍보자료를 만들어줬어요. 미디어가 반응을 하면 훨씬 효과적이니까요. 덕분에 어제도 두세 군데 라디오 인터뷰가 잡혔어요.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겸손한 사람들이랍니다. 하하하.”
이들은 코펜하겐 입성 뒤, 회담장 일대를 돌며 전세계 시민과 갖가지 생각을 나누려 한다. 협상 경과를 지켜보면서 진행을 지연시키는 ‘장애물’이 있다면 시위도 할 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연 그대로의 자연, 인간 그대로의 인간에 대해 먼저 말해주고 싶다.
“첫날, 수업을 마치고 가느라 출발이 늦어 그야말로 야간 주행이었어요. 하지만 차들이 잦아들자 보름달이 떠서 가는 길을 비추더라고요. 세상이 온통 평화롭게 보였지요.”
“셋쨋날인가요? 가장 먼 거리인 112km를 달렸지만 차가 없는 흙길이라 경관이 정말 아름다웠어요. 서리가 내려 발가락이 떨어져나갈 듯 시려웠어도, 투명하고 푸른 달빛 덕분에 가는 길 내내 웃으며 달렸어요.”
“펑크 나고 넘어지고 그래도 도착하고 나서는 까맣게 잊었어요. 우리를 재워주기로 한 친구가 볼로네즈 스파게티를 만들어놓고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아, 정말 많이 먹었어요. 하하하.”
원정대는 코펜하겐에서도 늦은 저녁까지 쉴 새 없이 웅성댔다. 이들은 코펜하겐(Copenhagen)이 희망의 코펜하겐, 즉 ‘호펜하겐’(Hopenhagen)이 되길 바란다.
지난 2006년 ‘발리 로드맵’을 통해 3년 내 ‘포스트 교토’(교토의정서가 만료되는 2013년 이후의 감축 방안)에 대해 결론을 내리자고 약속한 각국 정부들에 이들의 목소리가 전해질지 알 수 없다. 덴마크의 낮 또한 짧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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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는 가난하다. 전체 인구의 80~85%가 하루 ‘2달러 이하’에 기대 산다. 지난해 유엔이 펴낸 ‘인간개발보고서’를 보면, 에티오피아의 5살 이하 어린이 가운데 36%가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2005년 한 해에만 신생아 200만 명이 영양실조 상태로 태어났다. 평균수명은 55.4살에 그친다. 극도의 빈곤이다.
에티오피아는 전형적인 농업국가다. 미 중앙정보국(CIA)이 펴낸 ‘월드팩트북’을 보면, △국내총생산(GDP)의 50% △수출의 60% △고용의 80%를 농업 부문이 차지한다. 말하자면, 산업화에 따른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란 뜻이다.
유엔 이산화탄소정보분석센터(CDIAC)가 2007년 내놓은 자료를 보면, 지구촌에서 한 해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량은 모두 284억3174만1천t 규모다. 이 가운데 67.2%를 상위 10개 나라가 배출하고 있다. 61억349만t을 배출한 중국과 57억5229만t을 배출한 미국 두 나라가 전체 배출량의 41.7%를 차지했다.
에티오피아는 어떨까? CDIAC가 분석한 210개 나라 가운데 에티오피아는 109위를 차지했다. 배출량은 약 600만6천t, 지구촌 전체 배출량의 0.1%에도 못 미친다. 그럼에도 에티오피아는 지구촌을 휘감은 기후변화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했다. 1980년대 이후 이상 징후가 뚜렷해지고 있다. 연평균 강수량, 특히 하루 25.4mm 이상 비가 오는 날수가 급격히 줄고 있다. 평균기온도 높아지고 있다. 유엔 기후변화정부간패널(IPCC)은 1961~90년 23.08℃이던 에티오피아의 연평균 기온이 2030년 1.1℃, 2050년엔 1.7~2.1℃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기후가 바뀌면 재해가 닥쳐온다. 가뭄과 홍수가 빈발하고 있다. 1980년대 중반 극심한 가뭄으로 대기근을 겪었던 에티오피아는 1993년부터 96년까지 4년 연속 크고 작은 물난리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 2006년에도 전국적으로 대규모 물난리가 잇따르면서, 중동부 디에 다와에선 500명이 사망·실종되고 1만여 명의 이재민이 났다. 남부 오모에서도 364명이 숨지고 8300여 명의 이재민이 났으며, 서부 셰와 지역에서도 1만6천여 명의 이재민이 났다.
어디 에티오피아뿐일까.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쪽이 펴낸 자료를 보면, 2000~2004년을 기준으로 저개발국가에서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로 피해를 입은 사람은 19명에 1명꼴로 나타났다. 선진개발국가에선 이 수치가 1500명 가운데 1명꼴이었다. 유엔이 운영하는 는 지난 1월16일 멜레스 제나위 에티오피아 총리가 한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기후변화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은 이들이 그 결과로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있다. 기후변화에 대처할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회의론자들
아직 이른 것 같아요
모두발언이 끝난 뒤 질의·응답이 시작됐다. 세계 각국의 특파원들은 모두 17개의 질문을 쏟아냈다. 이란 핵 문제와 관련된 질문만 10개였다. 기후변화에 관한 질문은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았다. 이날 오후 반 총장은 예정에 없던 언론 브리핑을 자청했다. 인터넷 매체 는 “반 총장이 (오전 회견 분위기 탓에) 좌절감을 느낀 듯했다”고 전했다. 반 총장은 브리핑에서 이렇게 말했단다. “이란과는 협상이 가능하다. 자연과는 협상이 불가능하다. 이란 핵 문제보다 기후변화가 훨씬 중요한 인류의 관심사여야 한다.”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경고하는 목소리는 높지만,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은 ‘현안’에 밀리기 일쑤다. 먼 미래의 파국을 우려하기보다 당장의 잇속에 골몰하는 게 국제정치의 현주소다. 자국의 이해득실은 인류 공동의 문제에 언제나 우선한다. 그러니 ‘불편한 진실’은 쉽게도 ‘거짓’으로 둔갑한다. 코펜하겐 회의를 앞두고 터져나온 ‘기후 게이트’는 이런 현실을 반영하는 한 편의 소극이다.
지난 11월17일 영국 이스트앵글리아대학에 딸린 기후변화연구소 컴퓨터 서버가 해킹을 당해 160MB 분량의 연구자료가 불법 유출되면서 시작된 이번 소동은 숨죽이고 있던 기후변화 회의론자(또는 거부론자)들을 다시 전면에 나서게 했다. 연구진 사이에 오간 전자우편 내용 등을 토대로 “인간의 활동이 지구온난화를 불렀다는 주장은 과장됐으며, 일부 자료가 조작된 흔적이 있다”는 주장이 들끓고 있다. 낯익은 앙탈이다.
8년의 재임 기간 내내 기후변화의 증거를 조직적으로 은폐·왜곡했던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퇴임했지만, 그의 ‘후예’들은 여전히 도처에서 활약 중이다. 새미 윌슨 북아일랜드 위임정부 환경장관은 지난 2월 기후변화에 대한 경고를 “우스꽝스런 사이비 종교”라고 비난했다가 의회의 ‘견책’을 받았다. “기후변화는 자연현상으로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일”이란 게 그의 ‘소신’이란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정책자문위원을 지낸 비스카운트 몬크턴은 이번 코펜하겐 회의에 대해 “공산주의자들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각국 정부에 강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라 안팎에서 ‘깡패 자본주의자’란 비판을 받고 있는 극우 성향의 바츨라프 클라우스 체코 대통령은 지난 11월4일 초청 포럼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이 야심찬 환경주의자들의 위협으로 대체됐다”며 “기후변화에 대한 호들갑스런 경고는 ‘세뇌’에 불과하며, 인류의 자유를 위협하는 가장 중대한 도전”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2007년 ‘기후변화론자의 음모’를 폭로한 란 책은 이미 12개 언어로 번역까지 됐다.
“2000~2009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더운 10년이었다. 1990년대는 1980년대보다 더웠고, 1980년대는 그 이전 10년보다 더웠다. 이런 현상은 그 이전에도 계속돼왔다.” 미셸 재로드 세계기상기구(WMO) 사무총장은 12월8일 코펜하겐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렇게 밝혔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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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77그룹 안에도 다양한 편차가 존재한다. 중국·인도·브라질 등 신흥 경제대국의 입장이, 당장 기후변화의 위협 앞에 내몰려 있는 군소 국가들과 같을 수 없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원유 수출국은 이와는 또 다른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기후변화 논쟁이 가열되면서 어느새 132개 나라로 회원국이 늘어난 77그룹 내부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 1990년 창설된 ‘군소도서국가연합’(AOSIS)에는 기후변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위기로 치닫고 있는 42개 섬나라가 참여하고 있다. AOSIS 회원국은 전체 개발도상국가의 28%, 유엔 회원국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그 영향력을 무시하기 어렵다. 이 국가들은 77그룹 내부에서 더 적극적인 온실가스 배출량 줄이기를 강조하고 있다. 대표적인 나라가 국토의 일부 물에 잠기기 시작하면서 이미 70여 명의 국민이 인근 뉴질랜드에서 ‘기후난민’ 생활을 하고 있는 투발루다.
또한 키리바시·방글라데시·몰디브 등 기후변화로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운 11개 나라는 지난 11월10일 몰디브에서 따로 모임을 열어 ‘기후변화 취약국 포럼’(V-11)을 출범시켰다. 당시 회의에서 참가국들은 ‘반도스섬 선언’을 통해 “산업화 이전 수준에서 지구의 평균 기온이 1.5℃ 이상 높아지지 않도록 오는 2050년까지 1990년 대비 85%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감축해야 한다”는 강력한 배출량 규제책을 제시했다. 또 선진개발국엔 매년 국내총생산(GDP)의 1.5%를 기후변화 대응기금으로 내놓을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런 변화는 코펜하겐 회의 개막 이후 더욱 가시화하고 있다. 중국을 중심으로 브라질·인도·멕시코·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이른바 ‘G5’ 국가들은 “현재가 아닌 ‘축적된’ 역사적 배출량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며, 기존 77그룹 체제를 바탕으로 선진개발국을 압박하고 있다. 반면 국토 전체가 ‘수몰’될 처지에 놓인 ‘V-11’ 국가와 일부 AOSIS 국가들은 “선진개발국이 강력한 배출량 규제 조처에 합의한다면, 저개발국가도 일정한 배출량 제한 조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역설적인 것은 이런 주장이 선진개발국의 이해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벌써부터 77그룹의 내분을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코펜하겐 합의안’
그곳에 ‘자전거’는 없다
본문과 부속문서 등 13쪽 분량으로 작성된 ‘코펜하겐 합의안’이 교토의정서를 대체할 의정서 형태로 작성된 건 아니다. 내년 회의에서 새 의정서를 최종 도출해내기 위해, 이번 회의에 참가한 당사국들의 ‘정치적 의지’를 담아내는 문서일 뿐이다. 그럼에도 파문이 커지는 이유는 교토의정서와 달리 저개발국가들에도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의무를 지우는 한편,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국제기금 운용에 선진개발국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할 수 있는 구조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덴마크가 내놓은 초안은 선진개발국과 저개발국가의 책임을 동일시했다. 저개발국가가 당연히 누려야 할 발전 기회를 앗아가려는 행태나 마찬가지다.” 초안이 공개된 지 불과 3시간 만에 수단의 루뭄바 디 아핑 ‘77그룹’ 의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이렇게 비판했다. 그는 이어 “초안은 기본적으로 기후변화협약과 교토의정서의 근간을 이루는,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책임과 의무의 차이를 없애버리려는 의도에서 작성된 것”이라며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덴마크 정부의 초안은 그동안 지구촌 시민사회가 주창해온 것처럼 교토의정서 체제보다 훨씬 강력한 온실가스 감축 방안을 담고 있다. 세계 최대 인도지원단체인 ‘옥스팸’의 안토니오 힐 기후정책 자문위원은 과 한 인터뷰에서 “저개발국가에 배출량 감축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기존 협약의 틀을 깨버린 것은 물론, 기후변화 대응 기금 운용을 세계은행 등에 맡김으로써 선진개발국의 입김을 한층 강화하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며 “선진개발국이 하나로 뭉치면 저개발국가들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는지를 새삼 상기시켜준 사례”라고 지적했다.
G8 기후변화 성적표
선진국이라 해서 다 같진 않다
WWF는 지난 7월 펴낸 2009년판 ‘성적표’에서 “오는 2050년까지 1990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을 95%까지 감축하기 위해 각국이 얼마나 적절히 대처하고 있느냐”를 평가 기준으로 삼았다고 밝혔다. 세부 평가항목은 △1990년 이후 개선된 점 △현재 상황 △미래를 대비한 정책 등 크게 세 부문으로 나눴다. 결과는 어떨까?
가장 좋은 성적을 받은 국가는 독일이다. WWF는 보고서에서 “1990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이 21.3%나 줄었고, 재생 가능 에너지 사용 비율도 4.3%나 늘었다”고 평가했다. 반면 △2020년 이후 분명한 배출량 감축 목표가 없고 △전력 생산을 지나치게 석탄에 의존하고 있으며 △저탄소 체제로 이행하려는 구체적 전략이 없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2위를 차지한 영국은 1990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이 17.3%에 이르는 등 교토의정서의 목표치를 초과 달성했지만, 재생 가능 에너지 활용이 좀처럼 늘지 않는다는 점이 흠으로 꼽혔다. 3위를 차지한 프랑스는 교토의정서 배출량 감축 목표를 가까스로 달성했지만, 2050년까지 배출량을 1990년 대비 75%까지 줄이겠다는 다짐을 법으로 명문화해 후한 평가를 받았다.
재생 가능 에너지 활용이 큰 폭으로 늘면서 4위에 오른 이탈리아는 교토의정서가 정한 배출량 규제 한도를 깡그리 무시했다. 1990년에 비해 배출량이 되레 7.1% 늘어난 게다. 5위인 일본과 7위인 미국도 각각 8.2%, 16.8% 배출량이 늘었다. 반면 6위를 차지한 러시아는 오랜 경기 위축으로 감축 의무를 무려 30% 이상 초과 달성했지만, 경기회복과 함께 최근 배출량이 다시 늘면서 상당한 감점 요인이 됐다.
꼴찌는 캐나다였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1990년 대비 26.2%나 늘었다. 지난 2007년 대대적으로 친환경 정책을 내놓았지만, 실제 집행되는 정책은 사실상 전무하단다. 여기에 캐나다 정부가 적극 추진하는 ‘타르샌드’(원유를 함유한 모래·암석) 개발사업에 대한 우려까지 커지면서 최하위의 수모를 당하게 됐다. 8개국 중 4개국이 의무를 저버렸다. ‘포스트 교토’ 체제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녹색기술 특허와 그린펀드 조성
‘환경 장사치’들
지난 6월12일 미 하원은 2010 회계연도 외교 분야 예산안을 압도적 다수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미국에선 부문별 예산안을 별도의 법안으로 취급한다. 이날 통과된 예산안에는 눈길을 끌 만한 내용이 포함됐다. “유엔이 주최하는 기후변화협약 관련 협상에 나서는 미국 대표단은 미국 기업이 보유한 친환경 기술 관련 지적재산권에 손상을 가할 수 있는 어떤 제안도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명문화돼 있던 게다.
하원의 이같은 움직임은 의미심장하다. 외교적 협상은 행정부가 하고, 협약 비준권은 상원에 있지만, ‘돈줄’을 쥐고 있는 건 하원이기 때문이다. 하원의 ‘뜻’을 거스른 협상 결과가 나오면, 예산을 배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다. 미 하원의 움직임을 두고 “코펜하겐 회의를 앞두고 기후변화 대응 기술의 특허권을 풀어야 한다는 저개발국가들의 요구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일종의 선제공격”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미 지적재산권 관리 전문업체 ‘클린테크’는 지난 11월10일 3분기 청정에너지 관련 특허출연 현황을 발표했다. 미국 특허청(PTO)의 심사를 통과해 특허를 인정받은 신기술은 6~9월 석 달에만 모두 271개에 이른다. 앞선 2분기에도 PTO는 사상 최대 규모인 274개의 ‘녹색기술’에 특허를 내줬다. 태양력·풍력·조력·수력 등 다양한 청정에너지 기술과 바이오연료 생산 기술이 대부분을 이뤘다. EPA의 시행령에 따라 온실가스 배출 규제가 강력하게 이뤄지면, 이들 기술은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게다. 미 하원이 염두에 둔 것도 바로 이 점이었을까?
배출량 규제와 함께 코펜하게 회의의 핵심 쟁점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친환경 기술 특허권 문제와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데 필요한 자금(이른바 ‘그린펀드’) 조성 방법 및 운용 주체의 문제다. 두 쟁점은 긴밀히 연계돼 있다.
선진개발국의 ‘역사적 책임’과 ‘공평한 책임 분배’를 강조해온 저개발국가 진영은 그동안 기후변화 대응 기술의 이전과 공동 연구를 요구해왔다. 특히 핵심 기술에 대해선 특허권을 풀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이는 선진개발국 입장에선 지적재산권 침해라 주장할 만하다. 경우에 따라 세계무역기구(WTO)의 ‘지적재산권협정’(TRIPs) 위반 논란으로 번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린펀드’ 조성 자체는 크게 어려울 것이 없어 보인다. 문제는 누가 자금을 관리할 것이냐다. 선진개발국의 입김이 강한 세계은행 등 기존 국제 금융기구가 전면에 나설 경우, 자금 지원 때마다 ‘조건’이 내걸릴 수 있다는 우려가 만만찮다. 실제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은 개발원조나 구제금융 지원 대상을 선정할 때, 해당 저개발국가에 민영화·개방화 등 선진개발국의 이해와 일치하는 요구를 내걸어왔다. 기후변화란 인류 공동의 위협 앞에서도 약육강식의 국제정치·경제 질서는 요지부동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웁살라(스웨덴)=하수정 한겨레미디어전략연구소 연구원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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