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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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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성 뒤 남은 건 주홍글씨와 트라우마


쌍용차 노동자 공황장애 속 자살 기도… 용산 철거민은 죽음이 갈라놓은 동지애로 고통
등록 2009-11-19 17:59 수정 2020-05-03 04:25

농성은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 음식을 끊는 결단을 해야, 공장을 점거하는 투쟁에 나서야, 철탑에 매달리는 위험을 감수해야, 겨우 시선을 주었던 세상은 농성이 끝나면 다시 냉정한 등을 보인다. 그러나 농성 이후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 그래서 ‘농성 후폭풍’이 더욱 무섭고 슬프다. 아무도 결코 농성을 즐기지 않는다.

기나긴 단식농성을 했지만, 회사는 여전히 이들의 복직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94일 동안 이어진 단식농성 당시의 기륭전자 노동자들. 유흥희 조합원,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 김소연 분회장(왼쪽부터 시계방향).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기나긴 단식농성을 했지만, 회사는 여전히 이들의 복직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94일 동안 이어진 단식농성 당시의 기륭전자 노동자들. 유흥희 조합원,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 김소연 분회장(왼쪽부터 시계방향).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농성은 벼랑으로 몰린 이들의 최후 수단. 그러나 이들의 손을 잡아주기는커녕 벼랑 아래로 밀어버리는 잔인한 세상이다. 한국에서 성공한 농성이 나오기란 성공한 대통령이 나오기보다 어려워졌다. 그 뒤로도 오랫동안 농성은 정신적, 나아가 육체적 외상을 남긴다. 그래도 그들은 농성을 후회하지 않는다. 농성 이후의 삶은 농성 이전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정리해고를 거부하는 치열한 공장점거 투쟁을 벌였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삶도 여전히 계속된다.

베란다 난간 위에 올라섰다. 새벽 찬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묶인 고무호스를 천장에 걸고 목에도 걸었다. 편해지고 싶었다. 이제 더 이상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베란다 바깥으로 발을 떼었다. 쿵. 조금씩 정신이 혼미해져갔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토록 원했던….

쌍용자동차 공장 안에서 77일간 옥쇄파업을 벌인 뒤 해고 대상자 명단에 올랐던 이아무개씨는 이렇게 농성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려고 시도했다. 베란다 바깥으로 떨어져 무릎이 깨졌다.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가족과 동료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또 한 명이 그렇게 죽을 뻔했다.

비행기만 지나가도, 전화벨만 울려도

물과 음식이 끊긴 채 공장 안에서 사상 유례없는 옥쇄파업을 벌인 쌍용자동차 농성자들은 지금까지도 각종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대부분 이씨처럼 우을증을 동반한 스트레스성 증후군이다. 오랫동안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해 아직까지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이도 있다. 파업 종료 뒤 농성자들의 치료를 지원해온 박재만 한의사(녹색한방병원)는 이들의 상태를 이렇게 표현했다. “대부분 우울증 환자예요. 전쟁터에 나갔다 집에 돌아왔더니 폐허가 된 채 나뒹구는 집터만 발견한 피난민의 상실감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박씨는 농성 당시에도 농성장을 방문해 환자들을 지켜보았다. “농성할 때는 노동자들이 뭉쳐 있으니까 자신감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상실감이 너무 큰 상태예요. 농성이 끝난 뒤 노동자들은 어쩌면 더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어요.”

공장 안 굴뚝 위에서 농성을 벌인 서맹섭(34)씨는 지금도 공황장애를 겪고 있다. 서씨는 “비행기만 지나가도 환청에 시달려요”라고 말했다. 실제 농성장 위에선 경찰 헬리콥터가 늘 굉음을 내고 날아다니며 농성자들을 위협했다. 밤이건 낮이건. 그는 “메모를 안 해두면 어제 일도 기억이 안 나요”라고 말했다. 겨우 30대 중반 나이에, 기억상실증까지 겪고 있는 것이다.

“쌍용차 경력 본 면접관 낯빛 변해”

농성 뒤 상실감과 허무감에 빠진 몇몇 노동자들은 아예 외부와 연락을 끊어버렸다. “전화벨만 울려도 놀라요. 또 경찰에 불려갈까봐. 농성을 끝내고 상실감에 빠진 사람들은 아예 전화번호를 바꾸고 잠적해버렸어요.” 쌍용차 정리해고특별위원회에서 일하는 이아무개씨는 최근 전화번호를 바꿔버린 쌍용차 조합원들의 연락처를 수소문하느라 바쁘다고 전했다.

겨우 의욕을 찾고 재취업에 나선 해고 노동자들의 삶은 좀 나을까? 생각지 못한 장벽이 또 있었다. 쌍용차 출신이라고 말하는 순간 취업의 기회가 사라져버린다. 최근 구직에 나섰다 실패한 노동자들은 “이력서에 ‘쌍용자동차’란 글자를 발견하는 순간 면접관의 얼굴이 변했다”고 털어놓는다. 쌍용자동차 출신은 농성에 가담한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기업들의 고용 기피 대상으로 떠올랐다. 한 해고 노동자는 “명예퇴직에 동의하고 농성이 시작되기 전에 퇴사했지만, 농성이 전국적인 이슈가 된 뒤로는 어떤 곳을 찾아가도 면접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이렇게 ‘쌍용자동차’는 어느새 해고자의 가슴에 주홍글씨로 박혔다. 해고된 뒤 살길이 막혔다. 농성장에 걸려 있던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구호가 과장이 아니었던 셈이다.

이렇게 농성이 끝난 쌍용차 노동자들이 농성 후 외상에 시달린다면, 농성이 여전히 진행 중인 용산의 철거민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가슴에 묻고 끝나지 않은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 박선영(41)씨는 지난 1월19일 오전 10시께 서울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에 세워진 망루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농성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다. 물론 함께 있던 동지들과의 운명이 바로 다음날이면 삶과 죽음으로 갈릴 거라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지난 11월11일 남일당 건물 앞 큰길에서 총각무를 버무리며 또 한 겨울을 날 김장 준비를 하던 박씨를 만났다. 그는 “지금 정신적으로 굉장히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검찰에 의해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혐의로 기소당해 13일 첫 공판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 10일에는 구속된 동지를 만나러 구치소에 면회를 갔는데 “우리는 살아남았기에 구속됐다”는 얘기를 듣고 참사 때 숨진 5명에게 너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특히 참사가 나기 전 4구역 세입자도 아닌 윤용헌씨와 이성수씨에게 “망루에서 내려가시라”고 계속 얘기했는데도 끝내 안 내려갔다 숨진 걸 생각하니 “그 동지애에 더 미치겠다”고 했다. “쑥 내려가도 됐는데….”

농성은 끝나도 삶은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여전히 계속되는 농성장이 한반도에 넘쳐난다. 헬리콥터로 색소를 섞은 최루액을 뿌리는 쌍용차 점거 당시, 오체투지에 단식농성까지 이어가다 의식을 잃었지만 기적처럼 깨어난 문규현 신부, 오늘도 계속되는 용산 참사 농성장(왼쪽부터/ 한겨레 김명진·<한겨레21> 정용일·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농성은 끝나도 삶은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여전히 계속되는 농성장이 한반도에 넘쳐난다. 헬리콥터로 색소를 섞은 최루액을 뿌리는 쌍용차 점거 당시, 오체투지에 단식농성까지 이어가다 의식을 잃었지만 기적처럼 깨어난 문규현 신부, 오늘도 계속되는 용산 참사 농성장(왼쪽부터/ 한겨레 김명진·<한겨레21> 정용일·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그는 “유족들 얼굴도 못 보겠고 영정 사진도 못 보겠다”고 했다. 투쟁을 시작할 당시부터 “집에서 애나 보지, 네가 한다고 될 일이냐”며 자신의 행동을 이해해주지 않는 시부모의 반대는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남편은 물론이고 자식이 둘이나 되는 자신이 당시 망루에 오른 이유는 뚜렷하다. “원주민이 살 수 없고 밖으로 내몰리는 재개발에 분노했기 때문”이고 “뭉치면 되겠지라는 생각 때문”이다.

1월20일에 멈춘 시간

그는 지금도 잠은 주로 남일당 건물에서 잔다.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 인근 원효로에 있는 집에 들른다. 5명의 ‘열사’들에게는 해주지 못한 밥과 빨래를 남편과 아이들에게 해준다. 다시 아침 8시까지 남일당으로 돌아와 유가족들과 미팅을 하고는 그날 어떤 활동을 벌일지 논의한다. 서울시청이나 서울중앙지법 앞에 1인시위를 가기도 하고 용산철거민참사범국민대책위 집회가 있으면 거기에 힘을 보탠다. 박씨는 “봄이 오나 여름이 오나 여기 시간은 1월20일에 멈춰 있다”고 말했다.

참사는 1월20일 끝났지만 박씨의 농성은 아직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검찰이 미공개 수사기록 3천 쪽을 내놓아야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밝혀지고, 정부와 서울시가 유가족에 사과하고 4구역 세입자들에게 임시 상가를 마련해주어야 이들의 농성은 끝날 것이다. “최소한 장례를 치러야 농성이 끝날 것”이라는 박씨가 이날 계속 강조한 말은 “책임감”이었다. 내가 살아나올 때 숨져간 이들에 대한….

문규현 신부 “인간의 잘못 깊이 참회”

용산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은 여의도의 병실에도 있었다. 문규현 신부는 지난 10월22일 용산 참사 해결 촉구 단식 11일째에 쓰러졌다. 다행히 사흘 만에 의식을 되찾았지만, 환갑의 나이에 올해만 오체투지 124일을 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단식에 들어간 것이 그의 건강을 해쳤다고 사람들은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11월11일 여의도 성모병원 910호 병실에서 만난 문 신부는 “오체투지 때문에 쓰러지지 않았다”며 “오히려 오체투지 때문에 살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뭇 생명의 평화가 나를 일으켜세웠다”며 웃었다. 그에게 하늘에 오르는 고공농성과 땅바닥에 몸을 던지며 가는 오체투지와 밥을 굶은 단식농성은 다르지 않은 기도였다.

그는 세 발 내딛고 한 번 절하는 삼보일배를 하면서 바닥의 자신을 향해 웃음짓는 꽃들을 보았고, 땅바닥을 자벌레처럼 천천히 기어서 가는 오체투지를 하면서 뙤약볕에 말라가다가 자신이 흘린 땀방울을 단비처럼 맞고 몸을 부르르 떨며 앞으로 나가는 지렁이에 감동했다. 그렇게 몸을 낮추고 낮춰야 비로소 보이는 생명이 있었다. 그는 길에서 주검으로 농성하는 생명도 보았다. 오체투지로 지나는 도로에 차에 치이고 밟혀서 죽은, ‘로드킬’(Road Kill) 당한 생명들이 누워 있었다. 그는 “인간의 잘못을 깊이 참회했다”며 “뭇 생명이 나를 로드킬 당하도록 놔둘 리가 없지”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길에서 만난 생명의 평화가 새벽의 좁은 성당 화장실에서 그가 그대로 쓰러져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단 것이다.

그에게 삼보일배·오체투지는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이 죄인임을 참회하는 기도였다. 고통받는 생명의 아우성이 있는 곳이면 그도 있었다. 문 신부는 2003년 새만금 간척사업 중단을 위해 부안 해창갯벌에서 서울 광화문까지 305km를 65일 동안 삼보일배하며 나아갔다. 약 12만 번의 걸음에 4만 번의 절을 하는 길이다. 이것도 모자라 2009년엔 124일 동안 계룡산에서 임진각까지 400여km를 오체투지로 순례했다. 그는 “내일 일어날랑가 모르겠네 하면서 밤새 끙끙 앓다가도 훌훌 털고 일어나 길에 오르곤 했다”고 돌이켰다. 낮에는 오체투지를 하고 밤에는 차에서 자면서도 그는 “아무리 그래도 재개발로 삶터를 잃은 용산분들만 했겠는가”라고 말했다. 오체투지 순례길에 용산을 지나던 순간의 절실함이 지금도 가슴에 사무친다. 그는 “용산을 지날 때 더 갈 수도, 덜 갈 수도 없었다”며 “임진각에서 북으로 가는 오체투지 길이 막히면서 돌아올 곳은 용산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삼보일배·오체투지로 자신을 낮추던 생명의 사제는 단식을 하다 쓰러졌고 기적처럼 깨어났다. 비록 쓰러지면서 화장실 변기에 허리를 부딪히는 바람에 1번 척추뼈가 으스러져 철심을 몇 개나 박는 수술을 받았지만, 그는 “감사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의사들은 그의 회복을 1%의 기적이라고 한단다. 그렇게 고난의 길을 걷다가 생사의 기로에 놓였지만, 그는 앞으로도 가던 길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육아하며 태교하며 투쟁은 계속돼

허리가 아파서 누워 있어야 하는 그는 요즘 즐겨 부른다며 (Gracias A La Vida) 악보를 꺼냈다. 평생 민중을 위한 노래를 불렀던 남아메리카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는 이 노래의 제목은 ‘생에 감사하며’라는 뜻을 담고 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소사는 노래로 경건하고 자애로운 목소리로 남미 민중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척추 부상에 이번에 새로 부정맥까지 발견돼 앞으로 더욱 건강에 조심해야 하는 그는 오히려 “새로운 인생을 사니까 감사하지. 영원히 이 길을 놓지 말아야지”라고 말했다. 어쩌면 문 신부는 앞으로 삼보일배·오체투지를 계속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되지, 그것을 하고 안 하고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거듭거듭 “우리 모두가 용산에 참회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한 걸음도 앞으로 가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용산처럼 기륭전자 농성도 끝나지 않았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단식은 끝났지만, 이들의 복직 요구를 회사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여전히 기륭전자 앞의 컨테이너 농성은 계속되고 있다. 기륭전자의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강인했다. 2005년 7월, 해고를 당한 뒤부터 이어온 싸움이다. 지난해 김소연 분회장이 94일간 단식하며 회사와의 교섭을 이끌었지만 아직까지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고공농성과 단식농성이 거듭된 지난 4년의 행보는 그들을 ‘여전사’로 보이게 했다. 94일이나 단식을 했으니 배고픔을 모를 거라고, 35m 높이 철탑에서 먹고 자다니 무서움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11월11일 저녁, 서울시 금천구 가산동 기륭전자 옛 사옥 앞. 정문 앞 컨테이너에서 희미한 불빛과 함께 고소한 냄새가 새어나왔다. 안에서는 기륭전자 분회 윤종희 조합원이 부침개를 부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김소연 분회장이 우는 아기를 어르고 있다. 올해 초, 강화숙(40) 조합원이 낳은 딸아이다. 그렇게 육아도 투쟁도 삶도 컨테이너 안에 있었다. 4년 넘게 투쟁을 이어오는 동안 내내 그렇다. 겉이 바삭하게 익은 부침개를 집어 입에 넣으며 김소연 분회장이 말했다. “우리는 알고 보면 다들 참 먹을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에요.”

오랫동안 농성을 같이하면서 이들은 여성으로서 변화도 함께 겪어왔다. 지난해 단식을 하다가 강화숙 조합원이 쓰러졌다. 병원에 갔다 돌아온 강 조합원은 다시 단식에 합류했다. 그가 두 번째 쓰러지고 나서야 동료들은 강 조합원이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다행히 강 조합원은 건강한 딸아이를 낳았다. 이제는 육아를 하면서 투쟁을 한다. 9개월 된 딸아이는 기륭전자 옛 본사 앞 컨테이너에서 잘도 잔다.

지금은 이미영 조합원이 임신 중이다. 요즘도 매일같이 기륭전자 새 사옥 앞 피케팅을 포함해 투쟁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아이를 데리고 농성장에 오는 강화숙 조합원은 임신 5개월인 이미영 조합원의 미래다. 이씨는 “강씨 모녀를 보는 것으로 태교를 한다”며 웃었다. 그에게 언제가 가장 힘들었느냐 물으니 “지금”이란다. 갈수록 체력이 떨어져 그렇다고 한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기륭이 51% 이상 지분을 갖는 자회사의 직접 고용”이다. 이들은 “절박해서 싸우고, 죽지 않으려고 희망을 가진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교섭이 끊어진 지 벌써 1년이 넘었다. 기나긴 단식을 했지만, 지난해 9월 단식이 끝난 뒤에도 회사와의 교섭은 도통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해 10월엔 회사 앞에 있던 농성 천막까지 경찰이 철거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회사는 묵묵부답. 그래도 이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망각에 반대한다

김소연 분회장은 희망의 근거를 전했다. “단식이 막바지로 내리달릴 즈음, 전태일 열사의 모친 이소선 어머니가 천막으로 오셨어요. 다짜고짜 물건을 내놓아라, 죽으려고 하지 마라, 태일이도 그러다가 갔다고 하셨어요. 어디선가 우리가 분신할 준비를 한다는 얘길 들으신 모양이에요. 사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전태일 열사 묘 앞에 찾아가서 펑펑 운 적도 있죠. 왜 분신했는지 알겠고 이게 바로 내 문제, 우리 문제구나 싶어서요.”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모두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우리는 절박해서 싸웠고, 이제 와서 희망을 포기하면 안 돼죠. 투쟁하는 모든 노동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에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것.” 용산을, 기륭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당신과 함께 망각에 반대하여, 잊으면 반복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긴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허재현 기자 한겨레 취재보도영상팀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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