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위정자들이 금과옥조로 모시는 ‘자유국가’ 미국은 수정헌법 1조에 기초하고 있다. 미국 헌법 가운데서도 ‘권리장전’ 대목을 따로 모아둔 수정헌법은 1조에서 ‘표현의 자유’부터 보장한다. 표현의 자유가 모든 권리, 나아가 모든 민주주의 체제의 근본이라는 뜻이다.
“의회(Congress)는… 표현(speech), 출판(press), 결사(assemble), 그리고 불만스런 일을 정부에 청원(petition)하는 자유를 뺏거나 금지하는 법을 만들지 않는다.”
유심히 보면, 그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원칙적 선언이 아니라, 위정자들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못박는 태도다.
바로 뒤에 나오는 수정헌법 2조는 ‘무장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다.
“자유국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소지하는 인민의 권리는 침해당하지 않는다.”
이 조항 덕분에 오늘의 미국은 ‘총기 범죄 국가’로 전락했지만, 적어도 처음 헌법을 만든 미국인의 논리 구조는 가히 불온할 정도로 당당했다. ‘국가의 이름으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 국가의 잘못에 항의할 인민의 권리도 침해하지 말라. 자유를 지키는 것은 우리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무장하고 있다!’ 자유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무장한 인민 앞에 국가는 항상 외경심을 품어야 한다는 결기 어린 명령인 셈이다.
표현의 자유 침해 사례 모아보니한국에서 ‘표현의 자유’가 침해당하는 양상은 미국 수정헌법 1조와 2조가 지향하는 바의 정반대를 향하고 있다. 국가가 표현의 자유를 뺏고 있다. 국민은 자유를 지키는 무장을 스스로 해제하고 있다. 10월12일 방한한 프랑크 라뤼 유엔 특별보고관은 과의 독점 인터뷰에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정부의 책무”라고 말했다. 또한 “인권침해에 대해 (사람들이) 둔감해지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지난 10월14일, 인권단체연석회의·참여연대·민주노총·국제민주연대 등 시민사회단체가 특별 워크숍을 열었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 사례를 발표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굵직한 사례들만 모았는데도 표현의 자유가 모든 영역에서 여지없이 붕괴하고 있음을 절절히 입증했다. 이 자리에서 노마 강 무이코 국제앰네스티 조사관은 “한국이 경찰국가로 보인다”고 말했다.
“내가 아는 것을 그들은 모르는 걸까? 왜 그들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할까?” 세계적 사회학자인 스탠리 코언 런던정경대(LSE) 명예교수의 질문은 오늘의 한국인에게 더욱 새롭다. 그는 인권사회학의 새로운 지평을 마련한 저서 (창비)에서 “인권침해가 계속되는 것은 국가와 대중이 그 사실을 시인하지 않고 계속 부인·외면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부인·외면의 3범주’ 또는 ‘3단계’ 중 첫 번째는 명백한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지난 10월13일, 서울지방경찰청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 현장에서 경찰 무전 내용이 흘러나왔다. “잔당을 소탕하라.” “보이는 족족 검거하라.” “인도에 있더라도 공격적으로 검거하라.” 지난 5월, 촛불집회 때 주상용 서울경찰청장이 현장 경찰에 지시한 내용이었다. 이에 대한 주 청장의 첫 반응은? “기억이 안 난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다.”
코언 교수는 이를 ‘문자적 부인’이라고 부른다.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모르는 체하는 경우, 진짜 모르는 경우, 무지하기 때문에 명백한 사실이 보이지 않는 경우, 자신의 세계관 때문에 사실이 보여도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 등이 있다고 지적했다.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을 축출하기 위해 국세청·감사원·검찰 등이 나섰을 때, 정부는 표적수사나 방송 장악 의도와 무관하다고 해명했다. 국정원·기무사·검찰·경찰 등이 민간인을 상대로 도·감청 및 사찰을 벌인다는 보도가 나올 때마다 당국은 “그렇지 않다”고 답변했다.
두 번째 단계는 사건의 상식적 의미를 부인하는 것이다. 같은 자리에서 주 청장은 “한국에서 왜 집회·시위, 그것도 과격 시위가 많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불법 집회에 대한) 법 집행이 공정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답했다. 집회 참가자를 엄단하지 않는 게 문제라는 뜻이었다. 약자가 집회를 연다. 집회·시위가 많은 것은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인과관계를 부인하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을 ‘해석적 부인’이라고 한다.
문화방송 수사, 네티즌 ‘미네르바’ 구속, 박원순 희망제작소 이사장에 대한 국정원의 고발 등에는 공통점이 있다. 정부, 관료 등의 명예가 훼손됐다는 논리로 당국은 대응하고 있다. 정부 비판을 ‘명예훼손’으로 비틀고 있는 것이다.
프랑크 라뤼 유엔 특별보고관은 과의 인터뷰에서 “공직자에 대한 비판은 명예훼손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공직자가 자신에 대한 비판을 꺾기 위해 법을 동원하는 것은 검열이나 다름없다”고도 말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명백한 검열이 한국에선 명예훼손 여부를 다투는 법적 쟁송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전철련에 뒤집어씌우는 ‘함축적 부인’‘해석적 부인’과 비슷하지만 더 교묘한 것이 세 번째 ‘함축적 부인’이다. 사실 자체는 인정하지만, “이런 식으로 봐야 한다”며 관점을 이동시키는 방식이다. 역시 같은 자리에서 주 청장은 지난 1월 발생한 용산 참사의 원인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전철련이 늘 망루를 세우고 과격 폭력 시위를 했기 때문이다. 남경남 전철련 의장이 없었다면,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에) 망루도 세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주 청장은 경찰의 진압으로 철거민이 사망한 사실 자체는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그 이유가 “남경남 전철련 의장”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이명박 정부가 각종 집단 및 결사를 탄압할 때 쓰는 ‘부인의 논리’도 여기에 있다. 지난 6월 시국선언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현직 교사 23명이 해임·파면됐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명백한 침해라는 교사들의 항의에 대해 교육과학기술부는 “공무원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징계했다”고 ‘부인’했다. 공무원법상 정치활동 금지는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반대 활동에 적용되는 조항이다. 교사 시국선언의 주 내용은 “민주주의를 지키자”는 것이었다. 표현의 자유는 당국에 의해 ‘정치적 편파 활동’으로 변질됐다.
이런 정부의 태도는 시민에게도 전염된다. 코언 교수는 “정부가 사건을 윤색하고, 진상을 비틀고, 상대하기 쉬운 피해자들만 골라 관심을 기울이면서 인권침해를 ‘부인’하면, 이런 태도는 전 사회로 가지를 뻗어 모든 대중이 ‘집단적 부인’에 빠진다”고 지적했다.
‘더 알고 싶지 않다’ ‘알고는 있지만 별 느낌이 없다’ ‘불행한 일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등의 사회심리 속에서 인권침해가 일상화된다는 것이다. 결국 어떤 형태의 인권침해를 겪어도 더는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적 마비’의 사태가 온다고 코언 교수는 경고했다. 자유가 없어도 자유가 없는 줄을 모르게 된다는 이야기다.
‘낙하산 사장’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YTN 기자 6명이 해고된 지 1년이 넘었다. 1975년 의 기자 해직과 다름없는 일이다. 그래도 사람들의 뇌리에서 YTN 해직 기자들은 잊혀지고 있다. 지난해 미네르바 사건 이후, 포털 게시판의 의견글은 당국의 검열에 따라 수시로 삭제당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이제 이런 일을 당연시한다. 스스로 검열해 고분고분한 글만 올린다. 지난해 촛불집회 참가자 가운데 1184명이 기소당했다. 이 가운데 844명은 여전히 법적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들에게 지금까지 부과된 벌금만 10억원에 이른다. 그러나 그 벌금을 나누겠다는 시민은 찾기 힘들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는 “현실을 부인하는 권력과 함께 인권침해에 대한 일반 대중의 방관과 부인도 심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명백한 사실을 부인하고, 사건의 상식적 의미를 부인하고, 자신의 책임을 부인하는 단계를 거치면서 권력과 시민은 인권침해를 ‘없는 일처럼’ 치부하며 살아간다. 인권침해의 강도는 더 강해지고 그 범위는 더 넓어진다. 코언 교수는 “정부는 국민을 순종시켜야 하는 상황보다는 대중이 적당히 무관심한 편을 더욱 선호한다”고 지적했다. ‘부인의 나선 구조’를 따라 한국 사람들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일상적 침해에 적당히 무관심해지고 있다.
그런 와중에 방송인 김제동(35)씨가 방송사 밖에서 행한 ‘개인적 발언’이 빌미가 되어 공영방송사에서 퇴출당했다. 그것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근본적 침해라는 사실을 당국도 부인하고 국민도 모르쇠한다.
방관에 전염된 우리 모두가 공범서구에는 인권침해 사실을 부인하는 행위 자체를 범죄로 다루는 나라가 있다.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캐나다 등은 반인도적 범죄 및 인권침해 범죄를 공개적으로 부인하거나 축소·왜곡하거나 이를 승인하거나 정당화하는 사람을 형법으로 처벌한다. 타인의 인권이 함부로 박탈당하는 일에 눈감고 있는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죄를 물어야 한다는 뜻이다. 묻지 않으면 나치를 방관하던 ‘전사회적 인권 불감증’이 재현할 것이라는 역사적 교훈에서 비롯한 일이다. 과거사에서 인권침해 사례를 찾는 일로 따지자면 한국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저들은 그 기억을 법으로 만들어 되새기고, 우리는 금세 잊어버렸다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2009년 한국에서 벌어지는 표현의 자유 유린에 어쩌면 우리 모두가 공범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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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찬 기자 ahn@hani.co.rk·정인환 기자 inwhan@hani.co.kr
[한겨레21 표지이야기]▷ ‘표현의 자유’ 족족 소탕 당하는 동아시아▷ “정부의 법적 대응은 검열과 다름없어”
▷ 김제동의 ‘골든벨’은 계속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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