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결혼도 ‘스펙’

초혼 연령은 가파르게 상승하고, ‘결혼활동’ 나이는 점점 낮아져
등록 2009-08-05 13:29 수정 2020-05-03 04:25

“추석 다음날,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 친구들을 만났다. …대화가 무르익어가면서 취직과 결혼으로 귀결된다. …결혼을 한 아이들은 십중팔구 공무원이거나 정규직이었다. …결혼이 사랑의 결실이라는 말은 무덤에 묻혀 백골이 진토된 지도 아주 오래된 것 같다. 이미 결혼 시장에서 한우 등급보다도 더욱더 엄밀하게 ‘레베루’를 매기고 있는 상황에서 결혼은 어느 것보다도 최첨단의 소비가 된 분야다. 그 사람이 잘나가는 사람이냐 아니냐는 20대에 결혼을 하느냐 못하냐만 봐도 알 수 있다는 어떤 친구의 말처럼… 결혼은 당위와 선택을 넘어 사치로 진화했다. …정말로, 우리가 결혼을 할 수 있을까?”

남·여 평균 초혼 연령 추이

남·여 평균 초혼 연령 추이

돈 없고, 집 없고, 결혼 없는 ‘3무 세대’

미 일리노이대 인류학과 박사과정에 있는 이규호씨가 두어 해 전인 27살에 썼던 글이다. 이렇게 결혼도 어느새 ‘스펙’이 되었다. 그러나 가난한 혹은 평범한 청춘에게 결혼은 ‘미션 임파서블’(불가능한 작전)이 되고 있다. 송희야(27·가명)씨는 2007년 중소기업에 근무하며 같은 직장 동료와 연애를 시작했다. 그러나 지난해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둘은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둘 다 직장을 구하고 있다. 그들은 회사를 다닐 때는 종종 미래에 대한 얘기도 했지만, 실직한 뒤 결혼은 금칙어가 됐다. 송씨는 “취업할 기약이 없으니 결혼은 당분간…”이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이렇게 사랑하지만 결혼하지는 못하는 20대 연인이 적잖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초혼 연령 추이는 해마다 가파르게 높아지고 있다. 남성은 1998년 평균 28.83살에서 2008년 31.38살로, 여성은 같은 기간에 평균 26.02살에서 28.32살로 높아졌다(그래프1 참고). 특히 연령별 혼인율에서 남성은 25~29살 비율이 1998년 82.5%에서 2008년 51.8%로 떨어졌고(그래프2 참고), 여성은 20~24살 비율이 60.2%(1998년)에서 24.1%(2008년)로 추락했다(그래프3 참고).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본격화된 지 10년 만에 벌어진 일이다. 우석훈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는 “88만원 세대를 돈이 없고, 집이 없고, 결혼이 없는 3무 세대라고 한다”고 전했다.

취업의 약자인 여성은 ‘취집’의 유혹을 느낀다.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는 김민지(26·가명)씨는 두어 해 연애는 미루고 ‘빡세게’ 공부했지만, 경제위기로 취업문이 좁아지면서 돌아오는 자리는 없었다. 얼마 전 그는 허탈한 마음에 오랜만에 소개팅을 했다. 31살에 안정적 직장을 가진 남자는 “유학 비용은 자신이 책임질 테니 결혼해서 유학을 함께 가자”고 했다. 김씨는 “기자가 되겠단 결심이 흔들리면서, 이래서 취업 대신 결혼을 하는구나 생각이 들었다”고 돌이켰다.

남자의 주요 연령별 혼인율/ 여자의 주요 연령별 혼인율

남자의 주요 연령별 혼인율/ 여자의 주요 연령별 혼인율

그러나 취집을 반기는 남성은 줄었다. 결혼정보업체 가연의 권혜영씨는 “남성들이 예전엔 여성의 나이와 외모를 많이 따졌는데 요즘엔 직업 있는 여성을 선호한다”고 전했다. 이렇게 여성의 외모만 보고 ‘덤벼드는’ 남자는 줄었다. 따라서 결혼을 둘러싼 남녀의 불일치는 커졌다. 그런데 이른바 ‘결혼활동’을 하는 연령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권혜영씨는 “28~30살에 가입하는 여성이 많았는데, 요즘은 22~24살 여성의 가입도 늘었다”며 “현실도피로 결혼을 택하는 경향”이라고 덧붙였다.

커리어를 쌓은 고학력 여성 중에도 경쟁에 지쳐 결혼을 택하는 경우가 적잖다. 30대 전후 고학력 사무직 여성 노동자들을 인터뷰한 논문(연세대 문화학협동과정 박은진, 신정수, 최시현·2009)은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하지 않거나 혹은 이를 ‘쉼’의 기회로 삼고자 하는 여성들에게 결혼은 노동시장으로부터 탈출을 가능하게 해주는 통로로 보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규호씨도 “연애도 경력 관리하듯이 하다가, 서른다섯이 되면 싫은 사람 아니면 결혼한다는 얘기가 있다”고 전했다. 연예인으로 꼽자면 ‘세븐과 박한별’ 같은 연인, ‘션과 정혜영’ 같은 부부다. 이른바 ‘수도승’이라 불리는 이들은 뜨거워 보이지 않지만 안정되고 오래된 관계를 추구한다.

안정된 직업을 가진 이들이 비슷한 배경을 가진 남녀를 찾는 ‘유유상종’ 경향은 강해진다. 특히 여성이 교사나 공무원 같은 안정적 직장을 구하는 경우엔 88만원 세대 남성과 연애를 하다가도 정작 결혼은 안정적인 직업의 남성과 하는 일이 적잖다. 은행에서 형성되는 ‘대체커플’이 대표적이다. 같은 은행 사이에 돈을 보내는 방법인 ‘대체’에서 나온 말로 사내커플을 지칭한다.

강화되는 연애의 계급화

과연 88만원 세대끼리 결혼은 가능할까? 오늘의 20대는 결혼을 하지 않아서 세대를 이어갈 의무를 저버린 게 아니라 아예 결혼을 못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결혼정보업체 관계자가 덧붙인 한마디, “요즘엔 자수성가한 사람보다 기본 있는 사람을 선호한다. 부모의 학력과 재산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게 연애의 계급화는 한세대를 돌아서 강화됐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