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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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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경쟁력이 성욕까지 몰수했다

‘현실’만 있고 ‘전설’은 없는 청춘을 놓고 20·30·40대가 논쟁하다
등록 2009-08-05 13:19 수정 2020-05-03 04:25
은 ‘연애 장애’로 아파하고 냉소하는 다양한 20대를 만났다. 신자유주의만 안다. 특히 구제금융 이후 옆집 친구 아버지가 자살하고 뒷집 친구 어머니는 가출하는, 가족의 줄도산을 지켜보며 자란 이가 언제 개인 파산할지 모르는 88만원 세대로 포섭되는 사연들. 그럼에도 ‘청춘’은 어느 시대고 합의될 수 없는 주제다. ‘88만원짜리 청춘’도 마찬가지다. 20~40대 4명이 벌인 대담은 그래서 논쟁이었다. ‘모두 가난하다’고 말한 시대와 ‘나만 더 가난하다’고 말하는 시대 차가 크다는 인식만 올돌하다. 상실의 시대가 아니라 상실감의 시대다. 소비가 넘치는 사회, 생뚱맞게 연애가 사치가 되고 결혼은 부채가 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세대를 종횡한 대담은 또한 타협이고 위로였다. 편집자
고미숙 박사, 김류미, 최태섭, 변형석씨(제일 왼쪽부터)

고미숙 박사, 김류미, 최태섭, 변형석씨(제일 왼쪽부터)



참석자: 김류미(26·전 희망청 근무), 최태섭(26·전 기자), 변형석(38·하자센터 여행협동조합 대표), 고미숙(49·고전평론가· 저자)
김류미씨

김류미씨

김류미(이하 김)= ‘우리 세대가 정말 힘든가’ 스스로 따져보면 틈이 없다는 걸 체감한다. 수치는 중요치 않다. 얘도 힘들고 쟤도 힘들다 하고, 지방대 나와도 명문대 나와도 힘들다는 말이 반복되니까 그냥 정말 와닿는 거다. 상대적 박탈감, 루저 마인드(열패감)로 20대가 분석되곤 하는데, 알 순 없지만 사회가 훨씬 달라졌기에 내 삶에 영향을 끼친다고들 생각한다.

틈을 활용하라고? 틈이 없는걸

고미숙(이하 고)= 88만원 세대가 사회구조적으로 경제적 독립의 기회를 많이 박탈당한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거칠게 보면 지금 세대는 그 어느 세대보다 풍요롭다. 88만원 세대로 자기 존재를 규정하고, 그래서 사회구조에 원인을 다 돌리는 건 동의하지 않는다. 임꺽정 시대를 보자. 백수의 원조다. 이보다 더 불안한 존재가 없을 것 같은데, 연애나 성적 결정권, 향유권은 엄청 풍부했다. 지금 세대가 왜 시야를 넓히거나 틈을 활용하지 않는가, 라는 의문이 생기는 거지.

변형석(이하 변)= 그 말조차 사실상 30대 이상의 표현인 것 같다. 틈이라곤 하지만, 지금 세대에겐 한 치도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좌절의 영역일 수 있다.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지 나의 답도 없고 사회의 답도 없는 상황에서, 분석 이전에 체감하는 것이다. 공무원 시험 200 대 1이란 경쟁률은 공무원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이들의 ‘출구 없음’을 방증한다. 옛 시대보다 물질적으로 얼마나 풍요하냐는 별개다.

최태섭(이하 최)= 경제적 문제보다 더 중요한 건 존재론적 불안이다. 주체가 딛고 설 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다른 존재를 만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나. 대부분 취업 공부든 경력을 쌓기 위해서든 외국에 나가거나 골방에 처박힌다. 공간적 문제가 발생한다. 지금 연애는 옛날과 달리 친밀감에 집중된다. 떨어져 있으면 견디기 어렵다. 아르바이트하고, 일자리 구하랴 경력 쌓으랴 계속 떠돈다. 주거만 봐도 발딛고 설 땅 한 뼘이 없다는 절망이 있다.

고= 1960~70년대는 실존이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경제 사정은 나빠도, 착각일지언정 사회를 바꾼다, 내가 뭘 할 수 있다, 해야 한다, 라는 것들이 존재의 불안을 줄였다. 그러면서 연애의 욕망과 파토스도 깊고 지속되었다. 자본이 침범 못하는 영역이 그래도 그땐 있었다면, 90년대 이후엔 붕괴됐다. 국가 경쟁력(이라는 당위)이 성욕까지 몰수하면서 자기 증식을 해온 거다. 영혼까지 잠식됐지. 그런 존재가 누굴 사랑할 순 없다. 타자를 받아들일 공간이 없으니까. ‘88만원 세대이기에 연애가 어렵다’는 인과는 좀 엉성한데, 실존적 불안 때문에 그렇다는 건 이해가 된다.

변형석씨

변형석씨

변= 난 386도 아니고 낀 세대다. 신세대 담론의 세대라고 본다. 그때도 연수 가는 경우는 있었다. 다만 그럴 경우엔 ‘나와 연애를 끝내자는 거구나’라고 다들 받아들였다. 6개월이라도 가려면 나랑 헤어지고 가라, 싸우고 집착할 만큼의 강도가 있었던 거다. 다녀와서 삶의 질을 높이는 것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있었으니 싸움이 됐지. 하지만 지금은 그럴까? 쉽게 헤어지고, 다른 사람 만나고 하는 패턴이 정말 빠르다.

와글와글= “나도 임꺽정 시대라면 맘껏 살겠다.” “그러는 당신은 연애하나?” “꼭 연애 얘기만 하면 정사에 야사가 낀다.”

정주의 불안이 존재의 불안

최= (외국으로) 나간다는 사람을 우리가 잡지 못하는 건 책임질 수 없음을 통감하기 때문이다. 안 나가면 내가 보상해줄 수 있나? 불가능하다. 나조차도 당장 나중에 뭘 해먹고 살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간다는 걸 “안 돼”라고 못한다.

김= 신자유주의가 퍼지면서, 특히 이명박 정부 들어 외국으로 나가는 사례가 많아졌다. 호텔 서빙을 하더라도 조리 전문 해외연수인 것이다. 정주의 불안이 존재의 불안이다. 내 남자친구가 외국을 가면, 내 직장 옆 동료를 만나게 될 것 같다. 옆에 있다는 게 중요해지는 거다. 결국 존재의 불안은 내 불안이고 그의 불안이고, (우리) 사이의 불안이고 사회의 불안이 된다.

고= 삶을 묶어주는 공통의 지반이 약해서 그렇다. 눈앞에 없으면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는 거지. 존재의 무게중심이 산포되어, 이 상대랑 잠깐 주파수 맞추다 영역이 이동하면 다른 걸로 맞추는 거다.

김= 같은 가치를 상상하는 명문대 여성과 고졸 남자의 연애보다, 명문대 안에서 대기업에 가려는 남자와 사회운동하려는 여성의 경우가 더 연애하기 힘들다. 70~80년대 공통의 가치는 뭐였나.

고= 생존이지.

김= 우리 세대도 경제적 생존이다.

고= 좀 다른데, 전태일 세대는 생존을 위해 같이 살아야 했다. 공순이·공돌이, 사라진 그 이름들은 같이 살고 애 낳고, 시장에서 장사하고, 그렇게 생존을 위해 사랑을 해야 했다. 지금은 거꾸로 됐다. 지금은 결혼이 생존의 영역이라기보다, 소비의 이미지로 점철돼 있다.

와글와글= “외국으로 나갈 때 유형이 몇 개 있다. 아예 말을 안 하거나, 비정하게 ‘기다려’ 하거나….” “왜 ‘비정하게’지?” “그만큼의 각오를 요구하니까. 그러곤 아침마다 컴퓨터 캠코더로 서로 확인한다.” “야, 20대 너무 피곤하다. 그런 청춘 시대가 아닌 게 너무도 다행이야.” “선생님, 고전이랑 달라요.” “하하하.”

변= 우리 때만 해도 결혼을 안정적 삶으로의 진입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따져보면 월 300만~400만원은 벌어야 대출 이자 갚고, 아이 기르고, 차 한 대 사고, 생활비 하고, 가끔 여행도 하면서 살 수 있다. 당연히 공무원도, 전문직도, 대기업 직장인도 아닌 이들에게 결혼은 사치일 수 있다. 옛날에는 왜 그렇게 기 쓰며 결혼하려고 하느냐, 그러지 마라 설득하느라 힘들었는데, 이젠 결혼을 왜 해야 하는지 설득하기가 더 힘들다.

결혼과 연애, 타자의 거울
최태섭씨

최태섭씨

최= 요즘 일찍 결혼하는 커플들을 보면 ‘속도위반’해서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속도위반해서 부모님한테 가면, ‘어이쿠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결혼시킨다. 오죽하면 최고의 혼수는 애가 들어서서 시집오는 거라고 말할 정도다. 그러지 않으면 손자 볼 길이 막막한 거라고 봐야지. 어쨌건 연애-결혼-출산, 사랑-섹스-결혼의 필연성이 극히 줄었다. 단순히 남들보다 잘 살지 못한다는 염려가 아니라, 삶 자체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불안 때문이다.

김= 사실 20대에게 왜 연애 안 하고 결혼 안 하느냐, 출산은 안 하려고 하냐, 그런 ‘국가적’ 협박이 있다. 하지만 내가 만난 30대분들조차 보통의 결혼을 유지한 이들이 많지 않다. 출산 안 하고 반려동물을 키우거나, 새 관계를 모색하거나. 그런데 비난이 벌써 20대에 오는 거다. 남자친구와 연애를 7년 넘게 지속하는 동안 많이 부딪히면서 ‘둥근 돌’이 되었다. 그렇게 날 들여다본 계기가 없다. 그랬더니 부모님과의 관계도 좋아졌다. 관계의 스킬이 느는 건 분명하다.

고= 타자의 거울을 통해서만 자기가 보인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얼마나 저급하고 원초적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인지 모른다. 특히 20대엔 미래 불안을 좀더 제쳐두고 일단 열심히 연애하라는 건 성욕이 가장 왕성한 시절이기 때문이다. 섹스의 쾌감이 있다. 남성은 기본 배설이 가능해 그게 아닌 줄 아는데, 인간은 모두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몸도 열리지 않는다. 내 몸이 열려 맛보는 자유나 환희, 이게 없을 때 결핍과 부자유가 있다. 관계가 어렵다.

김= 지금 20대는 그걸 자연스럽게 보며 자란 세대다. 섹스해야 돼, 몸도 원하고 마음도 원해, 라는 걸 아는 세대다.

고= 20대에 누리는 섹스, 그걸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어떤 문인은 애를 두세 명 낳고 그때 섹스가 진짜 섹스라고 한다. 깊은 차원으로 열리는 몸의 영역이 있다. 이게 훈련되지 않으면 40~50대에 섹스리스 부부가 되고, 불구의 관계가 된다.

변= 결혼이 필수가 될 수 없는 시대에 낭만적 사랑의 신화도 약해지는 듯하다. 소통의 의지도 줄어드니까, 관계를 감정노동이라고 본다. 그래서 오타쿠처럼 ‘사물’들에 관심을 갖는 것 같다. 소통하지 않아도 되니까. 있어서 뿌듯하지만 절대 나를 귀찮게 하진 않지.

와글와글= “빨리 결혼해야 이혼도 하지.” “결혼이 주는 게 뭐가 있나” “성욕 때문에 결혼했다는 친구가 제일 잘 산다.”

과잉 성애 시대에서 초식남의 변주로
고미숙 고전평론가

고미숙 고전평론가

변= 10년 전을 보면 과잉 성애화된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꼭 이성이나 섹스가 아닌 것으로 욕망을 풀 수 없나, 고민했다. 연애 말고, 너 하고 싶은 것 찾아 투자도 하고 스스로 꾸며라, 그렇게 얘기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초식남 같은 부류가 확 등장해버린 거다. 황당하지. 도대체 10년새 뭔 일이 벌어졌나 싶다.

최= 90년 중반 들어 마초나 매스큘린이 완전히 희화화하고 거부됐다. 대신 페미니즘이나 섬세함이 강조됐다. 처음 메트로섹슈얼에서 다시 남성성을 조금 복원하려던 위버섹슈얼이 등장했지만, 근육조차도 우락부락 대신 말랐지만 탄탄한 ‘말근육’으로 점점 변해왔다.

변= 초식남의 다양한 변주들이 생길 것이다. 과잉 성애에서 탈성애화된 사람들, 일본만 봐도 몇 년 새 크게 늘고 있다. 그런데 과잉 성애 시대가 그랬듯, ‘이들이 만들어내는 구조는 또 뭘까’ 걱정이 된다. 출산율이 낮다, 이런 문제를 떠나 깊은 사랑의 관계가 없는 사회는 또 어떤 그림일까, 굉장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최= 하지만 탈성애화한 과정에서 비로소 내가 “여자와 섹스한다”가 아니라, “너와 섹스한다”가 가능한 기반이 됐다고도 본다. 심화된 커뮤니케이션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인 거다. 남성성-여성성의 구분도 적어지고, 퀴어에 대한 담론도 늘었다. 예전엔 마광수 하면 ‘야 어떻게 그런 걸 쓸 수 있나’ 했지만 지금은 ‘뭐 이렇게 지겨워’ 한다. 남녀관계가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러려면 어떻게든 살고, 만나고, 연애해야 한다.

고= 문제는 여전히 다들 왜 그렇게 천편일률적인가다. 관계의 다양성, 이런 게 없다. 모두 데이트한다고 비디오방 가고 모텔 가고. 똑같은 애들끼리 만나, 같은 계층 이루고, 같은 애를 낳는다. 지금 20대는 그러지 못해서 불안하다는 건가. 뭐가 갖춰지면 연애를 할 텐가. 다른 길을 열어야 하는 거다. 혈연을 넘어선 이합집산이나 커뮤니티 형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인간은 단자화된 존재로는 살 수 없다. 그건 자살이다.

김= 30대는 조건 중심의 듀오식 결혼제, 동거 담론, 게이 커플 문제 등이 등장해서 논란을 거치는 걸 모두 겪었다. 20대는 이런 것에 이미 익숙하다. 그래서 연애를 더 잘할 수 있는 세대가 아닐까 생각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렇기에 뭘 해도 안 튀는 게 사실이다. 어지간한 시도는 다 했고, 그렇게 해봐야 다 피곤하다는 걸 깨달았던 거다. 그래서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있는데, 그거야말로 힘들다. 매주 비디오방 가고 모텔 가고 그 짓 하는 것도 대단한 거다. 그 안의 감정노동도 적지 않고. 적당히 연애하고, 적당히 취업해서, 적당히 가족 이루고… 평범하게 사는 건 정말 위대한 거라고 생각한다.

와글와글= “그런 걸로 꼭 튈 필요는 없다.” “난 결혼이 파트너를 주는 것 말고 뭐가 중요한지 모르겠다.” “이혼의 기회를 준다.” “하하하.” “어쨌거나 오늘날 20대들은 좀더 자유롭게 섹스를 누리고 살고 있다. 다 선배님들의 혁명적인 성적 실천들 덕분이다.”

김씨는 “결혼 안 하고 출산 안 한다고 먼저 욕먹어주는 30대가 고맙기도 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위안이 되진 않는다. 가치는 40대, 다양한 연정은 30대가 점유한 이래, 지금의 20대는 “어떤 것도 자신들의 것은 없다”는 걸로 귀결된다. 이들이 쉽게 ‘감정노동’에 지치는 까닭일 것이다.

세대의 사랑을 규정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위험하다. 28살 희영과 42살 성철이 여름밤 손을 붙잡고 행복의 언어를 조각하며 서로의 사타구니를 꿈꾼다면, 그것은 20대의 사랑인가, 40대의 사랑인가. 어느 사랑도 ‘전설’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 성인의 사랑이 20대에 시작한다면, 사랑의 전설 또한 20대에 시작한다. 다만 전설은 현실이 만든다. 하지만 2009년 20대에겐 현실만 있고 전설이 없다.


20대 회춘 지원법
동거비를 지원하라!


청춘을 돌려다오! 20대가 ‘회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얼까?
지난 2월에 방송된 한국방송 는 “한국 등록금 너무 비싸요”라는 대학(원)을 다니는 미녀들의 아우성으로 시작됐다. “3만6천달러.” “와~.” 미 코넬대에 다니는 비키가 한 학기 등록금을 말하자 모두가 놀란다. 진행자 남희석이 묻는다. “핀란드는 어느 정도?” 따루가 대답한다. “핀란드는 없어요. 의료보험 격의 아주 소액의 회비가 있는데 10만원을 안 넘어요.” 남희석이 놀라 묻는다. “저 같은 외국인이 다녀도요?” “네.” “그런 나라가 어디 있어요?” “있어요.” “핀란드가 낙원일세.”
이렇게 고액 등록금은 ‘글로벌 스탠더드’도, 당연한 현실도 아니다. 아직도 유럽엔 등록금이 거의 없는 나라가 적잖다. 우리나라는 일단 비싼 등록금을 받은 뒤 대출을 해주는데, 이것도 미국식. 그나마 최근 정부가 졸업 뒤 일정 소득 이상이 생길 때까지 대출 원리금 상환을 유예해주는 ‘대학 학자금 대출제도 개선 방안’을 2010년부터 실시한다고 발표해 숨통이 트였다. 돈을 빌리는 때부터 이자를 내고, 소득에 관계없이 원금을 갚아야 했던 현행 ‘정부 보증 학자금 대출제도’는 신용불량자를 양산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취업난 속에서 올해 6월 현재 학자금 대출을 갚지 못한 ‘금융채무 불이행자’는 1만3800여 명에 이른다. 그러나 개선안도 여전히 현재의 부채를 미래로 미룬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 등록금 인상을 정책으로 제한하는 ‘등록금 상한제’ 등 근본적 대책은 여전히 요구된다. 지금처럼 등록금 마련을 위해서 알바를 뛰느라 진을 뺀다면 20대의 회춘은 어렵다. 사랑도 힘이 있어야 하니까.
그리고 ‘러브 러브’가 충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데이트 비용도 필요하다. 일본은 대법원 판결로 높은 시급을 보장해두었다. 도쿄는 766엔, 오사카는 748엔에 이른다. 그나마 일본에서 ‘프리터’ 생활이 가능한 이유다. 하지만 2010년 한국의 최저임금은 올해보다 겨우 2.75% 인상된 시급 4110원으로 정해졌다. 하루에 8시간씩 한 달을 꼬박 일해도 100만원을 넘기 어려운 수준이다. 이렇게 청년 노동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청춘이 생기를 찾기 힘들다.
또 이들에겐 사랑할 공간이 필요하다. 우석훈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는 “유럽에서 20대 초반에 독립이 가능한 이유는 정부가 주거비를 절반가량 지원하기 때문”이라며 “동거의 경우 더 많은 주거비를 지원하기도 하고, 학생은 보조금을 추가로 지급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게다가 동거를 결혼과 차별 없이 지원하는 제도가 젊은이의 사랑을 ‘활성화’한다는 것이다. 이어 그는 “서울 신촌 같은 젊음의 거리에 국가가 운영하는 하숙집이라도 지어서 무상으로 빌려줘야 한다”며 웃었다.
그러나 경제적 여건만 풀린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고미숙 고전평론가는 20대가 ‘감정노동’에 취약한 이유를 신체에서 찾는다. 감각을 소비하는 영역이 많아진 시대에 ‘몸’은 지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를 두고 그는 “광고를 통해 욕망 내지 성욕을 배설당한다”고 표현했다. 사랑 대신에 소비, 만지는 대신에 보는 것이 조장되는 소비주의 사회의 폐해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20대가 무엇보다 신체적 무게중심을 잡는 전략을 짜야 한다”고 말했다. 몸 안의 에너지는 한정돼 있으므로 광고, 스포츠 같은 외부의 자극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정리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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