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학기 한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내일이 오늘보다 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가?’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70여 명의 학생 중 머뭇거리면서 손을 든 학생은 10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내일이 오늘보다 좋아질 것이라고 실제로 생각하기보다는,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살아갈 수 있지 않느냐는 희망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 학생은 내일이 오늘보다 더 나쁘지만 않으면 그 정도로도 다행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딱 10년 전에도 같은 질문을 했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가 막 터지고 난 다음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다수의 학생들이 당연히 내일이 더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10년 전의 한국처럼 미래가 현재보다 좋아지는 건 당연한 것이라고 믿는 대학생들은 동아시아에서 중국밖에는 없다. 약 한 달 전 홍콩에서 열린 교육포럼에서 중국에서 온 50여 명의 사범대학생들에게 이 질문을 한 뒤 한국의 학생들은 비관적으로 생각한다고 전하자, 중국 학생들은 심지어 화까지 냈다. 한국 학생들은 왜 그리 패기도 용기도 없냐고.
길을 떠나는 게 내일을 위한 도전이 되는 것은 미래가 좋아질 것이라고 믿는 중국 학생들과 같은 경우에나 해당한다. 이미 경제위기 속에서 삶의 총체적 파탄을 경험한 한국 학생들은 길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그나마 가지고 있는 것도 잃어버리는 위험스러운 도박이다. 그래서 다수 학생들은 심지어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돌아다니는 삶을 피곤한 삶이라고 규정한다. 1990년 한때 ‘탈주의 감행’을 이야기하며 찬미되었던 ‘유목민’의 삶은 ‘피난민’의 삶으로 판명이 났다. 화려한 문화적 언사로 포장되었던 포스트모던의 실체는 신자유주의적 파탄으로 결론지어졌다. 이러한 삶의 파탄에서 학생들이 꿈꾸는 것은 소박한 삶이다. 한국에서 결혼해서 자식 낳고 알콩달콩 ‘농경민’으로 소박하게 사는 것이 지금 대학생들의 꿈이다.
이런 결과로 요즘은 젊은이들이 집에서 독립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떠나봤자 부모가 정착 자금을 대주지 못하는 중산층 이하의 아이들이 그렇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학생들은 계층을 가리지 않고 기회가 닿으면 어서 빨리 독립해 ‘자유’로운 삶을 찾는 것이 꿈이었다. 가족에 대해 글을 써보라고 하면 ‘지겨움’ ‘압박’ ‘숨막힘’과 같은 단어들이 거의 대다수 학생들의 리포트를 메웠다. ‘책임’에서 ‘자유’로운 유랑하는 삶, 그것이 그 시대의 구호였다. 당시엔 자유와 글로벌에 대한 욕망이 안정적인 삶에 대한 욕망을 압도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가득 찬 지금 집을 나서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개고생’에 가깝다. 10년 전과 달리 지금은 학생들이 자기 가족에 대한 애정과 사랑, 그리고 미안함을 주저없이 표출한다. ‘가족’ 하면 숨막히지 않느냐는 말에 몇 명을 제외하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돌봐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가 왜 숨막히냐고 반문한다. 그래서 학생들은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광고에 공감하며 키득키득 웃는다.
해외에 나가는 ‘개고생’을 선택한 것은 미래를 향한 꿈이거나 한국으로부터의 탈주가 아니라 어서 빨리 돈을 모아 한국으로 귀환하기 위함이다. 가까이 지내던 한 후배는 돈을 좀더 준다는 말에 두말없이 바레인으로 떠나 3년을 보내고 있다. 경제위기로 바레인에서의 승진이 좌절되자 그 녀석은 얼마 전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신청했다고 한다. 한국도 지금 엉망인데 좀더 있으면서 자유를 만끽하지 그러냐는 말에 녀석은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는 한국’을 두고 자기가 미쳤다고 거기 더 있냐고 반문했다. 1970년대 중동 건설 붐에 힘입어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떠났던 아버지 세대의 이주노동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처럼 오히려 우리는 ‘성공’이 목적이던 시대에서 ‘생존’이 목적인 시대로 후퇴했다.
망하거나 잘리지 않았다면 운이 좋아서일 뿐물론 집을 박차고 나와 떠돌아다니는 아이들도 있다. 가족과 같은 친밀성의 공간이 파탄 난 저소득층의 아이들일수록 떠나고 싶어한다. 학교를 그만두고 집 밖을 떠도는 여자아이들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자기 몸이 더 잘 팔린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렸다. 이 아이들은 자신들의 생존에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지긋지긋한 집과 학교를 떠나서 자신의 휴대전화에 거미줄처럼 엮여 있는 ‘언니들’의 네트워크를 따라 전국을 떠돌아다닌다. 그나마 남자아이들은 이렇게 떠돌아다니지도 못한다. 군대 때문이다. 몇 년간이라도 떠돌아다니려면 대학을 가야 한다. 그러지 않고 이들이 유목민이 될 수 있는 길은 밀항과 같이 범죄자가 되는 길밖에 없다. 실제로 하자센터에서 나와 같이 공부를 했던 한 아이는 일본에 가서 마술을 배우며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다니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대학을 갈 재주와 돈이 없는 처지였고, 밀항이니 뭐니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았지만 결국 얼마 전 군대에 간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여자애들은 말한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년이 돈 없고 공부도 못하는데다 못생기기까지 한 년들이에요.’ 그러나 ‘조건 만남’이라는 원조교제를 하며, 때로는 몸매 관리를 위해 한 달씩 단식원에 머물면서, 이 아이들이 꾸는 꿈도 ‘정착’이다. 좋은 남자 만나 알콩달콩 사는 것, 그것이 이 떠돌이들의 꿈이다.
그러나 이들이 꿈꾸는 그런 알콩달콩한 삶이 그대로 존재할 것 같지는 않다. 불확실한 삶(precarious life). 이보다 더 이 시대를 잘 설명하는 단어는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시공간은 안정적인 것이 아니라 형태를 갖추지 못한 채 이리저리 유동하는 불안정한(precarious) 것이 되었다. 삶은 언제 어디서 누구로부터 어떤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것이 되었고, 인간관계는 너무도 깨지기 쉬운 것이 되어버렸다. 단순히 직업만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사는(precarious) 것이 되어버린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친밀성 모두가 다 언제 깨질지 모르고 믿을 수 없는(precarious) 것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우연히 살아 있는 것이며, 아직 망하거나 잘리지 않았다면 그건 필연이 아니라 운이 좋아서 요행수로 벌어진 일이다. 삶이 불확실해진 시대, 이 모든 것의 결과는 감당할 수 없는 상처이다. 삶이 아니라 상처가 인간의 운명이 된 것이다.
그래서 생존이 지상명령이 된 시대에 젊은이들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친밀성의 파괴가 만들어내는 ‘상처’다. 지난 학기 강의를 들었던 학생 중 하나가 어쩔 줄 몰라하며 전화를 했다. 남자친구가 갑자기 한 달 전에 사라졌는데 말도 안 하고 군대를 갔단다. 훈련소를 나와 처음으로 전화해서 한 말이 자기를 사랑하지만 자기와 연애를 하는 것이 불안해서 시간이 필요했다는 말이었단다. 사랑의 파경이 가져올 상처에 대한 부담을 감당하지 못하고 군대로 도망친 것이다.
집을 나오지 않는 성장이란 없건만상처를 받지 않는 성장이란 없다. 집을 나오지 않는 성장이라는 것도 없다. 모든 영웅들의 신화가 보여주듯이 우리는 집을 떠나 사람들 사이에서 상처를 받으며 성장을 하고 어른이 되어 집으로 귀환한다. 집을 나와 존경할 만한 사람을 만나고, 그를 따라 자신의 삶에 대한 신념을 가지게 되고, 그 신념을 엄격하게 실천하며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주변의 사람에 대해 책임지고 위로하며 사는 삶, 이것이 바로 근대가 꿈꾼 어른이 되는 성장이 아니던가. 그러나 집을 떠나는 것은 개고생이고 상처는 감당할 수 없는 나락이 되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아무런 위로도 기대할 수 없는 불행한 삶을 산다. 위로가 되어야 할 가족은 짐이 되었으며, 위로하는 법을 배워야 할 학교와 지역사회는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정글이 돼버렸다. 단적으로 이런 시대에 성장은 가능하지 않다. ‘자유’를 도둑맞고 ‘성장’을 부정당하는 이들은 유목민이기는커녕 생존을 위해서는 ‘피난민’으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도망자’의 신세로 내몰리고 있다.
엄기호 연세대 강사·문화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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