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러미 글릭. 10대인 그는 2001년 9·11 테러 때 아버지를 잃었다. 그의 아버지는 뉴욕 무역센터 빌딩에 있었다. 빌 오라일리. 9·11 공격에 분노했던 뉴스 진행자다. 2003년 2월, 오라일리가 글릭을 불러 스튜디오에 앉혔다. 글릭은 그 얼마 전 부시 정부를 비판하는 신문 광고에 이름을 올렸다.
“내가 왜 놀랐는지 말해주지. 넌 극좌 입장에 서 있군.”
“부시 정부는….”
“네 아버지는 너처럼 현 정부를 테러리스트와 동일시하진 않을 거다.”
“당신은 9·11 (사망자) 가족들에 대한 동정심을 이용해 편협한 우익 관점을 강화하려고….”
“그건 쓰레기 같은 말이야. 난 9·11 가족들을 위해 너보다 훨씬 많은 일을 했어. 그러니 너는 그냥 입 닥치고 있어.”
“왜….”
“너는 이 세상과 이 나라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갖고 있어.”
“내가 9·11에 대한….”
“(손가락질하며) 그들이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 그들이 네 아버지를 죽였다고.”
“조지 부시는 어때요?”
“조지 부시가 뭐가 어때. 조지 부시는 그것과 아무 상관이 없어.”
“조지 부시가….”
“네 엄마가 이 방송을 안 보고 있다면 좋겠다. 난 더 이상 말하지 않겠어. 왜냐면 네 아버지를 위해.”
“당신 생각에는 9·11이….”
“입 닥쳐. 입 닥치라고.”
“나한테 입 닥치라고 하지 말아요.”
“가난한 노동자이자 좋은 미국인이었으나 야만인에 의해 살인당한 네 아버지를 생각해서 더 이상 말하지 않겠어. 잠시 뒤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이게 끝난 건가요?”
“그래 끝난 거야.”
최하위 직급까지 면접에서 ‘충성도’ 확인광고방송이 나가기 시작하자 오라일리가 글릭에게 말했다. “당장 꺼져. 널 찢어 없애버리기 전에.” 는 24시간 보도전문채널이다. 라는 이름의 이 뉴스 프로그램은 의 간판이다. 주요 뉴스 인물을 불러 사회자인 오라일리와 직접 토론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2009년 7월 넷쨋주 의 방송 편성표를 보면, 오전·저녁·심야 등 세 차례에 걸쳐 이 프로그램이 방영된다. 24시간 동안 21개 뉴스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으니, 의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방송을 미국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ABC〉 〈NBC〉 〈CBS〉 등 전통적인 공중파 뉴스와 직접 비교하긴 곤란하지만, 미국을 대표하는 뉴스 전문 채널로 〈CNN〉과 를 떠올릴 정도의 영향력은 있지요.” 최진봉 텍사스주립대 저널리즘 스쿨 교수의 말이다. 2003년 2차 걸프전쟁 이후 저녁 프라임 시간의 〈CNN〉 평균 시청자 수가 80만 명에 머문 반면, 는 그 2배인 160만 명에 이르렀다는 조사도 있다. 당시 는 방송 화면 구석에 성조기를 고정 배치했다.
“입 닥쳐”가 주를 이루는 뉴스 프로그램을 왜 보는 것일까? “미국에서 TV를 보는 사람은 가난하고 교육을 덜 받은 하위 계층이죠. 그들은 복잡한 사안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스포츠 프로그램을 보듯이 (오라일리 뉴스쇼를) 즐기는 거죠.” 강재호 미국 뉴스쿨 미디어사회학과 교수의 분석이다. 는 미국 5대 미디어 그룹 가운데 하나인 ‘뉴스코프’의 매체다. 뉴스코프는 루퍼트 머독이 소유하고 있다. 외에도 등의 매체를 거느리고 있다. 미국식 신문·방송 겸영의 대표 사례다.
경영진이 기사의 방향을 직접 기자들에게 강요한다는 것은 유명하다. ‘편집 노트’(editorial note)라는 것을 전자우편으로 매일 보낸다. 2004년에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Out Foxed)를 보면, 여러 명의 전직 기자·PD들이 극우 성향의 보도를 경영진이 어떻게 강요하고 압박했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2003년 5월9일, 경영진이 보낸 전자우편에는 낙태 문제를 특집으로 방송하라는 내용이 있고, 2004년 3월23일 문건에는 9·11 사태를 부시에게 불리하게 보도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다. 이에 항의하면 바로 해고된다. 의 최고경영자인 로저 에일스는 최하위 직급의 종업원까지 직접 면접하면서 조직에 대한 ‘충성도’를 반드시 확인한다. 로저 에일스는 공화당 출신 닉슨 대통령의 미디어 컨설턴트였다. 그는 “텔레비전은 ‘위대한 연기(performance)’”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뉴스의 드라마화, 드라마의 뉴스화
9개 위성TV 네트워크, 100개 케이블 채널, 175개 신문사, 40개 출판사, 40개 방송국, 1개의 영화사를 거느린 루퍼트 머독은 를 중심으로 미국에 뿌리를 내리는 동안, 막대한 자금을 들여 보수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해왔다.
2003년 미 의회는 지방 텔레비전 방송사 소유 상한선을 시청률 기준 총 35%로 제한하는 법안 제정을 추진했다. 이 기준에 따르면, 머독은 이미 소유한 방송사 몇 개를 매각해야 했다. 그는 로비를 벌여 상한선을 39%까지 올렸다. 의회가 특정 언론의 이익을 보호해준 것이다. 한국의 최근 상황과 닮았다. 거대 신·방 복합 미디어가 탄생하면 같은 일이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와 함께 눈여겨볼 또 다른 채널이 있다. 이다. 이 채널은 주로 드라마·오락·스포츠 프로그램을 방송한다. 지역 방송사들과 연계해 저녁 프라임 타임에는 가 만든 오락물을 내보내고, 나머지 시간은 지역 방송사의 자체 프로그램을 방영하게 한다. 한국의 SBS가 각 지역 방송사와 네트워크를 맺어 뉴스와 오락물을 내보내는 방식과 비슷하다.
미국 공중파 방송에 노출된 프로그램에 대한 7월 셋쨋주 시청률 조사 자료를 보면, 상위 10개 가운데 1위와 3위를 의 프로그램들이 차지했다. 각각 미국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사전 행사와 본 경기 중계였다. 강재호 뉴스쿨 교수는 “는 미국의 전통적·애국적 감성을 자극하는 대형 스포츠 이벤트를 단골로 독점 방영한다”고 전했다.
이 밖에도 는 등 한국에도 잘 알려진 드라마·오락물을 만들어 미 전역에 내보내고 있다. 강재호 뉴스쿨 교수는 만큼이나 의 콘텐츠 전략을 잘 살펴야 한다고 지적한다. “드라마에 (뉴스와 같은) 시의성이 있어요. 전쟁이 나면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같은 드라마를 전면 배치하는 거죠. 미국에 잠입한 테러리스트를 24시간 이내에 체포한다는 줄거리예요. 동시에 의 뉴스는 ‘드라마화’되고 있어요. 충격적이고 오락적으로, 하나의 드라마처럼 편집하죠.”
뉴스가 드라마를 닮아가고, 드라마가 뉴스를 좇아가는 방식이 폭스 채널의 핵심 전략이다. “현대의 정치 선동은 대중문화나 오락산업을 통해 이뤄지거든요. 가 만드는 여러 드라마와 오락물은 미국 극우 세력의 정치 선동의 형식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입니다.” 강 교수의 분석이다.
90% 국민이 가입한 케이블이 기반
쉬운 말, 단순한 내용, 명쾌한 대립 구도 등을 갖춘 폭스의 콘텐츠는 공화당 지지층인 중·하층 백인에게 급속히 먹혀 들었다. 이런 방식의 의제 설정은 한국 보수 신문들에도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최진봉 텍사스주립대 교수는 “보수 세력이 방송을 장악하면, 주요 의제에 대해 일방의 주장을 과격하게 제기하는 방식으로 보도하고, 드라마 등 오락물에선 선정성·자극성·상업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광고시장을 개척하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굳이 지상파 방송을 차지하지 않고서도 막강한 영향력과 상업성을 획득한 폭스의 전략은 여러 면에서 한국 보수 신문들을 자극한다. 종합편성채널은 방송채널사용사업자(PP)의 하나이지만, 보도·교양·오락·드라마 등 다양한 방송 분야를 편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위상이나 영향력에서 기존 지상파 채널에 버금간다.
시청자들로서는 한국방송, 문화방송, SBS에 이은 또 하나의 지상파 채널이 생기는 것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종합편성채널은 전체 국민의 90%에 육박하는 시청자가 가입한 유료방송 플랫폼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가시청권이 전국에 걸쳐 있다. 현재 케이블 TV에 1500만 가구, 위성방송에 240만 가구, IPTV에 50만 가구가 가입해 있다.
3개 보수 신문사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유일한 과제는 자금이다. 지상파 방송보다는 덜하긴 하지만, 종합편성채널을 운영하려 해도 한 해 4천억~5천억원의 대규모 자본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초기 투자금도 그 정도의 액수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어지간한 대기업들도 방송시장 참여를 꺼리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특정 신문사나 대기업 단독으로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신문사-국내 대기업-외국 자본’ 컨소시엄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이므로, 큰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이름과 직위를 밝히길 꺼리는 의 한 직원은 “1년 전부터 대기업과 중소 건설사를 포함해 컨소시엄을 만들어 방송에 진출하는 방안을 추진해왔다”고 전했다. 다만 “시장 상황이 녹록지 않은데 과연 (방송에 참여해도) 될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있고, 는 우리보다 그런 회의가 더 강한 것 같다. 는 기존에 운영했던 케이블 방송 Q채널의 노하우도 있고 해서 우리보다 더 적극적이다”라고 말했다.
3개 보수 신문은 에 못지않은 ‘뉴스 의제 설정’의 노하우가 이미 있다. 남은 것은 드라마와 오락물 등인데, Q채널이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 ‘중앙미디어네트워크’가 ‘타임워너’와 손잡고 함께 만든 Q채널은 등 외국에서 제작한 오락물, 1억원의 상금을 내건 퀴즈쇼, 조직폭력배·로또 등 선정적 소재의 뒷이야기를 파헤치는 교양물 따위를 방영하고 있다.
의 〈Q채널〉을 보라현재 미국은 6개 대기업 언론사가 전체 언론시장의 90%를 장악하고 있다. 지역 언론 대부분이 거대 미디어 기업에 통폐합됐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공영방송은 〈PBS〉인데, 그나마 정부 지원금은 전체 재정의 11%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선의의 기부를 받아 운영하고 있다. 최진봉 교수는 “〈PBS〉의 뉴스나 토론 프로그램은 좋은 평판을 얻고 있지만, 드라마 등 오락 프로그램에서는 다른 채널과 경쟁도 하지 못한다”고 전했다. 한국의 시청자들이 격투기 중계나 다름없는 뉴스에 중독될 날이 머지않았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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