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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인권침해 ‘부인’의 박람회장

스탠리 코언의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에서 보는 ‘낯익은 역겨움’
등록 2009-06-11 12:02 수정 2020-05-03 04:25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저 부인할 뿐이다.’ 지난 1월20일 새벽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의 한 빌딩에서 진압작전에 나선 경찰특공대원들이 옥상에서 점거농성 중이던 철거민대책위원회 회원을 체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경찰 수뇌부는 “정당한 공무 집행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이 말하는 지난 세기 비극이 한국에서 고스란히 반복된다. 사진 한겨레 김명진 기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저 부인할 뿐이다.’ 지난 1월20일 새벽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의 한 빌딩에서 진압작전에 나선 경찰특공대원들이 옥상에서 점거농성 중이던 철거민대책위원회 회원을 체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경찰 수뇌부는 “정당한 공무 집행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이 말하는 지난 세기 비극이 한국에서 고스란히 반복된다. 사진 한겨레 김명진 기자

지난 4월9일 오후 3시30분께 대전 유성구 탑림동, 건장한 사내 2명이 자그마한 체구의 여성을 야멸치게 끌어당긴다. 억센 아귀힘에 허리띠와 목이 잡힌 여성은 웃옷이 감겨 올라가면서, 등허리가 반나마 드러난 채다. 그는 연방 비명을 지른다. 끌려가지 않으려 버둥거리는 그를 두 사내는 가차 없이 길바닥에 내동댕이친다. 양복을 차려입은 한 사내의 손에 수갑이 들려 있다.

세계 공통, ‘부인’ 방식 세 가지

가로수를 붙잡아보지만 소용이 없다. 끝내 ‘봉고차’ 안으로 끌려 들어간 여성은 체념을 한 듯 보였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겐가? 좌석에 앉아 있던 여성의 목으로 느닷없이 사내의 손이 날아든다. “아저씨, 어제 왔어요. 정말 어제 왔어요…. 왜 때려요.” 어눌하게 흐느끼던 여성이 애원이라도 하듯 사내의 손에 고개를 파묻는다. 현장을 취재한 대전 가 홈페이지에 올린 동영상을 보면 폭행을 당한 여성은 중국에서 온 불법체류 이주노동자, 사내들은 대전출입국관리사무소 단속반원이다.

“제압하는 과정에서 몸싸움을 할 수는 있습니다.” 현장 상황이 고스란히 화면에 담긴 걸 아는지 모르는지, 취재진의 질문에 ‘출입국관리소 관계자’는 딴소리를 한다. “차량에서는 저항하는 모습이 없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차량 안에서는 수갑을 채운 상태라 때리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어지는 추궁에 ‘관계자’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그렇게 얘기하시려면 저 대화 안 할게요. 마음대로 하시든지 하시고요, 더 할 말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과격했는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과격한 거 없어요.”

지난 사건을 새삼 들춰보는 이유가 있다. 국가·공권력이 인권침해를 ‘부인’하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적 현상’만도 아니다. 불의한 권력은 스스로 저지른 행동을 일관되게 ‘부인’해왔다. 때맞춰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가 번역해 내놓은 (스탠리 코언 지음·창비 펴냄)을 보면, 폭행 사건 발생 직후 ‘출입국관리소 관계자’가 보인 반응이 인권침해를 ‘부인’하는 국가·공권력의 전형임을 깨닫는다.

영국 런던정경대(LSE) 사회학과 명예교수인 지은이는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를 피해 타향살이를 해온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아파르트헤이트(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정권의 인종차별 정책)를 몸으로 경험했다. 저명한 학자가 된 뒤에는 ‘이상’을 좇아 이스라엘로 ‘귀향’했지만, 이내 현실을 깨닫고 팔레스타인 주민 인권보호에 헌신하기도 했다. 옮긴이의 표현대로 코언 교수는 “20세기 인권의 격랑을 온몸으로 헤쳐온 인물”이다.

그는 국가·공권력이 인권침해를 ‘부인’하는 방식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분석했다. 첫째, ‘문자적 부인’이다. 엄연한 사실을 일어나지 않았다거나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폭행은 없었다’는 게다. 둘째, ‘해석적 부인’이다.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않지만, 그 사건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경우다. “제압하는 과정에서 (저항하기 때문에) 몸싸움을 할 수는 있다”는 식이다. 셋째, 어떤 사건에 흔히 따라오는 심리·정치·도덕적 함의를 부정하거나 축소하는 ‘함축적 부인’이다. “(폭행의 정도가) 그리 과격한 건 아니었다”는 말이 이에 해당한다.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

‘30원’에 해고되고 ‘죽창 시위대’가 되고

20세기 초반 벌어진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부터 나치의 홀로코스트,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주민 박해,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자행한 대규모 인권유린,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라틴아메리카 군부독재의 ‘더러운 전쟁’, 베트남전쟁 중 발생한 민간인 학살에 이르기까지. 은 “20세기 이후 발생한 다양한 인권침해 사례들을 종횡으로 일별할 수 있는 드문 경험”을 제공한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곳곳에서 ‘낯익은 역겨움’과 마주하게 된다. 옮긴이 조효제 교수의 지적처럼 “사회 전반에서 ‘부인’이 핵심 부조리로 다시 등장하고 있는 21세기 한국 사회는 이미 거대한 ‘부인’의 박람회장”이기 때문이다. 지난 1월20일 새벽 발생한 ‘용산 참사’가 이런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경찰은 직무수칙을 철저히 준수했다. 사망자 발생은 사실이지만 정당한 공무 집행 중에 일어난 것으로 인권침해라 할 수 없다. 농성자들이 뿌린 시너에 화염병에 불이 붙어 난 사고이므로 경찰에 책임을 묻긴 어렵다. 외부 세력이 개입했으니, 선량한 피해자들의 순수한 자구 움직임이 아니다. 진압 책임자 사퇴 주장은 반정부 세력의 체제 전복 시도다. 공무원의 적법한 행위를 처벌하면 누가 열심히 일하겠는가.”

‘부인의 정치’가 판을 치는 사이 ‘참사’는 ‘방화 사건’으로 바뀌어갔다. 스러져간 철거민 5명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 “무전기를 꺼놔서 현장 상황을 몰랐다”던 경찰총수 내정자는 사임의 뜻을 밝히면서도 “공권력이 절대 불법 앞에 무릎 꿇어선 안 된다는 조직 내외의 요구를 잘 알고 있다”며 끝까지 억울해했다.

그러니 법을 어기고 재판에 개입했던 대법관이 “정당한 사법행정권을 행사했을 뿐”이라며, 빗발치는 사퇴 압력을 모르쇠로 받아내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전직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 앞에 애통해하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놓은 분향소를 분탕질한 경찰 책임자는 들끓는 비판 여론에 “일부 전경대원의 실수”라고 거리낌 없이 거짓을 말했다.

그래서다. 21세기에도 지난 세기 ‘비극’은 어김없이 재현되고 있다. 운송료를 1건당 ‘30원’만 올려달라던 택배노동자들은 무더기로 해고됐고, 복직을 요구하며 저항하자 업무방해로 고소를 당해 수배자로 전락했다. 지난 4월29일 택배노동자 박종태는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내몰렸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만장을 치켜든 노동자들은 쉽게 ‘죽창 시위대’가 됐고, 서러운 죽음에 관심이 없는 ‘CEO 대통령’은 ‘엄정 대처’를 입에 올렸다. “수많은 시위대가 죽창을 휘두르는 장면이 전세계에 보도돼 한국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혔다. 글로벌 시대에 국가 브랜드를 높이기 위해선 이런 후진성은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고. 총체적 부인, ‘도덕적 공황’의 극치다.

단순한 준법보다 더 고귀한…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어낼 것인가? 지난해 들불처럼 번졌던 촛불의 열정은 용산 참사와 택배노동자의 죽음 앞에 분명 침묵을 지켰다. 그새 지친 건가? ‘내게 닥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혹, 지난 선거에서 지역구 개발 약속에 표를 몰아준 ‘욕망의 정치’가 다시 표출된 건 아닌가? 코언이 가해자-피해자와 함께 인권침해의 한 축을 이루는 ‘관찰자’ 혹은 ‘방관자’에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대다수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역사를 창조’하는 것보다 ‘생계를 꾸리는’ 일에 더 관심이 많은 법”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옳다. 그럼 우리가 스스로에게 기대할 수 있는 ‘요구수준’은 어느 정도나 돼야 할까? ‘불의에 대한 분노,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연민’ 정도면 어떨까? ‘시인’하자. 둔감해지는 것도 ‘부인’이다. 코언은 이렇게 적었다.

“법에서는 보통 시민들에게 준법 시민이 되라고 요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회정의는 분명 법 이상의 어떤 것을 요구한다. ‘훌륭한 시민성’이라는 상태도 있을 수 있다. 이는 영웅적인 것까지는 아니지만 단순히 법을 지키는 것보다는 더 고귀한 상태를 말한다. ‘훌륭한 시민성’이라는 덕목은 거창한 영웅적 행동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평범한 침묵을 장려하지도 않는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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