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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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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같은 방식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들끓던 애도가 잦아든 거리, 강경 진압에 저항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슬픔은 켜켜이 쌓이고 쌓이네
등록 2009-06-09 04:31 수정 2020-05-02 19:25

그렇게 한 주가 지났다. 6월3일 저녁 9시, 조문객이 끝없이 늘어섰던 서울 덕수궁 돌담길은 다시 연인들의 거리로 돌아갔다. 수백 명이 열지어 기다렸던 대한문 앞 분향소엔 10여 명의 조문객이 국화를 들고 기다렸다. 그들의 등 뒤엔 100여 명의 시민들이 작은 광장에 흩어져 여전히 ‘그분’을 기리고 있었다. 대한문 옆의 돌담엔 ‘노무현을 살려내라’ 만장이 바람에 날리며 여전한 그리움을 호소하고 있었다. 어떤 사내는 영정에 절하고 돌아서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새로운 분향소 옆의 부서진 분향소, 찢어진 천막은 경찰이 주말에 ‘다녀간’ 흔적을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은은한 향내는 선선한 초여름 저녁 바람을 타고 흘렀다. ‘안내’ 명찰을 달고 분향소를 지키는 시민은 말했다. “그래도 조문이 끊이지 않아요.”

국민장이 끝나도 애도는 끝나지 않았다. 6월4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여전히 조문객을 기다리는 시민분향소. 그 옆에는 경찰에 의해 부서진 옛 분향소 잔해도 보인다.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국민장이 끝나도 애도는 끝나지 않았다. 6월4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여전히 조문객을 기다리는 시민분향소. 그 옆에는 경찰에 의해 부서진 옛 분향소 잔해도 보인다.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한 맺힌 죽음이 있었고, 애도의 물결이 일었고, 분노가 들끓었고, 항쟁의 기념일도 다가오고 있었다. 또다시 촛불이 타오르지 않을까? 누구는 우려하고 누구는 기대했다. 그러나 비교적 조용한 한 주가 흘렀다. 5월의 마지막 밤들인 30일과 31일의 촛불집회는 참가자보다 전경이 더 많은 채 끝났다. 장석준 진보신당 부설 상상연구소 연구기획실장은 “서거 첫 주엔 추모 열기가 정서적 애도인지 정치적 분노인지 모호했다”며 “영결식 뒤를 보면, 정치적 분노가 없지는 않지만 정서적 애도에 가까웠단 생각”이라고 풀이했다.

가슴에 눌러쓴 ‘평생 꼭 투표하겠습니다’

“아직은 애도의 시간.”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역사학)는 그렇게 말했다. 애도의 행렬이 거리로 나와서 분노의 구호를 외치기보다는 각자가 슬픔을 삭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박진 다산인권센터 활동가는 덧붙인다. “그러나 마음에 저축된 분노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아가 한홍구 교수는 사람들이 촛불의 교훈을 되새기고 있다고 말한다. “탄핵 저지의 촛불은 민주세력에 다수당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개혁의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지난해 촛불은 아무리 거리에서 외쳐도 이명박 정부가 듣지 않는단 사실을 알려줬다. 그렇게 촛불은 두 번의 실패를 통해서 교훈을 얻었다. 의회에 맡겨서 안 되니까 거리로 나왔는데, 거리로 나와도 안 되니 다시 의회로 눈길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촛불은 똑같은 방식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역시나 투표다. 수많은 조문객은 종이에, 가슴에 꾹꾹 눌러썼다. ‘평생 꼭 투표하겠습니다.’ 한홍구 교수는 그것을 “유권자의 의식과 기준을 확 바꾼 혁명”으로 평가한다. 장석준 실장도 “민심이 정치에 스며든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촛불이 지난 4월의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 결과에 영향을 끼쳤던 것처럼. “촛불의 효과는 2007년 대선, 2008년 총선의 보수적 선택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란 전망을 바꿔놓았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던 수도권 중도층의 민심을 2007년 이전으로 되돌렸다. 노 전 대통령 서거로 수도권의 변화가 부산·경남 등 지방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장 실장의 분석처럼, 실제 6월3일 실시된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지지율은 대구·경북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한나라당을 앞섰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같은 진보 정당의 지지율도 부쩍 상승했다. 오는 10월엔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가 치러지고, 2010년 6월2일 지방자치선거가 예정돼 있다. 더구나 지자체 선거는 같은 해 5월23일에 돌아오는 서거 1주년의 추모 열기 속에서 치러진다.

촛불 정국에서도 30% 넘던 지지율이…
영결식이 끝나기 무섭게 경찰은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을 다시 ‘장악’했다. 5월30일 서울광장에서 끌려나오는 시민들. 사진 한겨레 김태형 기자

영결식이 끝나기 무섭게 경찰은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을 다시 ‘장악’했다. 5월30일 서울광장에서 끌려나오는 시민들. 사진 한겨레 김태형 기자

선거는 멀고 슬픔은 깊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저항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안진걸 참여연대 민생희망팀장은 “합법적인 조문으로 이미 사람들은 촛불을 들었다”며 “지금도 지지 정당을 바꾸는 것으로, 한국방송 를 보는 대신에 문화방송 를 보는 것으로 유·무형의 저항을 이어가고 있다”고 보았다. 지난해 촛불 정국에도 좀처럼 30%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던 한나라당 지지율은 마침내 30% 아래로 떨어졌고, 영결식이 치러진 당일의 시청률은 몇 해 만에 를 앞섰다. 안진걸 팀장은 “대규모 시위로 드러나지 않아도 반이명박 정서가 더욱 깊어지고 넓어졌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물론 강경 진압의 침묵 효과도 있다. 박진 활동가는 “수많은 전경에 첨단장비를 동원하고 법률 조항까지 활용해 단순 집회 참가자도 범법자로 만드는 물리력의 겁주기 효과가 분명히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강력한 물리력 동원의 이면에서 자신감의 결여를 읽기도 한다. 박 활동가는 “분향소가 마련된 서울역 광장 곳곳에 숨어 있는 경찰을 보면서 동의받지 못한 권력의 자신감 상실이 애처로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감이 곧바로 정권의 위기로 이어지진 않는다. 민주화의 역설적 혜택을 보수 세력이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장석준 실장은 “쇠고기 정국의 촛불도 정권을 바꾸자는 요구는 아니었다”며 “1987년 민주화 이후에 형식적 민주주의에 대한 동의가 이뤄져, 정권이 반민주적 수단을 동원해도 최소한의 민주적 원칙을 깨지 않는 한에선 정권 교체 요구까지 나아가진 않는다”고 분석했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문화콘텐츠학)는 또 다른 측면을 지적했다. 그는 “한국의 수구 세력은 국민이 말로는 저렇게 하지만, 선거에선 정작 다르게 나타날 것이라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광주보다 더한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한편 촛불집회의 성과와 더불어 한계를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문학)는 “지금 상실의 대상은 단순히 노무현 개인을 넘어서 노무현을 죽음으로 몰고 간 무엇”이라며 “그러나 대의제 민주주의 틀을 넘어서기 꺼리는 한국의 중간층은 불만의 원인인 이명박 정부라는 기표를 제거할 방법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촛불을 민주화 이후로 추구해온 정상 국가에서 벗어난 이명박 정부에 대한 항의로 보았다. 그러나 중간층의 이러한 열망은 새롭게 등장한 기득권 정권 앞에서 꺾였다. 이 교수는 “한국의 기득권층은 사익 추구를 곧 공공성으로 착각하는 집단”이라며 “87년 이후로 민주주의 룰을 만들어온 중간층의 자부심은 기득권 정부의 벽 앞에서 무너졌다”고 지적했다. 그렇게 촛불은 중간층에 좌절의 경험으로 남았다. 그래서 대의제 안에서 좌절된 욕망을 위무하는 굿 같은 촛불을 다시 들기는 어렵단 것이다. 여기에 장석준 실장은 촛불 방식의 한계도 지적한다. “촛불은 누구나 참여 가능한 수준의 저항으로 대중의 동의를 얻었다. 그런데 정권의 강경 진압에 맞서 이런 방식의 저항이 유지되기 어렵다는 딜레마에 부딪혔다. 그래서 집회가 유지되려면 다른 방식이 필요한데 그것은 대중의 동의를 얻기 어렵다.”

그러나 잠복한 슬픔은 당장의 행동을 넘어서 사람들 가슴에 깃발을 세우고 있다. 한홍구 교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80년 광주에 빗댔다. 그는 “광주의 슬픔이 쌓이고 쌓여서 민주화운동을 낳았듯 그의 죽음도 당장 드러나진 않아도 반드시 돌아온다”고 전망했다. 한민족 역사에서 이런 죽음을 그냥 흘려버린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유관순의 죽음이 3·1 운동을, 순종의 죽음이 6·10 만세운동을, 김주열의 죽음이 4·19를, 박종철의 죽음이 6월 항쟁을 낳았다”며 “그의 서거도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크나큰 변화로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더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고종이나 순종 같은 조선시대 임금보다 훨씬 친근한 존재여서 사람들이 느끼는 일체감이 더하고 슬픔이 깊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까지 더해져 광주보다 더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조문객이 느낀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그는 네댓 시간을 기다려 조문을 했던 이들을 “조문객이 아니라 상주”라고 표현했다. 남의 일이라면, 그토록 오랜 시간을 기다려 조문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5천 년 역사에서 민중이 한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집단적 죄책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며 “그의 죽음은 공분을 넘어서 각자의 개인적 원한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마침내 광주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부엉이의 시대다. 앞으로 수천수만의 부엉이떼가 날아오를 것이다.”

이렇게 도저한 슬픔은 어떤 괴물로 나타나 한강의 기적을 삼키고 여의도를 흔들까. 김민영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올해 6·10은 결과가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했다.




대한문 앞 풍경
특강, 노동자 집회, 민노당 단식…



5월의 대한문은 비장했고 뜨거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 전날인 5월28일까지 101만 명이 이곳 분향소에 조문했고, 자원봉사자도 2천여 명이 몰렸다. 영결식 이후의 대한문 앞은 비록 인원은 줄었으나 추모 열기를 이어가고 있다.
6월2일 밤부터 대한문 앞엔 새바람이 불었다. 언론개혁시민연대와 인권실천시민연대가 ‘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 길거리 특강’을 시작한 것이다. 매일 저녁 7시30분부터 열리는 특강엔 교수, 법조인, 사회단체 활동가 등 다양한 이들이 강사로 나섰다. 퇴근 시간이 지나자 촛불을 든 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6월4일엔 최강욱 변호사가 ‘국방부 선정 불온서적과 군법무관 파면’에 관한 강의를 했는데, 400여 명의 시민이 참여했다.
강의를 듣던 김상기(40)씨는 “회사가 근처라 인터넷을 통해 여기서 강의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오늘 처음 나왔다”며 “영결식 전엔 줄이 길어서 못했던 분향도 하고, 특강을 통해 모르던 것도 배워서 매일 참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강연을 마친 최 변호사도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많이 올 줄 몰랐는데, 다들 집중하고 공감해줘 좋았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그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에 광고하는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을 했다가 소송을 당했다는 한 시민은 악수를 하며 “우리가 를 이길 겁니다”라고 외쳤다.
그리고 투쟁하는 노동자가 남았다. 6월3일부터 화물연대 노동자들은 매일 저녁 7~9시 대한문 앞에서 집회를 연다. 이들은 6월4일 서울시청 앞 광장이 열리면서 그곳으로 진입을 시도했지만 10분도 안 돼 전경들에 의해 밀려났다. 화물연대 박상현 법규부장은 “여러분은 지금 불법 집회를 하고 있습니다”란 방송을 들으며 “내일도, 모레도 목표는 시청 앞”임을 다짐했다고 한다.
6월4일부터는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이 대한문 옆 돌담길 아래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강압통치 중단하고 국정기조 전환하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내각 총사퇴와 국정기조 전환, 이명박 대통령 사과, 노동 생존권 보장 등이 요구 사항이다. 이날 저녁을 굶은 이정희 의원이 ‘길거리 특강’과 ‘화물연대 특강’에 모두 초청됐다. 이 모습을 보던 한 시민은 대한문 앞 바닥에 붙은 대형 방명록에 “민주당 의원은 단식 안 하나”라고 썼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임지선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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