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가 ‘좌파 적출’의 과녁이 됐다. 지난 5월18일, 문화체육관광부는 한예종에 대한 감사 결과를 통보했다. △‘통섭’ 교육 중지 △‘통섭’ 관련 교수 징계 △이론과 축소·폐지 △서사창작과 폐지 등 모두 12건에 대해 주의·개선·징계 처분을 내렸다. 황지우 총장에 대한 파면·해임 등 중징계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학교 안팎에서는 구체적인 이름을 거론하며 몇 명의 교수가 함께 쫓겨날 것이라는 말들이 횡행하고 있다.
모든 일은 1년 전부터 시작됐다. 황지우 한예종 총장은 과의 인터뷰에서 “(통섭 사업 첫해인) 지난해 3월 학교를 방문한 유인촌 문화부 장관에게 주요 현황 및 사업을 보고하는데, ‘통섭 같은 거 하지 마라. 학교 설립 취지가 실기와 순수예술 중심이니 하던 거 계속 하고 새로 일을 벌이지는 말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황 총장은 “당시 (장관에게 하는) 첫 사업 보고였기 때문에 즉석에서 장관이 그렇게 발언하는 것에 조금 당황했고, 한예종에 대해 이미 어떤 판단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통섭’ 프로젝트의 원래 이름은 ‘U-AT(유비쿼터스 앤드 아트테크놀로지) 통섭’이다. 한예종이 6개원(음악원·연극원·영상원·무용원·미술원·전통예술원) 사이의 융합교육을 위해 2008학년부터 시작한 4년짜리 연구·개발(R&D) 사업이다. 2007년 국회 의결을 거쳐 확정된 이 사업은 2008년 한 해 동안 35억여원의 예산을 지원받았지만, 지난해 국회에서 관련 예산이 전액 삭감됐고 올해부터는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황 총장의 증언은 ‘통섭’ 프로젝트가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에 문화부가 이 사업의 중단을 결정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5월18일, 문화부가 한예종에 통보한 12건의 주의·개선·징계 처분 등 감사 결과 가운데 3건이 ‘통섭’ 사업 관련 내용이다. 방만한 운영, 무자격자의 교수 채용 등 이번 감사의 주된 지적 사항이 ‘통섭’ 사업에 집중돼 있다. 국회의 정상적 의결을 거쳐 진행 중인 연구사업을 정권 교체 직후 ‘표적 감사’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통섭’을 문제 삼는 정부의 태도 뒤에는 지난해부터 진행된 우파 진영의 ‘통섭’이 있다. 우파 문화단체, 우파 언론 그리고 정부 사이에 일정한 교감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문화미래포럼, 영화계 좌파 청산 등 요구뉴라이트 계열 각종 단체의 출범이 한창이던 2006년 10월, 소설가 복거일, 문학평론가 정과리 등 문화계 인사 70여 명이 참여한 ‘문화미래포럼’이 출범했다. 당시 복거일 대표는 “친정부(노무현 정부) 성향의 단체들이 문화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로부터 소외받은 사람들이 현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자연스레 어울리게 됐다”고 말했다. 이 단체의 장미진 사무처장은 대선 이후 유인촌 문화부 장관의 정책보좌관이 됐다.
지난해 9월, 문화미래포럼은 국회 문광위 소속 한나라당 의원에게 ‘문화예술계 현안과 과제’라는 자료를 제출했다. 이들은 자료에서 △민예총·예총 등 문화예술단체의 개혁 △한예종의 개혁 △영화계 좌파 세력의 청산 등을 주요 현안으로 꼽고 있다. 특히 한예종에 대해선 “각종 특혜를 누려온 한예종은 문화예술 분야의 좌파 엘리트 집단의 온상으로 새 정부가 들어선 마당에 전면적인 구조 개혁이 필요하다”고 적었다.
같은 시기인 9월3일, 문화미래포럼은 ‘전국예술대학교수연합회’와 함께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날 주제 발표에 나선 정재형 동국대 교수는 “한예종은 대규모 종합대학처럼 통합교육 과정, 예술경영 과정, 아시아동반자사업 등 지나치게 확장을 일삼고 있다”며 “설립 취지에서 벗어난 한예종의 운영은 국내 예술교육 정책의 실패작이므로 구조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한예종의 조직 축소와 구조 개혁을 촉구한 이 심포지엄은 국정방송인 KTV에도 그대로 방영됐다.
잠시 잠복했던 한예종 논란은 올 들어 본격화됐다. 과의 인터뷰에서 황 총장은 “올해 1월8일, 문화부 국장이 찾아와 ‘총장의 거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고 말했다. 문화부의 총장 사퇴 압력이 노골화된 것이다. 당시 황 총장은 이를 거절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정권이 바뀌었다고 국립대 총장이 바뀐 전례가 있느냐. 내부 동요와 사회적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내년 2월) 임기까지 있겠다고 답했다”고 말했다.
우파 진영의 분위기는 이후 더욱 험악해졌다. 3월부터 우파 계열의 인터넷 언론들이 한예종 관련 기사를 집중 보도했다. 추부길 전 홍보기획비서관이 창간한 를 비롯해 , 그리고 이들 기사를 함께 싣고 있는 등의 인터넷 언론은 ‘한예종의 좌파들’을 집중 부각했다.
이 매체들은 황지우 총장을 비롯해 심광현·이동연·전규찬·진중권 교수 등을 구체적으로 지목하며 “좌파 출신으로 실력도 없는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이들 매체의 보도가 시작된 직후인 3월부터 문화부의 종합감사가 시작됐다.
‘공식적으로’ 이 모든 일은 지난 1년 동안 서로 별개의 조직이 펼친 별개의 일이다. 그러나 황지우 총장은 “정상적인 행정 판단에 의해 감사가 이뤄진 것이 아니라 한예종을 문제 삼는 ‘외부’의 주장을 국가권력이 대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감사 진행 과정에서 “직원들을 용의자 취급하고, 자료를 요청해 받는 게 아니라 사무실에 가서 자료 일체를 싹쓸이했으며, (우파 단체들이 문제 삼은) 통섭 교육, 협동 과정, 이론학과 등에 (감사가) 집중돼 있었다”고 황 총장은 밝혔다.
유인촌 장관 “지난 1년간 모든 역량을 쏟은 일”사태의 이면에는 다른 대학 예술대 교수들도 있다. 문화미래포럼과 함께 한예종의 구조조정을 주장하고 있는 전국예술대학교수연합회는 지난 2005년 6월에 만들어졌다. 이 단체는 창립 때부터 “예술교육 분야의 대외 교섭단체 역할을 수행하겠다”고 밝혔는데, 그 핵심은 한예종의 ‘국립예술대학’ 승격 반대에 있었다.
한예종은 현행법상 대학이 아닌 ‘각종 학교’로 분류돼 있다. 반면 한예종 재학생들은 국립대학을 다니고 있다는 자각이 강하다. 법률과 현실의 괴리를 메우기 위해 한예종은 1999년과 2005년 두 차례에 걸쳐 ‘국립예술대학 설치법’의 제정을 요구한 적이 있는데, 예술대 교수들이 이를 저지하려고 뭉친 셈이다.
한예종 관계자는 “전국예술대학교수연합회의 주축은 중앙대·동국대·한양대 등 영화·연극 관련 학과를 설치한 학교들”이라며 “이들 대학의 교수가 우파 문화단체와 교감을 이루면서 새 정부 들어 문화권력의 주요 위치에 배치됐다”고 말했다. 유인촌 문화부 장관은 중앙대 연극과 출신이다. 유 장관은 지난 4월 인터뷰에서 노무현 정부 시절 임명된 기관장들에 대해 “지난 1년간 이걸 정비하는 데 모든 역량을 쏟았다”고 말했다.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장 등의 중도 퇴진을 지칭하는 이야기다. 문화부는 이들이 사퇴를 거부하자 집중 감사를 벌여 징계를 추진했다. 그리고 이제 한예종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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