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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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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태어나 못 먹으니까 작아져요

6923가구 대상 ‘어린이 불평등’ 실태 최초 보고서 요약…
인지 발달 지수도 빈곤층이 높다가 2~3살에 역전
등록 2009-05-08 02:33 수정 2020-05-02 19:25

때로는 숫자가 말을 건다. 보건복지가족부와 서울대 산학협력단이 최근 내놓은 ‘2009 한국 아동·청소년 종합실태조사’는 어린이의 계층·지역별 격차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 조사보고서다. 2007년 12월31일 주민등록인구 통계를 기준으로 전국 6923가구를 소득계층별·지역별로 표본추출해 조사했다. 그 결과를 담은 300여 통계표의 수치들은 가난한 어린이들을 대신해 묻는다. “우리 이렇게 자라도 되는 건가요?”

절대빈곤에 몰렸어요 빈곤층은 가구 소득이 최저생계비 이하인 경우다. 이런 가정에서 자라는 어린이의 비율을 ‘아동·청소년 절대빈곤율’이라 부른다. 한국 어린이들의 절대빈곤율은 7.8%다. 이들 빈곤층의 월평균 총소득은 약 92만원이다. 조금 사정이 나은 경우를 ‘차상위’ 계층으로 분류한다. 최저생계비의 100~120% 정도의 가구소득을 올리는 경우다. 그래봐야 월평균 총소득이 144만원인데, 이런 가정에서 자라는 어린이는 4.2%다. 둘을 더하면 12.0%다. 한국 어린이 가운데 열에 하나 이상은 140여만원 미만의 월수입을 올리는 가정에서 자라고 있다는 얘기다. 두 빈곤층을 제외한 나머지가 ‘차상위 이상’ 계층이다. 월평균 357만원을 번다.
가난에는 국적도 있다. 최근 2년 사이에 태어난 빈곤층 아기들의 10.9%(0~2살 기준)는 부모 가운데 한 명이 다른 나라에서 왔다. 같은 연령대의 차상위 이상 계층에서는 그 비율이 2.6%에 불과하다.

한부모와 살아요 빈곤층에 해당하는 12~18살 어린이의 58%는 ‘한부모’ 가정에서 지낸다. 나이를 먹을수록 한부모 가정의 비율은 점차 늘어난다. 18.8%(0~2살), 36%(3~5살), 38.2%(6~8살), 50.8%(9~11살)의 순이다. 부모와 이별하는 일도 알고 보면 가난한 집 이야기다. 차상위 이상층 아이들 가운데 6.5% 정도(12~18살 기준)만 한부모 슬하에서 자란다.
대신 가난한 아이들은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가 키운다. 주 양육 담당자를 조사했더니, 빈곤층 3~5살 어린이의 20.8%를 조부모나 친척이 주로 기르고 있었다. 차상위 이상층 아이들 가운데는 4.6%만 이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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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놀고 공부해요 부모가 일하러 나가면, 가난한 집 아이들은 혼자 지낸다. 부모건 조부모건 친척이건 아이를 주로 맡아 기르는 이를 ‘주 양육자’라 한다. 이들 주 양육자가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시간을 조사했다. 6~8살 아이를 둔 빈곤층 양육자의 13.1%만 ‘거의 매일’ 책을 읽어준다. 차상위 이상층은 44.1%가 그렇게 한다. 책 읽어주는 시기가 끝나면 학교 숙제가 시작된다. 12~18살 자녀를 둔 빈곤층 부모의 5.7%만 매일 아이의 숙제나 학업을 돕는다. 차상위 이상층 부모(15.5%)의 3분의 1 수준이다.

부모와 함께하는 일에 돈이 든다면, 자녀-부모 사이의 거리는 더 벌어진다. 차상위 이상층 부모의 66.5%가 한 달에 1회 이상 아이와 함께 외식한다. 빈곤층은 28.3%만 그렇다. 아이와 함께 한 달에 1회 이상 쇼핑하는 차상위 이상층 부모는 49.8%다. 빈곤층 부모는 23.5%만 그렇게 한다. 차상위 이상 부모의 23.4%가 한 달에 1회 이상 아이를 데리고 나들이를 한다. 빈곤층 부모는 15.1%만 그렇다. 영화나 공연 관람(빈곤층 7.1%, 차상위 이상층 14.1%), 여행(빈곤층 1.2%, 차상위 이상층 3.4%) 등도 마찬가지다(이상 12~18살 기준). 이번 조사는 외식과 나들이의 ‘질’에 대해선 따로 묻지 않았다. 그 대목에 이르면 격차는 더욱 커질 것이다.

원래부터 둔한 건 아니었어요 가난이 부모와 자녀를 떼어놓으면, 아이는 또래의 부잣집 아이들보다 뒤처지기 시작한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한갓 옛이야기임을 이번 조사는 생생히 입증한다. 8살을 기준으로 사회적 사고력 지수(빈곤층 11.84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모두 24개 인지·언어 발달 영역 가운데 14개 영역에서 0~2살 빈곤층 어린이의 발달지수가 차상위 이상층보다 높았다. 1살 아기들의 언어 발달 능력을 보면, 듣기(빈곤층 5.35 > 차상위 이상 5.13), 말하기(빈곤층 6.42 > 차상위 이상 6.33), 쓰기(빈곤층 0.74 > 차상위 이상 0.66) 등에서 모두 빈곤층 아이들이 조금씩 앞선다. 그러나 2~3살 이후부터 이런 수치가 역전된다. 4살을 기준으로 보면, 듣기(빈곤층 8.47 아이들의 타고난 능력조차 가난이 짓누른다는 의미일까? 조사연구팀은 일단 ‘과잉 해석’을 경계했다. 이순형 서울대 아동복지학과 교수는 “조사관들이 빈곤층 아이들을 면접하면서 좀더 친근하고 상세하게 임하는 등의 ‘바이어스’(편향성)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실은 더 똑똑하다’는 가설은 이번과 같은 조사를 몇 해에 걸쳐 반복한 뒤에야 확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이 아파요 이런 일은 신체 발달 상태에서도 드러난다. 역시 과잉 해석할 일은 아니겠지만, 이번 조사를 보면 0~2살 아이들 가운데 빈곤층 영유아의 체중과 신장은 각각 11.8kg, 85.6cm로 나타났다. 차상위 이상층 영유아는 11.4kg, 82.3cm다. 그러나 12살이 지나면 차상위 이상층 어린이들의 덩치가 조금 더 커진다.

대신 빈곤층 아이들은 병원을 자주 간다. 1년간 외래 진료를 받은 횟수를 봤더니 빈곤층의 영유아(0~2살)는 15.1회, 차상위 이상층의 영유아는 그 절반인 8.6회로 나왔다. 나이가 들면 아예 입원하는 경우가 늘어난다. 12~18살 기준으로 빈곤층 어린이의 14.5%가 지난 1년간 병원에 입원한 경험이 있었다. 반면 차상위 이상층 어린이는 3.5%만 입원했다.

아픈 데는 이유가 있다. 가난한 아이들은 밥을 못 먹는다. 12~18살 빈곤층 어린이 가운데 아침(38.8%), 점심(1.2%), 저녁(3.6%)을 거르는 비중이 여전히 높다. 특히 빈곤층 부모들을 상대로 식생활에 대한 주관적 인식을 조사한 결과가 놀랍다. 0~2살 아이를 둔 빈곤층 부모 가운데 ‘먹을 게 떨어져도 살 돈이 없다’고 답한 경우가 32%에 이르렀다. 객관적으로 식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가난하다는 건 아니지만, 주관적으로 ‘먹을 것을 충분히 사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차상위 이상층에선 3.9%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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