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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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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라서 잘린다, 30대 여성 비정규직

해고된 명지대 행정조교를 통해 본 불황 앞 ‘조용한 학살’…
OECD 최저 여성 취업률에 더해 실업률 더 높아져
등록 2009-04-03 07:17 수정 2020-05-02 19:25
명지대에서 해고된 서수경씨가 3월25일 용인 자연캠퍼스 행정동 앞에서 손팻말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학교 쪽은 해고 노조원들이 건물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출입문을 봉쇄했다.

명지대에서 해고된 서수경씨가 3월25일 용인 자연캠퍼스 행정동 앞에서 손팻말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학교 쪽은 해고 노조원들이 건물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출입문을 봉쇄했다.

여기 꿈 많은 여고생 ‘100명’이 있다. 이들 가운데 ‘83명’이 대학에 들어간다. 여고생의 대학 진학률은 83%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다. 그런데 말이다. 이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쯤 되면 OECD 꼴찌로 떨어진다. 대졸 이상 고학력 여성이 일하는 비율은 59%다. ‘83명’ 가운데 ‘49명’ 정도가 일을 하는 셈이다. OECD 국가 중 가장 낮다. 여성은 남성 월급의 61% 정도만 받는다. 역시 OECD 최하위다.

노동의 질은 어떨까? 여성 3명 가운데 2명은 비정규직이다. ‘49명’ 가운데 ‘30명’은 비정규직 일자리를 갖고 있는 셈이다. 남자 정규직 직원이 100만원을 벌 때 여자 비정규직은 40만원밖에 못 번다. ‘49명’이 30대가 됐다면 이 가운데 1~2명은 지난달에 잘렸을지 모른다. 2월 30대 여성 고용률은 51.3%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4%포인트나 줄었다.

지난해 행정고시 여성 합격자는 처음으로 50%를 넘어섰다. 외무고시 여성 합격자는 65%를 차지했다. 사법고시 여성 합격자 역시 40%대에 육박했다. 사람들은 ‘거센 여풍’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노동시장에서 여성은 여전히 ‘마이너리티’에 불과하다. 몇몇 현상을 갖고 언론과 남성들이 ‘여성상위 시대’로 몰아갈 뿐이다. 바꿔놓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여성들이 왜 고시나 공무원 시험에 집착할까? 그만큼 기업들이 안 뽑아주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일반 회사에 들어가도 임신과 출산 뒤 살아남은 여성들은 그리 많지 않다.

올해엔 미국에서 불어닥친 불황으로 취업문이 꽁꽁 얼어붙었다. 여성에겐 더욱 힘든 좁은 문이었다. 한 달 100만원의 10주짜리 시한부 인턴에 만족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햄릿이 지금 우리나라에 살았더라면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했을 것이다.

노동시장에서 여성은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있을까? 한 비정규직 여성의 삶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그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30대 수다쟁이 아줌마였다. 하지만 여성노동자로서 그의 삶은 남달랐다. 우울하게도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

어설픈 투쟁

2009년 3월24일 오전 10시.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명지대 인문캠퍼스 행정동 앞. 정문 어귀에는 진달래가 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봄이지만 꽃샘바람 때문에 쌀쌀했다. 학생들은 시위에 익숙했는지 한번 쓱 훑어보고는 종종걸음으로 지나쳐갔다.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하나 되어 나선다~ 승리의 그날까지~.” 가 흘러나왔다. 빨간 머리띠에 빨간 조끼. 12명이 ‘우리는 일회용 소모품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일하고 싶을 뿐입니다’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서 있었다. ‘단결투쟁’의 머리띠 밖으로 파마머리와 단발머리가 봄바람에 나부꼈다. 모두 30대 여성이었다.

그들은 이 건물 로비로 몰려갔다. ‘총장님’을 만나 해고의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시위하는 여성보다 더 많은 남자 직원들이 계단을 막아섰다. 여성들은 감히 뚫을 생각을 못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앉아 “노동자의 오늘은 학생들의 미래다. 비정규직 철폐하라”고 구호를 외쳤다.

1시간쯤 흘렀을까. 한 여성이 뛰어왔다. “금방 총장님이 옆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가버렸는데. 어떡해, 어떡해….” 어수룩한 30대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학교 캠퍼스 안에 임시로 친 텐트 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딱딱한 빵으로 늦은 아침을 때웠다.

한 여성 실업자가 3월26일 오전 서울 마포구 도화동 서울서부종합고용지원센터에서 번호표와 신청서를 들고 실업급여 신청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한 여성 실업자가 3월26일 오전 서울 마포구 도화동 서울서부종합고용지원센터에서 번호표와 신청서를 들고 실업급여 신청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서수경(38)씨. 대학노조 명지대 지부장이라는 거창한 감투를 쓰고 있다. 하지만 석 달 전만 해도 그는 단지 ‘서 조교’였다.

“사람들이 조교라고 하면 ‘대학원생이 1~2년 잠깐 하는 것 아니냐’고 물어요. 그게 아니에요. 행정(일반) 조교는 대학에서 행정 사무일을 하고 있어요. 대학에서 월급을 받는 직원이죠. 근로계약서 한 장 없이 부서장의 임용 추천으로 1년 단위로 재임용돼왔어요. 13년 동안 일한 사람도 있어요”라고 말했다.

서씨와 잠깐 얘기를 나눴다. 그는 심각한 얘기를 웃으며 말했다. 30대 아줌마의 수다였다. 잠깐 얘기를 나눈다는 게 1시간이 훌쩍 넘었다. 그는 그동안 살아온 얘기를 하면서 딱 한 번 울었다. 아들 얘기를 했을 때다. 목이 메였다. 그는 하염없이 휴지로 눈물을 닦았다.


■ 비정규직법
2007년 7월1일부터 시행 중인 비정규직법은 2년 이상 일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을 뼈대로 한다. 하지만 기업들은 비정규직을 해고하거나, 정규직과 임금체계가 다른 직무급제를 만들거나, 비정규직 업무를 외주 용역에 맡기는 식으로 변칙 대응하고 있다.
노동부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하는 고용 한도를 ‘2년’에서 ‘4년’으로 바꾸는 개정안을 입법 예고한 상태다. 현행법대로라면 오는 7월 100만 명에 이르는 비정규직의 2년 계약 기간이 끝나고, 정규직 전환을 원하지 않는 기업들에 의해 대량 해고 사태가 빚어지게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한나라당은 4월 임시국회에서 반드시 처리한다는 태도다. 하지만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한 MB 악법”이라며 개정안 저지 의사를 밝히고 있다.

“엄마, 단결하러 가?”

10살짜리 꼬맹이 아들은 학교에 갈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엄마 단결하러 가?”

아들은 안다. 그가 학교에서 잘린 것을. 하지만 무슨 이유로 잘렸는지는 모른다. 비정규직이어서 잘렸다는 것을 아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며칠 전 아들은 엄마 손을 잡고 텐트에 온 적이 있었다. 텐트에서 아들은 TV 오락 프로그램 코너 ‘1박2일’에서처럼 야외취침을 하고 싶다고 했다. 아들은 “야외로 캠핑 온 것 같다”며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자”고 엄마를 졸랐다.

많은 조교들이 ‘더럽고 치사해서’ 학교를 떠났다. 하지만 그는 떠나지 못한다. “7년이나 일했던 곳인데…. 솔직히 지금 이 나이에 다른 곳에 취업하기도 힘들어요. 내일 모레면 마흔인데. 막말로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지 않으면 먹고살기 힘들잖아요.” 솔직한 아줌마였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아들 때문이다. “아들한테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죠. 자식 키우는 엄마 입장에서 비정규직은 우리 세대에서 없어져야 해요.” 그의 목이 메였다.


■ 30대 여성 실업률
지난 2월 30~39살 취업자는 581만 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16만7천 명(-2.8%)이나 줄었다. 40~50대 취업이 다소 늘어난 것과 비교하면 30대 실업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를 알 수 있다. 특히 30대 여성의 고용 상황은 최악이다. 30대 남성의 경우 지난 2월 취업자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9천 명 줄어드는 데 그친 반면, 여성은 무려 15만7천 명이 줄었다. 2월 고용률은 30대가 70.7%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7% 포인트 줄어들었다. 하지만 30대 여성 고용률은 51.3%로, 3.4%포인트나 감소했다.


교섭 중 받은 해고 통지

조교들은 지난해 12월2일 노조를 만들었다. 열흘 뒤엔 노조 창립식도 열 예정이었다. 하지만 학교는 허가해주지 않았다. 창립식 참석 차량을 정문에서 막는 등 노조를 인정하지 않았다. 단체교섭을 요청했지만 번번이 연기했다. 네 차례 미루다 지난 1월12일에야 처음 교섭을 했다. 서로 인사만 했다. 2차 교섭에서는 노조원들의 참석을 방해했다. 대학 곳곳에 회의실이 있었지만 학교는 일방적으로 굳이 돈을 들여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 장소를 잡았다.

고용률 변화 추이

고용률 변화 추이

1월15일 행정조교 95명에게 해고통지서가 전달됐다. 설날(1월26일)을 10여 일 앞둔 때였다. “다른 회사에서 해고를 당한 친구 얘기를 들으니 해고통지서를 받으면 한참 멍해진다고 하는데, 전 오히려 화가 났어요. 보통 해고통지서엔 경영 상황이 안 좋아서 부득이 해고한다고 쓰여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우리에게 보내온 통지서는 업무참조 공문 한 장이었죠. 비정규직 직원은 사람 취급을 안 하는 거죠.” 서씨는 한숨을 쉬었다.

해고통지서는 ‘협조 공문’으로 돼 있었다. “우리 대학교 일반 조교 중 2009. 1.15자 임기 만료자를 붙임과 같이 통보하오니 업무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해고통지를 받은 그때는 교섭이 진행 중이었다. 교섭 중에 해고통지를 받은 것이다.

“연대는 연세대란 뜻인가?”

지난해 7월 서씨는 조교협회장이었다. “조교들은 설날과 추석 명절에 학교에서 선물을 못 받아요. 그래서 조교끼리 한 달에 1만원 정도 회비를 거둬 명절 때 조그만 선물을 나눠주곤 했죠. 조교협회장은 이런 일을 했어요. 그런데 투쟁의 가장 앞자리에 서게 됐어요.”

그때 재계약을 앞둔 조교 40명이 부서장들을 만났다. 그런데 이상했다. 부서장마다 사직을 권고했는데 이유가 달랐다. ‘학교가 어려워서’ ‘학교의 슬림화(구조조정) 때문에’ ‘비정규직법 때문에’ 등 이유는 가지각색이었다. 학교에서 해고지침을 내렸는데 부서장마다 이유를 에둘러 표현했기 때문이다. 8월 말 조교 40명은 쫓겨나듯 나갔다. 빈자리는 새로 임용된 조교로 채워졌다. 다만 이름이 행정조교에서 행정보조원으로 바뀌었다.

2009년 2월 재계약을 앞둔 나머지 조교들은 뭉칠 수밖에 없었다. 조교들은 학교에 면담을 요청했다. “학교 쪽과 면담할 때마다 부서장은 일반 조교를 인간으로 보는 게 아니라 일회용 반창고로 보는 듯했어요. 잠시 필요할 때 붙였다 떼어버리는 반창고.”

“제발 어렵고 힘들다는 근거를 보여주시든지, 슬림화 계획이라도 제대로 설명해주십시오. 최소한의 설명도 없이 무조건 어려우니 나가라고 말씀하시는 건, 너무 비인간적인 게 아닌가요?” 이렇게 따져도 봤다.

하지만 “요즘 취업난인데, 후배들도 일하게 자리 좀 비켜주지!”, 학교 쪽은 이런 식이었다.

처음엔 조교 142명 가운데 70명이 뜻을 같이했다. 하지만 대자보를 붙이고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학교 쪽은 묵묵부답, 강경 대응으로 일관했다. 곧바로 40명으로 줄었다.

서씨는 지난해 10월 명지대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성명서를 올렸다. ‘박용석’이라는 학생이 ‘연대하겠습니다’라는 글을 써놓았다. “‘연대’가 뭔지 몰랐어요. 연대가 연세대를 줄인 말인가라고 생각했을 정도였죠. ‘투쟁’이라는 말은 남의 말인 줄 알았어요. 그렇게 우리의 투쟁은 시작된 거예요.”

지난해 11월 성수진 부지부장이 누구한테 들었는지 헐레벌떡 와서는 “노동조합을 만들면 무조건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노조를 만들려 하니, 다시 사람들이 떨어져나갔다. 노조원이 되면 빨갱이가 되는 줄 아는 사람도 여전했다. 30명으로 줄었다. 해고통지를 받고 난 뒤 다시 10명이 떨어져나갔다. 현재 노조원은 20명이다.

“무서운 사립대와 그 사립대의 오너 아들(현 이사장)에게 덤빈 건데, 너무 힘들더군요.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 한국 여성 임금, 남성의 61% ‘OECD 최악’
2005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남성이 한 달에 월급 100만원을 받는다면 여성은 61만원을 받는다. 성별 임금 격차는 뉴질랜드가 91로 가장 작았고, 프랑스(89), 폴란드(89), 덴마크(88), 헝가리(87), 스웨덴(85), 오스트레일리아(84), 스페인(83) 등은 OECD 평균(81)보다 높았다.
주당 40시간 이상 근무하는 여성 노동자 비중은 우리나라가 77%로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았다. OECD 평균은 49%다.

“앞으로도 열심히 일해주시기 바랍니다”

2003년 3월 서씨는 명지대 용인캠퍼스 공대 교학팀 조교로 들어왔다. 사학연금 등 각종 보험과 세금을 떼고 그의 손에 떨어진 월급은 100만원가량이었다.

하지만 30대에 애 딸린 여자가 그만한 일을 잡는 게 어디냐고 생각했다. 대학교에서 일한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예산 짜기, 공대 실습비 작성, 편입생 성적 인증, 성적 입력, 졸업 사정, 자격증 심사 서류, 수강 등록 확인, 추가 등록자 확인, 입학 준비, 졸업 준비, 시간표 만들기…. 그의 일이었다.

학교는 조교연수회 때마다 “조교는 교원으로 분류돼 있고 매년 하는 재계약은 그냥 형식”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7월 초 의례적인 행사이기는 했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교연수회가 열렸다. 그 연수회에서 한 부서장은 “지금까지 열심히 일해주신 여러분께 감사하며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일해주시길 바랍니다”라고 했다.



■ 여성 3명 중 2명 비정규직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2008년 3월 추산한 국내 비정규직 규모는 858만 명이다. 남성은 정규직이 508만 명(55.0%), 비정규직이 416만 명(45.0%)으로 정규직이 더 많다. 반면 여성은 정규직이 233만 명(34.5%), 비정규직이 442만 명(65.5%)으로 비정규직이 두 배가량 많다. 남자는 2명 중 1명, 여자는 3명 중 2명꼴로 비정규직인 셈이다.
남성은 20대 초반과 50대 후반에서만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많다. 그러나 여성은 20대 후반을 뺀 모든 나이대에서 비정규직 비율이 더 높았다. 아기를 낳은 여성이 다시 일자리를 찾으려 할 때 대부분 일자리가 비정규직이기 때문이다. 같은 비정규직이라고 해도 여성의 임금은 더 낮았다. 남성 정규직 임금을 100이라 할 때 남성 비정규직은 52, 여성 비정규직은 40으로 집계됐다.

“애 딸린 아줌마보다 미스를 더 좋아하니…”
여성 나이별 경제활동 참가율

여성 나이별 경제활동 참가율

1999년 아들을 낳았다. 정신없이 키웠다. 그러다 시어머니한테 스트레스를 받았다. “‘옆집 아기 엄마는 3개월만 쉬고 직장에 가더라. 누구누구 엄마는 돈을 그렇게 많이 번다고 하더라.’ 시어머니가 아무 뜻도 없이 말씀하신 건데, 집에 있다 보니 엄청 스트레스더라고요.”

그래서 생활정보지 구인란을 뒤졌다. ‘주부사원 모집’에다 동그라미를 쳐가며 전화를 돌렸지만, 마지막엔 ×표만 남았다. 대부분 다단계 모집광고였다. 그나마 몇 개 안 되는 사무직도 애 딸린 아줌마가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때 마침 명지대에서 일하는 한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만두게 됐는데 대신 조교로 일할 수 있느냐”는 연락이었다. 서씨가 이력서를 내러 학교에 가보니 담당자 책상에는 이미 이력서가 6~7개 쌓여 있었다. “처음엔 담당자가 저를 뽑으려 하지 않았대요. 왜냐면…. 남자들이 다 그렇잖아요.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애 딸린 아줌마보다 미스를 더 좋아하니….”

다행히 서씨는 막판 면접까지 갔다. 하지만 학교에선 한 가지를 더 요청했다. “혹시 1~2년 안에 아기 가질 계획이 있느냐? 사람을 다시 뽑고 하면 업무에 차질이 생긴다. 아기를 가질 생각이라면 취업이 곤란하다.” 서씨는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며칠 뒤 그는 합격통지 전화를 받았다.

“여자가 하기엔 힘든 일인데…”

1995년 대학 졸업반. 환경 관련 중소기업과 제약회사에 여러 차례 취업 면접을 봤다. 하지만 줄줄이 미역국을 마셔야 했다. 3학년 때 환경기사 자격증도 따며 취업을 준비했다. 매번은 아니지만 가끔 장학금도 탔다. 하지만 면접 때마다 여자를 기피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환경 쪽은 여자가 하기 힘든데 여기에 왜 들어오려느냐”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졸업을 했지만 취업이 안 됐다.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러다 교수님이 학교 시설실에서 일하는 촉탁직을 소개해줬어요. 촉탁직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죠. 학원비와 용돈이라도 벌려고 면접을 봤어요. 그런데 덜컥 합격이 됐어요.” 곧바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왔다. 다른 곳에 취업할 엄두가 안 났다. 그렇게 4년이 흘렀다.

1999년 4월 학교는 촉탁직 사원 50명에게 해고를 예고했다. 그때 서씨는 임신 중이었다.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애를 가진 아줌마가 따질 여유가 없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같은 해 8월20일 해고통지를 받고 며칠 뒤인 28일 첫아들을 낳았다.



■ 대졸 여성 취업률 5년 만에 최저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지난해 12월 여성 채용 인원을 밝힌 상장기업 350곳을 분석한 결과, 채용 인원 1만3799명 가운데 여성은 20.1%인 2770명에 그쳤다. 여성 채용 비율은 2005년(28.3%)이 가장 높았다. 2006년(27.0%)과 2007년(24.3%)은 감소 추세였다. 올해는 5년 전과 비교해볼 때 6.0%포인트 줄어 최저치를 나타냈다.

꿈 많은 대학 1학년

명지대 자연캠퍼스 생물학과 91학번. 대학 1학년, 모든 것을 이룬 듯했다. 서수경씨는 자유를 느끼고 싶었다. 모형 비행기 동아리 ‘날개’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당시 2학년이었다. “학기 초에 강경대가 죽었어요. 총학생회에선 휴교하자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 과는 공부하자고 했어요. 그때는 학생운동인지 뭔지도 몰랐죠. 우린 강경대가 담 타넘다가 죽었는 줄 알았어요. 그냥 1학년이었으니까, 아무것도 모를 때였죠.” 그때도 캠퍼스에는 진달래가 폈다.


■ 여고생 대학 진학률, OECD 최고
우리나라 여고생의 대학 진학률은 83%로 OECD 국가 중 최고다. 여성의 국가고시 합격률은 무섭다. 외무고시(65.7%)에 이어 행정고시(51.2%)도 절반을 넘었다. 사법고시도 38.01%에 이른다. 한국은행 신입 직원도 절반(47.2%)이 여성이다.
하지만 불황 탓에 취업보다 결혼을 선택하는, 이른바 ‘취집’(취업 대신 시집)으로 관심을 돌리는 여성이 늘어나고 있다. 구인구직 포털 알바몬이 지난해 11월 대학생 94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취업 대신 결혼을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여대생의 73.6%가 그렇다고 답했다.


문화면 아닌 사회면에서 보는 합창단 소식

2009년 봄. 서씨처럼 그들도 비정규직이다. 그들은 요즘 바람 부는 거리에서 과 같은 오페라를 부른다. 공연장은 서울 세종로 문화체육관광부 청사 앞이다. 공연은 신문 문화면이 아닌 사회면에서 다뤄진다. 그들은 국립오페라 합창단원이다. 이들은 지난 1월8일 이소영 국립오페라단장한테서 구두로 해고를 통보받았다.

국립오페라합창단은 2002년 정은숙 전 국립오페라단장 시절 오페라 공연 전문 합창단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창단됐다.

그동안 합창단이 연습비란 이름으로 갖고 간 돈은 월 70만원이었다. 공연이 있을 때마다 받는 공연 수당을 합쳐야 월 100만~120만원이었다. 1년 급여를 모두 합쳐도 3억원가량이다. 베이징올림픽 연예인 응원단이 열흘 동안 쓰고 온 2억원의 1.5배에 그친다. 42명 단원 중 30명이 파업에 동참하고 있다.

‘국립오페라단의 비정규직 자르기’는 배우 문성근의 형수인 ‘정은숙 전 단장 지우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나돈다. 유인촌 문화부 장관은 전 정부 인사 지우기에 팔을 걷어붙인 장본인이다. 국립오페라단은 단원 42명에게 해고를 통보한 뒤 인턴 7명을 새로 뽑았다. 문화부는 문화예술 분야에서 100명의 인턴을 채용했다.

2009년 1월 실업급여 신청자

2009년 1월 실업급여 신청자

도재경 문화부 공연예술과장은 “국립오페라 합창단원들이 해고됐다는 말은 적절치 않다. 이들은 4대 보험을 못 받았다. 즉, 단원은 직원이 아니고 예술작품에 출연한 출연자다. 계약 해지는 단장의 권한”이라고 말했다. 조남은 공공노조 국립오페라합창단지부장은 “합창단 첫 모집 공고에 상설화를 확약했고 열심히 하면 상임화를 해주겠다고 여러 번 말했다. 그래서 그저 열심히 노래만 했다. 일자리 문제를 정치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맞벌이는 구조조정 1순위?

시화공단의 한 중장비 부품업체에 다니는 이종범(35)씨. 그는 전자부품업체에서 일하는 아내와 ‘주야 맞교대’로 아이들을 돌본다. 새벽 6시에 일어난 아내가 초등학교 6학년 큰딸과 4학년인 쌍둥이 아들 둘의 아침밥을 챙겨 먹이고 출근하면, 밤샘 근무를 마친 남편이 집으로 돌아온다. 2주일이 지나면 회사 근무조가 바뀌기 때문에 남편과 아내의 역할도 자연스럽게 교대된다.

회사에서는 미국발 금융위기 뒤 회사는 물량이 끊겼다며 희망퇴직 신청을 받고 있다. 4월이 되면 구조조정은 가시화될 것으로 보인다. 맞벌이 부부는 정리해고 대상이 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도 돈다. 지난해 상반기만 해도 한 달 240만원 정도 받던 남편 월급은 요즘 150만원으로 줄었다. 이씨는 “넉 달 전부터 아이들 학원을 모두 끊었다. 원래 잠이 많은 편인데, 요즘은 걱정이 많아져서인지 새벽 4시면 잠에서 깬다”고 말했다.

구조조정 회오리가 불어닥칠 것이란 전망에 우울한 금융권 역시 같은 고민이다. 김금숙 사무금융연맹 여성국장은 “1997년 외환위기 때 금융권 부부사원이 해고 1순위였다. 잘리는 건 대부분 남편이 아닌 아내였다. 그같은 선례가 있기 때문에 금융권 여성 노동자들은 요즘 불안해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잘리는 사람들

3월24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종합고용지원센터. 실업급여를 타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꼬맹이 아이들을 데리고 온 30대 여성들도 꽤 보였다. 안경을 쓴 긴 웨이브 머리의 최아무개(31)씨는 이날 처음 이곳을 찾았다. 그는 이달 초까지 조그만 여행사에서 일했다. “유럽 관광을 맡았죠. 그런데 지난해부터 환율이 너무 올라 관광객을 유럽에 보낼수록 오히려 마이너스였어요.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요즘 중소기업과 소기업은 너무 힘들어요. 게다가 최근에 잘린 친구들을 보면 대부분 여자들뿐이었어요.”

지원센터의 한 상담 직원은 “올해 들어 실업급여를 신청하는 사람이 20~30% 증가했다. 요즘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1월 이곳에서 실업급여를 신청한 사람을 나이별로 분석해봤다. △30대 917명 △40대 730명 △50대 740명 △60대 366명이었다. 특히 30대 가운데 여성은 456명(49.7%)으로, 여성 비율이 절반에 육박했다. 나머지 나이대에선 여성 비율이 30~40%로, 남자들이 훨씬 더 많았다. 최일영 취업지원 팀장은 “30대 여성들이 다른 나이대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이유는 비정규직 때문인 것 같다. 어린이집이나 학교 등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30대가 많은데, 이들이 새 학기가 되면 재계약을 못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본의 쇠파이프를 가장 먼저 맞다

1991년 4월26일 명지대생 강경대(당시 20살)씨는 시위 도중 숨졌다. 그는 학교 앞 거리에서 경찰에 몰린 시위대를 빼내다 사복체포조(백골단)에게 붙잡혀 집단 구타를 당했다. 백골단들은 쇠파이프를 들고 그의 머리를 때렸고 구둣발로 짓밟았다. 그는 담장을 넘어 학교 안으로 피하려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던 중에 숨졌다. 강경으로 치달아온 경찰의 시위 진압 방식이 빚어낸 참사였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도심 거리에는 다시 쇠파이프가 배회하고 있다. 백골단이 아닌 탐욕스런 자본이 쇠파이프를 들고 무자비하게 노동자를 내리친다. 가장 먼저 쓰러진 사람들이 바로 30대, 여성, 그리고 비정규직이다.

‘조용한 학살’의 계절, 꽃샘바람이 분다.

글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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