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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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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의 사멸은 자유·평등의 개막

출간에 앞서 미리 살펴본 칼 폴라니의 혁명적 노작 <거대한 변형>
등록 2009-03-27 11:37 수정 2020-05-03 04:25
인터넷 포털 구글의 검색창에 ‘자본주의’(Capitalism)란 단어를 입력한다. 찰나의 순간, 눈앞에 2960만여 건의 정보가 펼쳐진다. 홍수처럼 쏟아진다. 정보의 수명은 그렇게 갈수록 짧아진다. 그래서다. 고전이 사라지는 시대, 칼 폴라니의 노작 의 내구성이 새삼스럽다. 1940년대 쓰인 책이 60여 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진정한 빛을 발하고 있다. 위기의 시대를 꿰뚫어본 그의 예지에서 새로운 시대로 가는 영감을 얻어낼 수 있을까? 은 오는 5월 발간 예정인 폴라니의 저서 (홍기빈 옮김·도서출판 길 펴냄)의 완역본 원고를 미리 입수해 그 일부를 발췌해 싣는다. 편집자

이 책에서 주장하려는 명제는 다음과 같다.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다. 그런 제도가 잠시나마 존재하면 사회의 인간적·자연적 실체는 없어지고 만다. 인간은 그야말로 물리적으로 파괴당할 것이며, 환경은 쑥밭이 될 것이다. 사회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지만, 그렇게 하는 족족 시장의 자기 조정 기능은 손상을 입고 산업의 일상적 작동이 무너지는 등 다른 방향에서 사회는 위태롭게 됐다. 시장 체제의 발전은 바로 이런 딜레마 사이에 정해진 길을 따라 흘러가, 마침내 그 시장 체제에 기반한 사회조직 전체를 무너뜨리기에 이른 것이다.

허구로 조작된 시장
사회를 압도한 시장의 횡포는 공황으로 이어졌다. ‘상품’이기를 거부당한 사람들은 실업자로 거리를 떠돌기 시작했다. 1932년 대공황의 한복판에서 한 끼를 해결하려는 이들이 미 뉴욕 무료급식소 앞에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사진 연합/AP

사회를 압도한 시장의 횡포는 공황으로 이어졌다. ‘상품’이기를 거부당한 사람들은 실업자로 거리를 떠돌기 시작했다. 1932년 대공황의 한복판에서 한 끼를 해결하려는 이들이 미 뉴욕 무료급식소 앞에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사진 연합/AP

시장에 의해 통제되는 경제란 우리 시대 이전의 그 어떤 때에도 심지어 원리 차원에서나마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 19세기 내내 학문의 이름으로 지겹게 울려퍼졌던 주문(呪文)과는 달리, 교환을 통해 이익과 이윤을 얻는다는 동기가 인간의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물론 시장이라는 제도는 후기 석기시대 이래로 아주 일반적인 것이 됐지만, 경제생활에서 시장이 부수적인 역할 이상을 차지한 적은 결코 없다. 역사나 민족지를 뒤져보면 다양한 종류의 경제형태들이 보이며 또 그 대부분은 시장 제도를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시장에 의해 통제되고 조절되는 경제란 우리 시대 이전에는 엇비슷한 모습조차 찾을 수 없다.

노동·토지·화폐는 분명 상품이 아니다. ‘매매되는 것들은 모두 판매를 위해 생산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가정은 이 세 가지에 관한 한 결코 적용될 수 없다. 노동이란 인간 활동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인간 활동은 인간의 생명과 함께 붙어 있는 것이며, 판매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 활동은 생명의 다른 영역과 분리할 수 없으며, 비축할 수도, 사람 자신과 분리해 동원할 수도 없다. 그리고 토지란 단지 자연의 다른 이름일 뿐인데, 자연은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현실의 화폐는 그저 구매력의 징표일 뿐이며, 구매력이란 은행업이나 국가 금융의 메커니즘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 중 어떤 것도 판매를 위해 생산되진 않는다. 그러므로 노동·토지·화폐를 상품으로 묘사하는 것은 전적으로 허구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노동·토지·화폐가 거래되는 시장은 바로 그런 허구의 도움을 얻어 조직된다. 따라서 이런 ‘상품 허구’는 사회 전체와 관련해 결정적인 조직 원리를 제공하는 셈이며, 이 원리는 사회의 거의 모든 다른 제도에도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끼친다. 즉 이 원리에 따르면, 시장 메커니즘이 현실 세계에서 상품 허구의 원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어떤 제도나 행위도 결코 허용돼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토지·화폐에 관해서는 이런 원리를 적용할 수 없다. 인간과 자연환경의 운명이 순전히 시장 메커니즘 하나에 좌우된다면 사회는 완전히 폐허가 될 것이다. 구매력의 양과 그 사용을 시장 메커니즘에 따라 결정하는 것도 똑같은 결과를 낳는다.

이런 체제 아래서 인간의 노동력을 그 소유자가 마음대로 처리하다 보면 그 노동력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사람’이라는 육체적·심리적·도덕적 실체도 소유자가 마음대로 처리하게 된다. 인간들은 갖가지 문화적 제도라는 보호막이 모두 벗겨진 채 사회에 알몸으로 노출되고 결국 쇠락해간다. 악덕, 인격 파탄, 범죄, 굶주림 등을 거치면서 격심한 사회적 혼란의 희생물이 되어 죽어갈 것이다. 자연은 그 구성 원소들로 환원돼버리고, 주거지와 경관은 더럽혀진다. 또 강이 오염되며, 군사적 안전이 위협당하며, 식량과 원자재를 생산하는 능력도 파괴된다. 마지막으로, 구매력의 공급을 시장기구의 관리에 맡기면 영리기업들은 주기적으로 파산하게 될 것이다. 인간과 자연이라는 사회의 실체 및 사회의 경제조직이 보호받지 못하고 시장경제라는 ‘악마의 맷돌’에 노출된다면, 무지막지한 상품 허구의 경제체제가 몰고 올 결과를 어떤 사회도 단 한순간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자유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의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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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방임이란 전혀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인간 만사를 그야말로 제 갈 길 가도록 내버려두기만 한다면 자유 시장이란 결코 나타날 수 없었다. 자유무역과 직결된 주도적 산업이던 면화제조업만 하더라도 보호관세, 수출장려금, 간접적인 임금보조금 따위의 도움을 빌려 나타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자유방임이라는 것 자체도 국가에 의한 법령과 집행을 통해 나타난 것이었다. 자유방임 경제가 의도적인 국가 활동의 산물이었던 반면, 그 뒤에 나타난 자유방임 제한 조치들은 완전히 자생적으로 시작된 것들이었다. 자유방임은 중앙 계획에 의한 것이었지만, 중앙 계획은 중앙의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사회조직의 세속 종교 교리로서 온 문명 세계를 품 안에 넣었던 경제적 자유주의이기에, 지난 10년 동안 여러 사건들이 벌어졌다고 해서 즉시 물러날 리는 없다. 사실 그 원리가 부분적으로 빛을 잃어버리면 오히려 그 원리에 대한 사람들의 신앙이 더욱 강화되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이런 경우에는 항상 자유방임 원리의 신봉자들이 앞으로 나서, 모든 어려움은 사실 자유방임의 여러 원리들을 모두 완전하게 적용하지 못해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할 여지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이야말로 오늘날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이 마지막으로 붙들고 있는 주장이다.

통속적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의 발전을 설명하면서 조야한 계급이론에 갇히고 말았다. 무수한 시장을 만들어내자는 사회적 압력과 그를 둘러싼 여러 세력들의 지형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도 이윤에 눈먼 한 줌의 금융가들의 움직임으로 모두 설명하려 하는 것이다. 제국주의라는 엄청난 사건조차도 자국 정부를 꼬드겨 (국가를) 대자본의 이익을 위한 전쟁으로 끌어넣으려는 자본가들의 음모로 설명해버렸다. 자유주의자들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적대적으로 맞서는 계급들로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관점에 선다는 점은 매한가지다. 이렇게 이 둘은 서로 어깨를 겯고서, 시장 사회의 성격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러한 사회에서 보호주의가 맡는 기능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포괄적인 조망을 할 가능성을 거의 완벽하게 차단해버리는 것이다.

시장에서 생겨난 긴장이 정치로

계급적 이익이란 사회의 장기적 운동을 설명하는 데 제한적인 도움밖에 되지 않는다. 누구나 무수한 방식으로 다양한 이익들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기에 교회·지자체·각종 결사체의 분회·동호인 모임·노동조합·폭넓은 단결 원리에 기반한 정당 등 거의 모든 종류의 지역적·기능적 결사체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게 된다. 이제 인구의 서로 다른 여러 부분들에 걸친 광범위한 사회적 이익이 시장의 작동으로 인해 위협에 처하게 됐다. 다양한 경제적 계층에 속하는 개인들이 그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계층의 차이를 넘어 힘을 합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집단주의 운동이라는 것의 원천은 어떤 단일한 집단이나 계급이 아니었다. 물론 그 운동의 결말은 관련된 계급 이익의 성격에 따라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따져볼 때 그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게 한 것은 사회 전체의 이익이었다. 이런저런 개별 계급의 이익이 아니라, 시장에 의해 재난에 처한 여러 사회적 이익의 내용을 묶어나가는 것이 더 합리적인 일이라고 본다. 경쟁적 노동시장은 노동력의 담지자, 즉 인간에게 타격을 가했다. 국제 자유무역은 자연에 의존하는 최대의 산업, 즉 농업에 대한 위협이 됐다. 금본위제는 여러 가격 수준의 상대적 변화 추이를 보면서 사업 여부를 결정할 수밖에 없는 생산조직들에 재난을 가져왔다.

긴장은 시장의 영역에서 생겨나지만 곧 그것을 넘어 정치 영역으로 확산되며, 이로써 전 사회를 휘어감게 된다. 하지만 세계 경제가 계속 기능하는 한 개별 국가들 내에서는 그 긴장이 잠복된 형태로만 남아 있게 된다. 그러나 세계 경제가 해체되자 시장 문명 전체가 그 소용돌이 속에 말려들게 됐다. 영혼도 무엇도 없이 그저 물질적 안녕의 자동적 증대라는 것 하나만을 목표로 삼는 제도들이 눈먼 기차처럼 달려가게 됐고 마침내 그로 말미암아 한 문명 전체가 파괴됐다.

‘낡은 세계’는 무너졌으며, 그 폐허로부터 각국 정부가 자신들 국내 제도를 뜻대로 자유롭게 조직하면서 서로 경제적 협력을 이루는 ‘새로운 세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시장경제와 금본위제가 지배하고 있던 당시, 세계연방의 창설이라는 생각은 중앙집권화와 획일화라는 악몽으로 여겨진 바 있다. 이는 옳은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시장경제가 종말을 고하자 각국이 국내에서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서로 효과적인 협력을 이뤄나가는 새 시대의 시작이라고 볼 만한 상황이 나타난 것이다.

자유주의경제는 자유라는 우리의 이상을 그릇된 방향으로 오도했다. 시장경제에서 대량 실업이나 빈곤이 발생하면 실로 야수적인 자유의 제한이 함께 나타나지만, 투표자·생산자·소비자 그 누구에게도 이런 사태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어떤 집단이 생존하려면 모든 성원이 일정한 정도로는 집단의 결정에 순응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권력의 기능이다. 그리고 권력의 궁극적인 원천은 개개 성원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의견이다. 일단 마음속에 의견이나 욕망을 가지면, 우리 모두가 권력의 창출 과정 그리고 경제적 가치 평가의 구성 과정에 참여하게 되는 셈이다. 이를 빠져나갈 수 있는 자유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시장경제에서는 자유도 평화도 없다

시장경제 아래서는 자유도 평화도 제도화될 수 없었다. 그 체제가 목표로 삼는 것은 이윤과 물질적 안녕을 창출하는 것이었지 평화와 자유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의 사멸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자유의 시대’의 개막이 될 수 있다. 소수만의 사회적 특권에 부수적으로 딸려오는 그런 원천적으로 오염된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산업사회가 우리 모두에게 주는 여가와 안정을 빌려서 새로운 자유를 탄생시킬 것이고, 그 새로운 자유의 덩어리에다 다시 옛날부터 존재하던 여러 자유와 시민적 권리들을 추가할 것이다.

이제 인간은 자신의 모든 동료들이 누릴 수 있도록 풍족한 자유를 창조해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됐다. 인간이 그러한 과제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권력이나 계획과 같은 것을 도구로 삼아 자유를 건설하려 한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의 원수로 변해 자유를 파괴하게 될 것이라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복합사회에서의 자유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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