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적인 위기가 아니다. 참고 견디면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꿈꾸지 마라. 옛 체제는 무너졌다. 우리가 아는 형태의 자본주의는 막을 내렸다. 그 체제를 수호해온 이들도 무겁게 인정한 바다. 미래는 우리가 살아보지 않은 자본주의, 어쩌면 자본주의 이후의 체제일 터다. 바야흐로 ‘거대한 변형’의 시대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은 정태인 성공회대 겸임교수·우석훈 연세대 강사·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등 3명의 경제학자에게 ‘위기 이후의 체제’에 대해 물었다. 지난 3월16일 오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4층 회의실에서 2시간 남짓 진행된 좌담에서 세 사람은 “칼 폴라니에게서 새로운 시대를 위한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홍기빈(이하 홍): 역설적이게도 지금은 위기의 폭과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위기다. 문제의 심각성을 예측·진단하고, 과거와 비교할 수 있어야 리스크(위험수위) 계산도 가능하다. 그런데 현재로선 파장이 어디까지 갈지 예측조차 할 수 없다. 존 케인스가 말한 ‘불안’의 고전적 상황을 맞고 있다. 리스크 계산은 고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이 이런저런 의견을 내놓고는 있는데, ‘U자형’이니 ‘L자형’이니 말들만 많지 어느 한쪽으로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시장 상황도 마찬가지다. 위기의 폭과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 얼마나 심각한지도 모를 정도니 정말 심각한 상황이다. 우리가 어떤 상황인지 말할 수 없을 정도라면, 그것 자체가 증후적으로 어떤 상황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본다.
=정태인(이하 정): 현 상황은 콘드라티예프의 경기순환 사이클로 치자면 경기순환의 맨 밑바닥이다. 파생상품에 얽힌 자금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알 수 없다. 부실자산을 정리할 ‘배드뱅크’를 만든다 해도, 정확한 부실자산의 규모조차 파악되지 않으니 무용지물이다. 말 그대로 경기하강 국면의 맨 밑바닥으로 내려간 상태다.
국제정치적으로 미국 패권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달러가 일시적으로 강세를 보이곤 있지만, 곧 혼돈 상황이 올 텐데 그 다음 패권을 누가 쥐게 될지도 불분명하다. 위기에서 가까스로 빠져나간다 해도 에너지 가격 급등이란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기후변화도 한계에 도달해 있다. 자본주의의 위기를 넘어 그 이상의 위기가 올 수도 있다. 정확히 말할 순 없지만, 대혼돈의 시기가 올 것만은 확실하다.
=우석훈(이하 우): 20세기의 역사를 돌아보자. 1929년 대공황으로 수정자본주의가 생겨났다. 1970년대 초반 제1차 석유파동이 나면서 케인스식 수정자본주의는 ‘영광의 30년’을 마감했다. 1980년대 이후 대처리즘이 나오면서 새로운 국제무역 질서가 만들어졌는데, 지금 그 체제가 위기를 맞은 것이다. 지난 100년을 한 사이클로 봤을 때, 세 번째 다가온 근본적 위기다.
위기를 맞으면 이른바 ‘레짐’(체제)이 바뀌게 된다. 첫 번째 위기 때는 케인스의 이론이 있었고, 두 번째 위기 때는 하이에크의 이론이 있었다. 현재의 위기를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해선 이론을 내놓은 사람이 없다. 근거가 있건 없건 다들 한마디씩 하고는 있는데, 세계 자본주의가 다음엔 어디로 가야 할지를 말한 이론가 자리가 비어 있는 상황이다.
=홍: 현 경제위기는 물질적 차원을 넘어 사회와 경제의 조직원리 차원으로 확대돼 있다. 지난 30~40년 동안엔 신자유주의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합의된 경제원리였다. 시장이 가장 합리적인 사회조직이라고 합의하고 모든 문제를 시장에 맡겼다. 적절한 가격을 산정할 수 있는 건 시장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시장원리를 통해 균형이 만들어졌을 때 가장 뛰어난 사회적 조직을 이뤄낼 수 있다는 사회철학이 지배한 시기였다.
그 정점이 바로 금융시장이었다. 금융시장은 어느 시장보다 정보 이동이 훨씬 빠르다. 시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정보가 금융시장으로 몰려들었다. 따라서 금융시장에 최대한의 자유를 부여하면, 사회 전체가 가장 완벽한 균형 상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금융시장은 정보를 모을 뿐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미래의 위험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합리적인 미래 계획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1929년 공황은 농업 불황이 촉발시킨 것이란 주장이 정설이다. 이번 위기는 사람이 만들어낸 파생상품 때문에 나온 것이고, 그것이 어마어마한 부채가 돼 지구촌을 누르고 있다. 지난 30~40년 동안 지구촌을 지배해온 시장 우위라는 틀이 논리적으로 파산한 셈이다. 시장이 완벽하지 않다면 경제와 사회를 다시 어떻게 조직해야 할 것인가? 내놓을 만한 대안이 없다.
그런 점에서 이번 위기는 지적인 위기이기도 하다. 주주 가치 경영의 창시자라 할 잭 웰치도, 지난 10년간 영국의 재무장관을 맡으며 지구적 금융 체제의 설계를 주도했던 고든 브라운도 자신들이 지금까지 믿어왔던 바를 완전히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쪽에 1930년대의 마르크스 경제학이나 케인스주의 등과 같은 대안적인 지적 틀이 준비돼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현재의 지적 위기는 더욱 깊어진다.
=정: 지금 지구촌이 겪고 있는 위기는 기실 미국 경제가 예전부터 스스로 예고해온 바다. 1980~90년대 저축대부조합(S&L) 사태나 2001년 말 터져나온 엔론 사태가 전조였다. 문제가 불거졌을 때 금융시장에 제동을 걸었어야 하는데, 되레 규제 완화를 더욱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결국 한없이 파장이 커지고 말았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 컬럼비아대 교수는 신자유주의의 종언을 선언했고, 위기의 원인 제공자라 할 수 있는 앨런 그린스펀 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마저 자신의 경제학이 틀렸음을 고백했다. 아직도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시장만능론에 미련을 가지고 있지만, 위기의 장기화가 곧 이들이 틀렸음을 증명할 것이다.
-사회: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가 케인스주의적 경기부양책을 내놓고 있다. 지금 상황에서 케인스주의적 해법이 대안이 될 수는 없을까?=우: 한동안 케인스 해법이 신자유주의 방식의 대안으로 거론되기는 할 것인데, 45~75년의 30년 기간처럼 전면적인 수요 진작에 의한 ‘대량생산 대량소비’ 방식의 포디즘으로 복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단 생산 방식 자체가 포디즘에서 탈포디즘으로 이행한 상태이고, 여기에 생태적 제약조건이 걸려 있으며, 국가의 작동 방식도 훨씬 다원화된 상태라서, 전성기 때의 케인스의 발전모델로 복귀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정: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정책은 월스트리트 금융질서를 제압하지 못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이나 로런스 서머스 국가경제위원회 의장 등은 ‘월스트리트의 자식들’로 부를 만하다. 이들을 데려다 금융 개혁을 하려다 보니 굉장히 미적거리고 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위기를 맞아 기득권층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그렇게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위기가 오래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오바마가 루스벨트보다 불리한 것은, 루스벨트는 미국 패권 확립기에 집권했기에 개혁의 성공에 대해 곧바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게 돼 있었지만, 오바마는 미국 패권 쇠퇴기를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달러와 함께 유로나 아시아 통화가 공존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는 영국이 과거에 그랬듯이 미국민이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홍: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팀 면면을 보자. 금융 쪽 ‘올드보이’를 불러모았다. 어쩔 수 없는 측면은 있다. 워낙 상황이 복잡하게 꼬였으니, 사정을 잘 아는 인사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클린턴 행정부 시절 재무장관을 지낸 로버트 루빈의 인맥이라 할 가이트너 재무장관이나 서머스 의장 등이 발탁된 측면이 있다. 이들이 강력한 달러화를 바탕으로 월스트리트의 현 체제를 디자인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프로그램에 생긴 버그를 잡으려면 그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거다.
현재로선 금융 시스템 안정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이른바 ‘녹색뉴딜’을 통해 공격적이고 진취적인 재정정책을 추진하는 측면도 있다. 대공황 직전까지 세계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버팀목인 금본위제를 유지·관리해온 금융 전문가들은 어마어마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공황과 함께 은행가들은 길바닥으로 내던져졌다. 금융 전문가가 무시당하는 상황이 온 거다. 오바마 행정부는 현재로선 금융 시스템도 살리고, 적극적인 재정정책도 취하면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쫓고 있는 모양새인데, 1930년대였다면 금융계는 모두 날아갔을 것이다. 미 금융권의 정치적 입지가 어떻게 되는가를 살펴보면, 미래를 가늠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우: 오바마 행정부도 기술적으론 대안이 없어 보인다. 임기 6개월 정도를 맞으면 국제 통상체계와 금융체계와 관련해 뭔가 나와줘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나온 것이 없다. 달러본위 체제가 바뀌는 순간이 오면, 지금까지 갖고 있던 금융자산은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 대규모 자산 파기 현상이 벌어질 텐데, 그 규모를 몰라 무서우니 일단 뒤로 미루고 있는 모양새다. 그새 금융위기는 더욱 가중되고 있다.
=정: 금융·재정 정책상 쓸 만한 것은 다 쓰고 있는 것 같다. 잘못하다간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갈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금융 마비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유동성을 공급하고 있을 뿐이다. 공적자금이 무한정 들어가고 있는데, 시간이 흘러도 부실채권이 스스로 줄어들지는 않는다.
빠른 속도로 일단 드러난 부실채권부터 상각해야 할 텐데 가이트너나 서머스 모두 미적거리고 있다. 부실채권을 매입할 투자자를 모은다는 게 가이트너나 버냉키의 해법인데 부실채권의 규모를 몰라서 가격을 정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누가 투자를 할까. 방법은 자의적이라는 비판을 받더라도 정부가 기준을 정해 부실채권을 빨리 정리하는 것뿐이다. 또한 새로운 금융규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설계를 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이래저래 위기는 길어질 것이다.
재정정책은 일정한 효과를 나타내서 경제 붕괴와 사회 혼란으로 들어서는 걸 막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엄청난 돈을 들이붓는 의료개혁은 별로 성공할 것 같지 않다. 현재의 민간보험과 병원을 그대로 둔 채 건강보험을 새로 만들어 경쟁시키는 것은 효과적이지 못하다. 건강보험이 고사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린 뉴딜은 획기적인 발상이다. 특히 스마트 그리드와 단열재 시공 등을 통해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재생에너지 생산을 늘리는 계획이라면 일자리도 꽤 많이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계획에 민간의 돈이 투입되도록 하기 위해 파생상품 시장을 만든다면 그건 또 하나의 혼란을 만들어낼 수 있다. 현재 구체적인 계획이 없어 단언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홍: 케인스 얘기가 새삼 나오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지금 미국의 경제학자 가운데 케인스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이 거의 없다. 1970년대부터 미 대학에서 사실상 케인스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해서 케인스 경제학 하면 무조건 정부가 나서 돈을 푸는 것 정도로 이해하는 이들이 많다. 이는 물론 케인스의 사상과는 사뭇 다르다.
이런 기류는 이른바 ‘트리클다운’(부유층과 거대기업에 대한 감세와 규제 완화로 경제성장을 이룩하면 저소득층에게도 그 혜택이 돌아간다는 주장) 이론과 결합될 위험이 있다. 시장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데 가장 필요로 하는 급소에 돈을 풀어야 하는데, 무조건 은행과 GM 같은 거대기업에 돈을 풀어 금융자본과 대기업만 안정시키면 된다는 식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오바마 정권이나 조지 소로스 등이 생각하고 있는 녹색 뉴딜을 통한 경기 회복도 아직 불투명하다. 무엇보다도 녹색 담론이라는 것이 아직도 재난 담론의 성격을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 90년대 말의 닷컴 붐과 같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정: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이 꼭 그런 식인 것은 아니다. 긴급 편성한 경기부양 자금 8천억달러 가운데 노동자들에게 직접 지원하는 몫도 있고, 의료보험 개혁용 예산도 그렇다. 이런 건 이명박 정부와는 정반대다. 금융 부문의 위기는 해결되기 어려울 것으로 본다. 현재는 일종의 유동성 함정에 빠진 상태다. 이자율이 너무 낮아서라기보다 금융 시스템에 대한 불신으로 각 금융기관이 최대한 현금을 확보하려 하기 때문에 생긴 유동성 함정이다. 어느 정도 금융위기가 지나가면 전세계가 동시에 불려놓은 유동성 때문에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생길수도 있다. 특히 유가와 곡물가가 위험하다.
그래도 정답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것 말고는 없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가 말한 ‘보텀업 경제학’(아래로부터 성장을 이뤄내야 한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오바마는 로버트 루빈과 로버트 라이시를 두 명의 ‘밥’(Robert의 애칭)이라고 부르는데, 노무현 정부 시절 이헌재 경제부총리와 이정우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이 생각난다. 둘 사이의 조정이 쉽지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더구나 지금 ‘루빈 사단’(서머스·가이트너 등)은 정부와 백악관에 있고 라이시는 그렇지 않다. 이 차이는 굉장히 크다.
-사회: 현실 진단도 그렇고 해법도 그렇고 온통 불확실성뿐이다. 폴라니 얘기를 해보자. 이론과 정책 측면에서 세계 경제와 한국 경제에 영감을 주는 게 있을 텐데.=홍: ‘시장’ 대신 ‘투자자’로 말을 바꿔보자. 폴라니의 핵심 명제는 인간 세상의 만물이 상품화하고 있다는 거다. 무슨 말인가? 돈을 주면 모든 것이 맘대로 동원 가능해진다는 거다. 뒤집어 얘기하면, 돈이 안 되면 쓸모가 없어진다는 뜻이다. 돈으로 거래될 때만 상품이라는 게, 그게 사람이든 자연이든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된다. 아무도 사지 않으면 무용지물, 그게 바로 상품이다. 사람도, 화폐도, 자연도 마찬가지다. 내가 시장에 팔겠다고 그림을 그려 내놓았다가 팔리지 않으면 나 혼자 창피해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딴건 몰라도 사람과 자연, 화폐가 안 팔리는 상황이 오면 상황이 전혀 다르다.
폴라니가 경고한 것도 딴건 몰라도 사람·자연·화폐까지 상품화했다가 이게 시장에서 팔리지 않아 무용지물이 되면 사회 자체가 무너져내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실제 사회가 무너질 수는 없다. 그러니 사람이나 화폐, 자연이 알아서 먹고살아야겠다고 자기 길을 가게 된다. 결국 계속 상품화하는 움직임도 나올 것이고, 반대로 상품이 아니게끔 만들려는 움직임도 나오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가 파열음을 낼 수밖에 없다는 게 폴라니의 주장이다. 지금의 한국 상황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말하자면 큰돈이 돌 수 있는 판을 만들어내면 경제가 살아난다는 거다. 4대강 사업도 그렇고 영리법인을 뼈대로 한 의료 민영화 움직임도 그렇다. 이는 폴라니적 의미의 ‘상품화’다. 다시 말하지만 누군가 돈을 풀 때만 쓸모있는 게 상품화다. 노무현 정부 때부터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세상 만물을 모두 투자자가 돈을 투여해 더 많은 돈을 뽑아낼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지속되고 있다. 뭐가 돈이 되는지를 가장 잘 아는 게 투자자라는 주장이다. 사실상 ‘투자자 독재’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폴라니는 이런 게 부도덕한 것을 넘어 ‘유토피아’에 불과하다고 봤다. 실현이 불가능한 주장이란 얘기다. 인간·자연·화폐까지 상품화하면 사회가 견뎌내지 못하고 사달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다.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정비사업과 의료 민영화 추진은 물론, 교육도 ‘비즈니스’로 바꿨고 금산분리를 완화해 금융시장도 돈 놓고 돈 먹는 판으로 만들었다. 폴라니가 말한 만물의 상품화와 투자자 독재의 끝이 어떤 모습인지는 현 지구촌 경제위기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데도 말이다.
=우: 어떻게 보면 폴라니는 그동안 경제학이 놓치고 있던 사회적 요소 혹은 총체성에 관한 또 다른 지평을 상징적으로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시장이든 국가든 상당히 강력한 환원주의가 작동하고 있던 셈인데, 폴라니는 비환원주의 그리고 총체성에 대한 경제적 복원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시기가 비경제적 요소들도 경제적 요소로 환원시켜서 화폐나 금리 그리고 수익성 같은 것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라면, 폴라니 시스템은 그러한 경제적 요소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요소들을 다시 복원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정: 재화와 서비스를 가능한 한 많이 누리는 것, 즉 성장이 곧 행복(welfare)이라는 주류 경제학의 기본 사고를 뒤집어야만 인류는 생존할 수 있다. 기실 사회주의의 이론적 기초였던 마르크스주의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현대의 마르크스주의는 주류 경제학의 환경경제학(environmental economics, 예컨대 탄소배출권 같은 해법)을 뛰어넘는 생태이론을 모색하고 중앙 계획이라는 수단이 그린 뉴딜과 같은 정책을 단숨에 실행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과거의 실천이 보여준 것은 지극히 실망스러웠다.
대위기를 맞아 1930년대의 경험을 들춰보다가 폴라니에게서 희망을 찾았다. 굳이 얘기하자면 케인스 역시 이성의 힘이 가져오는 생산력 발전에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사람이었다. “장기에는 우리 모두 죽는다”며 위기 때의 정부 역할을 강조했지만 적절한 조정이 이뤄지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이 ‘선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굳게 믿을 만큼 그는 낙관적이었다. 그에게 시장은 적절히 다룰 수만 있다면 무한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인 것이다.
그러나 폴라니는 시장이라는 제도가 인간의 천성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인간과 자연을 파괴하리라는 사실을 30년대에 이미 꿰뚫었다. 그의 이론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재생에너지와 안전한 먹을거리가 그다지 넓지 않은 범위에서 호혜적으로 배분되는 지역 공동체를 능히 그려낼 수 있다. 호혜성(reciprocity)이야말로 우리가 내면 깊숙이 원하고 있는 생명복지(lifare·생명을 뜻하는 life와 복지를 뜻하는 welfare의 합성어로 정태인 교수가 만든 표현)의 원리일 것이다. 전기·가스·철도·우편 등 근거리를 넘어서는 전국적 네트워크, 그리고 교육·의료·주거 등 필수재는 국가가 재분배(redistribution)의 원리에 입각해 최대한 공공성을 확보해야 한다. 물론 여기에도 에너지를 최소화하는 녹색 가치는 철두철미하게 관철돼야 한다. 말하자면 ‘녹색 공공성’이 절실한 시점이다.
시장은 이런 기초 위에 사회의 일부로 착근돼야(embedded) 한다. 이 부문은 경쟁의 원리가 지배할 테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공정성이 강조돼야 할 것이다. 폴라니의 미완의 꿈을 지금 이루지 못하면 우리 모두의 끔찍한 공멸이 다가올지도 모른다. 어느 나라가, 누가 이런 사회를 먼저 만들 것인가? 우리 아이들의 생명이 달려 있는 일이다.
-사회: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폴라니가 줄 수 있는 교훈을 얘기해보자.=정: 얘기할 게 뭐가 있나.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는데. (웃음)
=우: 케인스 좌파가 있고 케인스 우파가 있다고 설정한다면, 케인스 좌파는 주로 복지국가의 유형을, 케인스 우파는 재정정책을 전적으로 부자들과 특정 산업을 위해 활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명박 독트린은 고용과 복지에는 거의 흉내만 내는 단기 대책이고, 진짜 장기 대책은 10년씩 사업 기간이 되는 4대강 정비 등 토목사업 등에 집중돼 있다. 건설을 단기 대책으로, 복지를 장기 대책으로 사용하는 일반적인 케인스식 재정정책과는 장·단기의 배치가 반대인 셈이다.
=홍: 경제는 형식과 실질로 나눌 수 있다. 형식은 화폐로 표현되고, 경제적 범주는 무역량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실체는 바로 사람,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의 상황을 보자. 일자리가 없다고 난리지만 투자자는 돈을 풀지 않는다. 기업도 고용을 하지 않는다. 투자자가 투자를 하지 않고 기업이 고용을 늘리지 않으면 사람이 살 수 없게 된다. 화폐경제, 형식경제가 실질경제를 짓누르고 있는 상황이다.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애 낳고, 기르고, 가르치고, 살림하고 살아가는 데 굳이 투자자가 돈 풀기를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시장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모든 걸 상품으로 바꿔 팔 수밖에 없지만, 폴라니가 말한 ‘호혜성’에 기댄다면 달라질 수 있다. 사회적 관계라는 게 두 집단이 뭔가 주고받을 때, 사회적 신뢰나 구조를 바탕으로 화폐란 매개가 없이도 노동과 재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 협동조합을 보자. 참여하는 사람들이 신뢰와 인간관계를 바탕을 서로 도움을 준다. 국가기구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경제행위의 목적은 투자자의 돈을 불려주는 게 아니라 나라 전체의 번영이나 국민의 행복과 안녕이어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투자자가 돈을 풀어야 일자리가 생기고 실질적 경제가 가능하다고 세뇌당해왔다. 이를 한 꺼풀만 벗겨내면, 생활협동조합을 통해 일자리나 먹을거리 문제도 풀 수 있다. 이젠 시장이나 투자자에 의지해야 인간의 삶이 가능하다는 미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 미국은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의 나라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이클 무어 감독의 영화 다. 서유럽의 스웨덴이나 스위스·독일 등을 보면, 폴라니가 말한 ‘사회적 경제’가 국민경제의 10~20%를 차지한다. 노동조합의 역할이 적지 않다. 생산협동조합 형태로 많이 움직이고 있다. 이른바 ‘호혜적 경제’란 게 실제 존재한다. 우리도 1990년대까지 ‘곗돈’ 문화가 있었고, 품앗이도 있었고, 계층 간 연대도 존재했다. 이런 호혜적 문화가 사라진 게 불과 얼마 되지 않는다. 유럽은 예전부터 존재해온 이런 관계를 근대화시킨 거다.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재창조한 셈이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이 지속된다면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되는 차원의 공황으로 갈 가능성이 90% 이상이라고 본다. 이럴 경우 호혜성을 확대해나가면서 살아가는 게 한 가지 길일 테고, 저생산과 인플레이션이 높은 중남미처럼 일종의 파시즘 형태에 가깝게 가는 길도 있을 것이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도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파시즘이 발호했다.
정답은 없다. 열려진 길이다. 다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 그리로 가게 될 것이다. 케인스의 시대는 권모술수의 시대였다. 공무원이 사회적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선 군부 엘리트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하이에크의 시대엔 최고경영자(CEO)가 사회적 영웅이 됐다. 기업 경영자와 펀드매니저가 존경받는 시대였다.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가 마찬가지였다. 그 끝에서 우리 사회는 CEO 출신 대통령을 선택했다. 최근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 앞에 우리 사회가 보인 애도의 물결은 CEO 시대가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은 표시가 아닐까? 폴라니가 상정한 시대엔 성직자와 사회활동가, 예술가가 대접받는다.
=정: 이명박 정부로선 건설에 매달릴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미 공급 과잉 상태에서 더 많이 지으면 어떻게 될까? 가격 폭락이 일어나 우리 내부에 있는 금융 문제, 특히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100조원 규모), 부동산 가계대출(가계대출의 30%라면 200조원 규모)이 폭발하게 될 것이다. 결국 이명박 정부는 한편으론 공급을 늘리면서 한편으론 투기 수요를 최대한 부추기고 있다. 현재 상태에서 투기 버블을 일으키는 것은 성공하기도 어렵지만 만일 성공한다면 그 다음해쯤 대폭락을 겪을 수밖에 없다. 성장률이 마이너스 10% 이하로 떨어질 수 있다. 전세계가 모두 침체에 빠져 있는데 나 홀로 버블이 지속될 수는 없다.
복지를 확충해야 하는데 거꾸로 현재의 네트워크 산업이나 의료를 민영화하려는 것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킨다. 1년에 재정적자가 20조~30조원씩 날 텐데 세금을 더 거두거나 인플레이션을 일으키지 않고 적자를 메우는 방법이 공기업 민영화다. 전기·가스·철도·물·우편 등이 그 대상이 될 것이다. 내가 알기론 이미 가스공사 민영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세금을 투입해 일시적으로라도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해야 할 시점에 건강보험을 무너뜨리는 영리법인화, 병원 당연지정제 폐지 등을 꾀하고 있으니 보통 사람의 생활은 물론 생명마저 위협받게 될 것이다.
-사회: 한국 경제가 특히 위기에 취약한 이유는 뭔가?=우: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유효수요 부족이다. 내수가 작동을 하지 않고 있다. 돈이 전부 부동산과 증권으로 몰리고 있다. 부동산과 증권이 경쟁한 게 지난 10년 세월이다. 한국 금융자산에서 연기금이 제일 큰데, 이게 증시로 흘러들어가 죽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국가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상황이 이런데 정부가 부동산을 포기할 수 있을까? 현 집권세력은 그렇게 못할 것이다.
결국 아래로 향해야 할 돈 상당 규모가 부동산·건설족에게 갈 것이다. 그리로 들어간 돈은 거기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혁신 능력이 워낙 떨어져 있으니 신상품도 나오지 않을 것이고, 버블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결국 개인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더욱 협소해질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 세계 경제가 살아나면 우리도 따라간다는 게 이명박 정부의 시나리오일 텐데, 국제 경제의 어려움이 지속되는데다 국내 자본의 내부 모순까지 더해진다면 한국 경제는 갈수록 어려워질 게 뻔하다. 이런데도 4대강 개발에 막대한 자금을 뿌리면 땅값은 계속 올라갈 테고….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정: 내수가 적은 건 수출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경제가 나빠지면 내구 소비재부터 줄이기 마련이다. 선진 각국에서 내구 소비재 소비를 줄이면 수출로 버텨온 한국 경제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결국 건설을 빼고는 내수랄 게 없으니, 이명박 정부로선 이쪽을 유일한 살길로 볼 수밖에 없다. 그리로 가면 버블은 언제든 붕괴할 수밖에 없다.
=홍: 부동산도 중요하지만 서비스 경제도 살펴야 한다. 노무현 정부나 이명박 정부나 의료·교육 등 인간이 생명 활동을 하다 보면 반드시 필요한 것들까지 돈이 된다고 생각한다는 게 공통점이다. 필수 서비스를 안정적인 수익이 들어오는 시장으로 본 거다. 내구 소비재야 안쓰면 그만이지만, 병원과 학교는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이를 상품화하자는 것, 기업 활동 할 수 있게 만들자는 것, 이를 토대로 한국을 국제적인 금융 허브로 키우겠다는 구상이었다. 투자법인화 얘기도 그래서 나온 거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단순히 경기침체나 버블 붕괴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이루는 각 영역이 침탈을 당하게 된다.
=우: 스웨덴 같은 나라에선 ‘돌봄 노동’을 인정하고, 이를 수행하는 개인이나 단체에 정부가 돈을 대준다. 한국에선 이를 기업화하려 하고 있다. 사교육 업체가 코스닥에 상장됐을 때, 한국의 서비스 부문 기업화가 갈 데까지 갔다는 점을 깨달았다. 사교육 업체가 증시에 상장된 나라는 지구상에서 한국밖에 없다. 이제 고용이나 육아의 상품화가 기다리고 있다. 유럽은 사회적 경제 영역에 두고 있는 것을 우리는 기업의 영역으로 보내지 못해 안달이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회로 치닫고 있다.
-사회: 보수 진영엔선 ‘선진화 전략’을 말한다. 선진국이 되면 경쟁이 치열해도 국가 경제가 버텨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몇 년 고생해서라도 빨리 선진국이 돼야 한다는 주장인데.=우: 형식논리적으로야 가능하지만, 실제론 선진국이 되기도 전에 우리 사회가 안에서부터 붕괴될 것이다. ‘사람’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고찰했어야 한다. 사람은 먹여만 준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사회적 해체 과정에 급격한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일본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정부 시절 우정국 민영화를 밀어붙인 여파로 니트족(직업이 없고 직업을 구할 생각도 없으며 진학도 하지 않고 직업교육도 받지 않는 사람)이나 워킹푸어(일하는 빈곤층) 문제가 악화하면서, 영원히 집권할 줄 알았던 자민당 정권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다.
돌이켜보면, 노무현 정부가 너무 오른쪽으로 가다 보니 기존 보수파가 더욱 오른쪽으로 가게 된 것 같다. 역설적인 게 우리나라에서 복지사회를 처음 말한 게 독재자 전두환이다. 의료보험의 뼈대도 그때 만들어졌다. 의료보험 민영화가 이뤄지면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공적 장치가 해체되는 거다. 오바마의 미국과는 완전히 거꾸로 가는 셈이다.
=정: 망한 데 따라가는 거지. (웃음)
=홍: 보수 진영의 경제 담론의 비현실성이 완전히 폭로되는 대목이다. 그런 주장의 골자는, 세계 경제의 노동 분업의 위계 구조에서 가급적 높은 자리를 점해 거기에서 나오는 우위를 이용해 이른바 ‘공동체’에 해당하는 가치를 추구하는 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지금의 위기는 바로 그 세계 경제의 위계 구조가 근본부터 흔들리면서 그들이 타깃으로 삼았던 ‘금융 허브’니 ‘서비스 경제’니 하는 게 대몰락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슬란드·아일랜드·두바이 등의 현 상태를 보라. 단순한 현실적인 파산일 뿐이 아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지난 30년간 이뤄져온 지구 경제의 위계 구조를 정당화하던 이론적·지적 배경이 급격히 바뀌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내가 보기엔 현 정권이나 보수 진영은 현재 패닉 상태에 빠져 마땅하다. 그래도 이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믿어왔던 이른바 ‘인지 구조의 모순’이 벌어지는 게 두려워서 하던 일을 더욱 가속적으로 추구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 정부가 내걸고 있는 ‘위기를 기회로’라는 구호의 성격이다.
=정: 이 정부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정부다. 미국이 지금 위기의 모든 걸 보여주지 않나. 그런데 이 정부는 위기를 빌미로 시장만능 정책을 더 강화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발효시켜서 반영구적으로 만들려고 한다. ‘트리클다운’ 경제학은 전세계 어디서도 실현되지 않았다. 라이시는 보텀업 경제학으로 트리클다운을 뒤집었다. 이것이 올바른 방향이다. 박병원 전 경제수석이 물을 무서워하면 수영을 배우지 못한다며 금융 자유화 등 이른바 선진화 전략을 계속 추구하려 하는데 그건 수영 배우는 일이 아니다. 이미 난파선으로 판명난 배에 전 국민을 끌고 올라타는 것이다. 바로 눈앞에 낫을 보여줘도 기역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이끌고 있다. 그래서 더욱 절망적이다.
-사회: 폴라니가 대안 체제의 기초로 언급한 게 이를테면 소비자 협동조합이나 지방자치 같은 것이다. 이런 건 우리 사회에도 이미 씨앗이 뿌려졌다고 볼 수 있는데.=우: 분명 ‘맹아’는 있다. 생활협동조합 조합원이 40만~50만 명가량 된다. 3인 가구를 평균으로 보면, 생협을 통해 식생활을 해결하는 인구가 100만 명이 넘는다는 얘기다. 지역경제는 두 가지 접근법이 있다. 기존의 새만금식 개발주의가 있을 수 있고, 지역 공동체를 복원하면서 농업·식품가공업·문화 등을 통해 지역경제를 키우는 방식도 있을 수 있다. 지역경제 측면에선 폴라니적 상상력이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이런 맹아를 어떻게 키워낼 것인가가 문제인데. 사회적 경제, 호혜적인 부문을 국민경제의 20~30%까지만 끌어올려도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 경제에서 사회적 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시민사회나 자활 공동체를 모두 합해도 국내총생산(GDP)의 1%, 총고용의 5% 정도나 될까? GDP 10%, 총고용의 20~25%까지만 끌어올릴 수 있다면 사회적 경제가 시장경제를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홍: 지금으로선 난망한 일이지만 사회적 경제, 특히 생협운동 진영이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 등 노조운동 쪽과 협력관계를 만드는 게 살길이라고 본다. 생협운동을 하다 보면 일정한 공간적 한계를 넘어서기 어렵다. 도시와 농촌으로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도시와 유기적으로 연계돼야 하는데, 조직된 노동자 집단은 도시를 대표하는 사회세력이다.
영국에선 노동조합이 생협과 유사한 형태로 운영된다. 노동자들이 생협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여러 가능성이 나올 수 있다. 거기에 희망이 있다. 폴라니가 절대 반대한 게 한 가지 있는데, 바로 하나의 논리로 인간경제를 제단하는 것이다. 시장만으로, 국가만으로 문제를 풀 수 없다. 여러 경제가 복합적으로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
사회와 시장, 국가가 공존하면서 질서를 만들어가는 게 폴라니적 해법이다. 한 가지 더 있다면, 폴라니는 노동조합, 지방자치체, 소비자 생산자 조합 등 다양한 인간 집단의 내부적, 또 상호간의 활발한 의사소통과 연대가 인간적이고도 효율적인 경제의 필수 요소라고 보았다. 범진보 운동의 다양한 세력들의 다양한 관점이 있지만, 그 어떤 하나로 전체를 통일시킨다는 생각을 버리고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보완할 수 있는가라는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접근한다면 현재와 같은 다급한 요청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연대가 그렇게 먼 일만이 아닐 것이다.
=정: 폴라니의 이론은 사회경제를 생태적으로 변모시키는 데 필요한 이론적 자원이 될 수 있다. 그의 이론체계는 노동운동, 환경운동, 공동체운동, 기부운동, 시민운동, 진보운동을 모두 아울러서 배치할 수 있는 논리이기도 하다. 특히 군 단위 풀뿌리 지역에서 사회경제(social economy)를 만드는 일은 위의 모든 운동이 힘을 합쳐서 해야 하는 일이다. 이것은 또한 아래로부터의 성장이며 복지이다. 풀뿌리에 기반한 호혜성이야말로 아래로부터의 성장의 밑걸음이다. 그걸 무너뜨린 게 새마을운동이었다. 복원해내야 한다.
=우: 사회운동이라는 관점에서 폴라니를 본다면 분산형·비국가형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성운동과 생태운동의 결합인 에코페미니즘 그리고 풀뿌리 민주주의와 같은 흐름들이 조금 더 사회운동의 전면으로 등장하고, 이들이 경제적 장치로서 사회적 경제라는 지향점을 비로소 갖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노동자들의 상호부조라는 노동조합의 전통을 환기해볼 때, 시민운동과 민중운동 그리고 지역운동이 폭넓게 결합할 수 있는 다리로서 작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정부만 장악하면 된다”는 간단한 운동론보다는 사회·경제·문화·윤리 등의 복합적 요소들을 이해하고 고려해야 한다는 비환원주의적 요소에 의해 운동 방식의 ‘단순화’에는 좀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사회: 경제에서 시작한 얘기가 민주주의와 재분배, 사회적 다원성으로 확대된 느낌이다.=홍: 경제와 민주주의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보여주는 논쟁이 있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루트비히 폰 미제스 같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경제활동이 합리적으로 이뤄지려면 적절한 가격이 결정돼야 하는데, 정보가 가장 많이 모이는 시장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가격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정부가 가격을 결정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폴라니는 시장도, 공산주의도 정답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떤 물품이 얼마나 필요한지에 대한 추상적인 수치만 나올 뿐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 얼마나 원하는지, 생산과정은 얼마나 고된지를 통계로 포착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필요한 것은 토론이다. 노동조합에선 생산에 대해 토론하고, 소비자 집단은 욕구와 선호체계를 말해야 한다. 경제활동 참여자 모두 가격이나 정부 관료에 의존하지 않고 토론을 하는 과정이 곧 폴라니식 민주주의다.
-사회: 그런 사회로 어떻게 하면 나아갈 수 있느냐가 문제일 텐데. 그 과정에서 저항도 만만찮을 것이고.=우: 어떻게 이행하느냐는 내용은 폴라니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다만 하이에크 체제가 붕괴하지 않으면 폴라니식 체제로 갈 수 없다. 그래서 1980년대 중반 자크 데리다 같은 이들이 ‘해체’를 말한 것은 아닐까? 위기의 시대, 폴라니가 새로운 상상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정: 세계가 복지국가의 출현을 목도한 것은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다. 어려운 시기가 좀더 계속될지도 모른다.
=홍: 폴라니가 여타 사회주의자들과 다른 것은 인간의 도덕적·윤리적 선택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폴라니는 시장자본주의가 태생적 모순 때문에 언젠가 파국을 맞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되면 사회가 작동을 멈추면서 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이 서로 원수가 되고, 산업자본과 민중이 장악한 의회가 맞설 것이라고 봤다.
사회가 마비된 상태에서도 시장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그대로 무너질 것이냐, 아니면 기능이 멈춘 사회를 폭력적으로 움직여 다시 기능하게 할 것이냐가 남는 문제일 것이다. 후자의 논리가 파시즘이다. 폴라니는 인간이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형제자매와 연대해야 하고, 인간으로서의 형상을 기억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사회주의와 파시즘의 정치경제적 차이는 없다. 다만 윤리적 원칙이 다를 뿐이다. 이제 윤리를 말해야 할 때다.
여기에서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성격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정치란 철저히 경제와 분리된 사안이며 민주주의란 철저히 전자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는 고전적 자유민주주의의 사고 틀에 갇힌다면 인간 사회에 미래와 희망은 없다고 하겠다. 내가 함께 더불어 살아갈 나와 평등한 이웃이 실업과 빈곤과 인간 파괴를 겪는 현실을 외면하고 투표와 법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이 무슨 기괴한 드라마인가.
폴라니는 산업사회의 기능성으로 인해 인간이 스스로가 영혼을 가진 존재임을 망각하고 그 기능성의 톱니바퀴로 스스로 전락의 길을 선택할 위험이 크다고 보았고 파시즘이 바로 이러한 사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산업사회에서는 더 이상 예전처럼 자신의 개인성을 빌려서 영혼을 회복하는 것도 불가능하며, 오로지 사회라는 단위에서의 집단적 연대를 통해서만 인간의 영혼 회복이 가능하다고 보았으며, 이것이 바로 고전적 자유주의와 달리 산업사회에서의 민주주의가 떠맡아야 할 역할이라고 보았다. 시장지상주의로 조직된 현재의 경제체제가 과연 사람들 모두의 살림살이를 원만하게 해결해줄 수 있을지 지극히 불투명해진 지금, 민주주의를 사회경제적인 것, 나아가 인간의 영혼과 가치라는 정신적·내면적 문제로까지 확장해가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일 수밖에 없다.
무역에 대한 폴라니의 비전은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시장지상주의적 사고가 낳은 것이 전 지구적인 자유무역이었다고 한다면, 국가권력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제체제의 상상력은 일국 경제의 폐쇄적 자급자족 혹은 일정한 크기의 폐쇄적이고 호전적인 지역적 블록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적어도 이것이 1930년대의 전환기에 나타난 선례였다. 현재의 세계무역의 구조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응당 바뀌어야 하고 바뀔 수밖에 없다. 엄밀하게 말해 이것은 미국·유럽 등의 서방 국가들에게 비서구의 근로 인민들이 물품을 제조해 바치도록 만들어진 지구적 산업체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화·용역·자본의 흐름 모두가 자연적인 지리적 조건에 의해 인근 국가들끼리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서방 국가들 및 그 앞잡이 역할을 하는 위성 지구들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도록 돼 있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독특한 무역투자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아직 확실하지 않으나, 이 지구적 불균형의 질서가 그대로 유지될 수 없다는 점은 누구나 입을 모아 말하고 있는 바다. 그런데 이 질서가 만약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 내에서의 국가적 개입의 강화로 나타난다면, 이는 필시 무역과 금융에 걸친 보호주의의 강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고, 그들과의 관계에 경제의 작동을 크게 의존하는 비서구 나라들에 더욱더 큰 고통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시장이나 국가를 통해서만 실물과 화폐가 오고 가야 한다는 이분법을 벗어나 사회적 경제라는 영역을 보게 된다면, 지리적인 인근 지역과의 경제적 협력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게 된다. 폴라니가 그의 1945년 쓴 논문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에서 발칸 지역의 안정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경제질서로 지역적 계획경제를 이야기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정: 국내 차원에서는 폴라니의 이론대로 어느 정도 정책을 만들 수 있다. 작년에 잠깐 화제가 됐던 ‘세 박자 경제론’이라는 게 이 틀에 맞춰져 있다. 문제는 국제 차원인데 폴라니는 30년대에 시장경제의 안정적 작동을 위한 골드스탠더드(금본위제)가 결국 인간과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공황이라고 파악했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달러본위제는 더 이상 작동할 수 없을 것이다. 거대한 글로벌 불균형과 달러 패권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현재의 핵심 과제다. 미국과 중국, 유럽연합(EU)이 끝없이 마찰을 하면서 새로운 국제 체제를 만들려고 할텐데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아마도 두 개 이상의 통화가 사실상의 기축통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배리 아이켄그린 미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의 예측에 동의하지만, 그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 않을 것이다.
=우: 폴라니 시스템에서는 대화와 이해와 같은 소통,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다시 중요하게 대두된다. 민주주의라는 담론의 영역에서는 누군가를 뽑고 그에게 모든 결정을 일임하는 경직된 대의제 민주주의 체계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스위스와 같이 직접민주주의를 상당 부분 정치 과정과 사회 과정에 복원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국민투표, 국민소환제 같은 직접민주주의의 요소가 실제로 작동하려면 지금보다도 훨씬 더 많은 대화와 사회 구성원 사이의 논의 과정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런 점에서는 중앙에서 많은 것을 결정하고, 이렇게 결정된 것들에 국민 모두가 따른다는 민주집중제의 생각과는 배치되는 측면이 많아 보인다.
사회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정리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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