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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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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9년 폴라니언이 세상을 바꿨을 때

공정가격에 수출하고 수익은 녹색사업에 재투자하는 사회적 기업인이 ‘세계공정무역연합 총회’ 다녀오는데…
등록 2009-03-27 02:02 수정 2020-05-02 19:25

2039년 3월, 서울에 봄이 오고 있다. 비행기의 창은 좁다. 그래도 하늘빛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캐나다 몬트리올 도로변에는 아직 잔설이 남아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서울의 기후는 역시 은총을 받았다. “저는 오늘 한국인들에게 경쟁의식을 좀 버리는 게 좋겠다고 충고하고 싶습니다. 한국은 올해에도 국내총생산 대비 ‘사회경제’ 비중이 가장 가파르게 증가했습니다. 그들에게 격려와 함께 휴가를 줍시다.”

2025년 유엔총회 공정무역 상품 관세 철폐

2039년 폴라니언이 세상을 바꿨을 때. 사진 맨 위부터 한겨레 박종식 · <한겨레21> 박승화 · 한겨레 김봉규 기자

2039년 폴라니언이 세상을 바꿨을 때. 사진 맨 위부터 한겨레 박종식 · <한겨레21> 박승화 · 한겨레 김봉규 기자

맥퍼린 의장은 폐회사에서 농담을 했다. 일주일간 몬트리올에서 세계공정무역연합(WFTU) 총회가 열렸다. 내가 한국 지부 대표단의 일원으로 총회에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회적 기업, 농업생산자협회, 노동조합, 중소상인 등을 대표하는 10여 명이 대표단을 구성했다. 2019년 만들어진 세계공정무역연합은 이제 120여 개국에 지부를 두고 있다. 각국 ‘사회경제’의 현황을 공유하고, 국경을 넘는 ‘사회무역’의 기회를 넓히는 자리다.

“하이에키언 클럽의 발표도 인상적이지 않았어요? 용감하기는 해요. 아직까지 그런 주장이 먹힐 거라고 생각하니….” 노동조합을 대표해 참가한 민주노총 부위원장이 옆자리에서 말을 건넨다. 특별 심포지엄에서는 20세기 사상가들의 현재적 의미를 짚는 학술토론회가 열렸다. 제2의 대공황을 몰고 온 주역인 하이에키언 그룹이 발표에 참가했다. “사상의 자유가 있으니까요.” 나는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진 않았다. 지금도 서울 명동에 가면 ‘불신지옥’을 외치는 선교단체와 ‘영구혁명’을 부르짖는 급진 그룹과 ‘자유시장’을 내건 시장방임 그룹의 선전가들이 골목을 차지하고 구호를 외쳐댄다. 그런 자유를 허락하느라고 우리는 공정무역과 사회경제를 발달시켰다.

무역관세와 세계통화 체제가 여전히 우리의 과제이긴 하다. 세계 각국 정부는 2025년 유엔총회에서 세계공정무역연합이 추천한 공정무역 상품에 대한 관세 철폐를 승인했다. 세계공정무역연합이 생산자-소비자 토론회를 거쳐 결정한 가격에 대해 추가적인 관세를 매기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일부 주와 제3세계 몇몇 나라는 여전히 이를 따르지 않고 있다. 각국 생협 및 사회적 기업이 생산한 ‘공정 상품’과 다국적기업이 생산한 ‘일반 상품’이 무역시장에서 공존하는 질서를 그들은 여전히 껄끄러워하고 있다. 유럽연합·동아시아연합·아메리카연합 등 지역별 통화 유통을 관리할 새로운 세계공정은행의 출범도 미국의 반대로 진척이 더디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급속한 보호무역주의로 돌아섰다. 월스트리트 체제가 붕괴한 뒤에도 미국은 산업 기반을 다시 일으키는 데 애를 먹었다. 자국 제조업 보호를 이유로 내걸었지만, ‘하이에키언 로비스트’들의 입김에 끌려다닌 결과라는 분석이 많다.

맥퍼린 의장이 한국의 사례를 높게 평가한 것도 그런 이유다. 2020년 ‘한국연방’ 출범 직후 결성된 동아시아평화연합(EAPU)은 정부, 시민사회, 기업 등이 함께 참여하는 모범 사례로 꼽혀왔다. 국가 간 정치적 긴장을 조절하는 동시에 시민사회와 기업이 한·중·일을 잇는 공정무역의 규칙과 조례를 계속 만들고 있다.

미국은 하이에키언에 끌려다닌 결과…

분단 70여 년 만에 이뤄진 통일은 9개 자치주가 연방을 이루는 형태로 완결됐다. 조금씩 다른 사회경제 체제 때문에 지역 간 주민 이동이 있긴 했지만, 연방 수립 이후 3년여가 지나자 그런 문제들도 어지간히 해결됐다. 옛 북한 지역은 지방정부의 개입이 여전히 강하고, 일부 남쪽 지역은 전통적인 산업기반 시설을 토대로 하는 ‘거대기업’이 여전히 강세를 이루고 있지만, 대부분 지역은 노조·생산자조합·영농조합 등을 잇는 ‘사회기업’이 지배적이다. 서울~개성~평양을 잇는 수도권이 균형축 노릇을 하고 있다.

국가 체제를 바꾼 힘은 2012년 ‘새사회경제연합’의 출범이 결정적이었다. 내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전통적 노동단체와 한살림을 비롯한 생협이 주축이 되어 ‘시장경제’와 구분되는 ‘사회경제’의 건설을 주창하고 나섰다. 이후 전국에 흩어진 생태공동체와 공동육아조합 등이 여기에 결합하고, 속속 태어난 사회적 기업들도 가담했다. “토론과 보고서의 연속이었지. 그것도 거듭하니까 요령이 생기더라고.” 같은 동네에 사는 전국 중소상인연합회 회장이 회고했다. 새사회경제연합의 창립 멤버인 그는 벌써 예순을 바라보고 있다. 비행기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그는 계속 옛날 이야기를 했다. 이럴 경우 젊은 사람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치는 수밖에 없다.

돌아오는 길에 시장을 들렀다. 21세기 들어 대형마트에 밀려나던 지역 시장들은 농촌 지역의 생협, 도시 지역의 사회적 기업 등과 연계해 각종 ‘공정 상품’을 파는 핵으로 거듭났다. 민주노총과 중소기업중앙회가 시장 리모델링을 적극 도왔다. 여전히 대형마트에 가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시장 상인, 농촌생산자연합, 사회적 기업가가 적절한 소득을 분배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아이구, 사장님, 출장 가신 일은 잘됐나요?” 괜히 멋쩍어 웃음만 지었다. 아이에게 줄 유기농 과자를 몇 봉지 골랐다.

아파트 주민위원회 게시판에 선거 벽보가 붙어 있다. 일주일 뒤면 총선이다. 공화당·민주당·사회당 후보들이 저마다 웃고 있다. 사회경제를 주창하는 사회당에는 트로츠키주의자부터 폴라니언까지 두루 포진해 있다. 일부 중산층의 지지를 등에 업은 민주당과 함께 연정을 이루고 있는데, 대기업과 보수세력을 대변하는 공화당의 반격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초자치단체 의회를 대거 장악한 사회당의 풀뿌리 정치조직에는 어디 비하겠는가. 연방의회의 힘도 결국 거기서 비롯할 것이다.

“오냐, 고생 많았지. 그래 캐나다는 어떻더냐.” 칠순을 앞둔 아버지가 문을 열어주신다. 다 늦은 장가를 가서 나를 낳으셨다. 내가 대학 졸업 뒤 친환경·절전형 조명기구인 ‘태양광 형광등’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반신반의했다. 발전시설이 미비해 전기 가격이 높은 제3세계 사람들에게 조명기구를 ‘공정 가격’으로 수출하고, 그 이윤은 녹색에너지 연구사업에 재투자하는 ‘사회기업’을 세우고 싶었다.

대기업에 다니는 동기들은 역시 나보다는 높은 연봉을 받는다. 그래도 내 일이 더 보람 있고 사회적으로도 가치 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실직자들을 사회적 기업에 재취업시키는 ‘사회기업센터’ 덕분에 유능한 인재들도 많이 모았다. 설사 수익이 나지 않는다 해도 정부가 제공하는 재취업 프로그램에 따라 또 다른 아이템으로 사회적 기업을 일굴 생각이다. 한반도의 7천만 인구 가운데 30% 정도가 사회적 기업·생협·노동조합·상인조합 등 ‘사회경제’ 체제에 의존해 살고 있다. 하이에키언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장’치고는 광대한 시장이다.

사회기업센터가 인재 보내고 정부가 지원하고

“아버지는 어떠셨어요. 오늘도 상담자가 많았나요?” 40대 초반에 증권사 애널리스트를 그만둔 아버지는 벌써 20여 년째 투자 상담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 창업 컨설팅을 주로 하고 있다. “너 같은 놈들이 많잖아. 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그러니까 내가 에서 폴라니를 처음 읽었을 때 말이야….” 옛날 이야기를 끄집어내 자식을 줄창 벌세우는 버릇도 여전하다. 이럴 때 젊은 사람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치는 수밖에 없다. “그러셨죠. 그래서 아버지가 대학 입학 선물로 을 사주셨잖아요….” 오늘도 부자지간의 이야기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에서 출발한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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