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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투쟁? 이웃의 죽음을 모욕 말라”

21세기에 부활한 70년대식 ‘배후·음모 드라마’의 주인공, 남경남 전철련 의장 독점 인터뷰
등록 2009-02-05 01:53 수정 2020-05-02 19:25

민심이 정권으로부터 멀어진다. 공안정국이 조성된다. 시민저항을 공권력으로 제압한다. 저항하던 시민이 죽는다. 정권은 사활을 걸고 사태를 모면하려 한다. 시민저항의 여러 요소 가운데 과격 폭력과 비리·부정을 들추거나 조작해 부각한다. 일련의 사태를 배후에서 음모한 위험인물을 지목한다. 이제 모든 일은 그의 체포 여부로 귀결될 것이고, 그가 사라져준다면 세상은 다시 평온해질 것이다….

남경남 전철련 의장.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남경남 전철련 의장.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죽든 말든 밀려드는 토끼몰이 진압

1970∼80년대의 군사정권은 언론권력과 합세해 이런 ‘배후·음모 드라마’를 수없이 연출했다. 21세기에 부활한 그 시나리오는 지금 남경남 전국철거민연합(전철련) 의장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그가 용산 참사의 배후라고 검찰과 보수 언론은 주장한다. 경제위기의 책임이 미네르바에게 있듯이 시민 5명, 경찰 1명을 죽음으로 내몬 책임도 남 의장에게 있다고 몰아간다. 급기야 어느 신문은 그를 군포 여대생 납치살해범과 동일시한다. 살인범도 잡는데 폭력단체 대표는 왜 못 잡느냐고 사설을 통해 닦달했다.

시민사회 내부에도 우려는 있다. 그들은 전철련의 급진성을 모르지 않는다. 저항에는 급진적 분파와 온건한 분파가 뒤섞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민저항이라는 대의명분은 전철련의 급진성을 어디까지 끌어안을 수 있는가. 전철련의 ‘정당방위론’은 경찰의 ‘법치구현론’과 어떻게 구분되는가. 토건자본의 부도덕에 맞서온 전철련은 스스로의 도덕을 견결히 지켜왔는가.

여러 질문 앞에 서 있는 남 의장을 지난 1월28일 서울 시내 모처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29일에는 서면으로 추가 인터뷰를 진행했다. 30일 공식 기자회견과 별도로 이뤄진 과의 독점 인터뷰에서 그는 당국이 제기한 의혹을 강하게 반박했다. 노동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철거민 문제에 접근해온 그의 신념은 여전히 굳건해 보였다.

- 용산 4구역 철거민 투쟁에 전철련이 합류하게 된 계기와 과정은.

= 2008년 봄, 용산 4구역 대책위 쪽에서 연락이 왔다. 가서 주민들을 만났다. 당시에는 이미 민주노동당이 철거민들과 결합하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이 향후 대책에 대해 설명회를 열었고, 전철련도 따로 설명회를 열었다. 그때 내가 주민대책위 분들 앞에서 직접 이야기했다. 용산 4구역에는 상가 세입자가 많은데 권리금도 받지 못하는 상황을 해결하려고 대책위를 만들었으니, 어떻게든 보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다. 다른 지역에서 전철련이 비슷한 투쟁을 펼쳤던 사례도 소개했다.

- 재개발·재건축 등과 관련해 지역 주민들과 전철련이 연대 투쟁을 하고 있는 곳이 얼마나 되나.

= 현재 전국적으로 60~70곳 정도 된다.

- 적지 않은 수인데, 그 지역 주민들이 전철련에 지원을 요청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 그들은 법적인 절차를 통해서는 이주와 생계 대책을 세울 수 없다고 판단했다. 투쟁하지 않고서는 정당한 요구를 쟁취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겐 전철련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 같다. 서울시철거민협의회 시절을 포함해 20여 년간 전철련이 투쟁해왔는데 그 과정에서 얻은 성과물이 있다. 그런 것이 철거민들에게 소개되면서 다른 단체에 비해 전철련에 대한 확신을 더 갖는 것 같다.

(1994년 6월 정식 출범한 전철련이 ‘20년 운동사’를 주장하는 것은 자신의 뿌리가 서울시철거민협의회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서울·경기 지역의 대규모 택지개발이 본격화된 1987년, 주민들의 자생조직으로 탄생한 서울시철거민협의회는 이후 93년 전국철거민협의회(전철협)와 94년 전국철거민연합이라는 두 흐름으로 분화·발전했다. 이들 단체에 앞서 90년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한 전국연합’이 만들어졌지만 전철련·전철협에 견줘 규모가 작다. 2000년대 이후에는 빈민해방철거민연합과 노동해방철거민연대 등이 새로 만들어졌다.)

- 20일 새벽, 경찰의 진압이 전격적으로 이뤄질 조짐이 있었나.

=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이런 사례도 없었고 경찰이 그럴 거라곤 전혀 예측 못했다. 2005년 오산 수청동 투쟁 때도 철탑이 있었는데 용역들이 몰려와 진압하려다 용역 직원 1명이 죽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도 경찰은 이후 두 달 동안 특공대원을 동원하지 않았다. 그때와 비교해도 용산 4구역은 너무 다르다. 용산 4구역에서 경찰은 드디어 개발시행의 주체가 됐다. 철거용역과 재개발조합을 대신해서 경찰이 철거민 농성을 직접 와해하려 했다. 도저히 안 되니까 떨어져 죽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닌 것처럼 토끼몰이식으로 진압했다. 경찰이 스스로 개발에 노골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이런 본질을 외면하고 철거민이 폭력투쟁을 했다면서 부각시키고 있다. 한참 잘못된 일이다. 이번에 희생된 분들은 식당 주인, 호프집 사장님 같은 평범한 우리 이웃이다. 내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것처럼 아프다. 내가 용산 4구역 일에 별로 기여한 것도 없는 상태여서 더 죄송하고, 더 답답하다. 정말 그분들이 좋은 곳으로 가셨으면 좋겠다.

(전철련은 2005년 4월부터 6월까지 경기도 오산 수청동 재개발 지역에서 망루를 설치하고 농성했다. 당시 경찰은 생필품 반입을 막았고, 철거민들은 하루 한 끼씩 먹으며 버텼다. 식수가 없어 빗물을 받아 먹었다. 4월16일, 망루에 진입하던 철거용역 직원들에 맞서 농성자들은 콘크리트 덩어리·벽돌 조각·골프공 등을 던졌다. 그 와중에 용역 직원 1명이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다. 사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머리에 충격을 받아 죽었을 수도, 심장질환에 의해 죽었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경찰이 망루에 투입된 것은 50여 일 뒤인 6월8일이었다. 40여 명의 특공대원들이 크레인에 대형 컨테이너를 매달고 망루에 진입했다. 격렬한 대치 끝에 부상자가 속출했지만, 농성은 3분 만에 진압됐다. 이 사건은 경찰이 특공대의 전격 진압 작전을 ‘신뢰’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 오산 수청동 투쟁은 철거민의 절박한 사정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지만, 동시에 전철련의 과격성 등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확산시키는 빌미가 됐다. 전철련이 불법 폭력을 일삼는다는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개발 지역 주민들은 현재의 보상 기준으로는 다른 곳으로 이주하거나 영업할 능력이 없다. 전 재산인 1억원을 투자해 상가를 운영했는데 2500만원의 보상금이 나오는 식이다. 보상금을 받아도 다른 지역의 전세 보증금조차 감당할 수 없다. 살던 곳이 개발된다고 해서 그들의 월수입이 갑자기 늘어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살 수 있겠나. 그래서 (재개발 지역에서) 못 나가는 거다. 용산 4구역에 원래 살던 700가구 가운데 100여 가구만 남았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는데, 먼저 나간 분들은 쫓겨난 것일 뿐, 충분한 보상을 받고 자발적으로 나간 것은 아니다. 이런 분들이 쫓겨나지 않으려면 자발적·자주적으로 뭉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들을 해산하기 위해 재개발 시행사가 철거용역을 선정해 농성 진압을 사주한다. 철거용역들이 난입해서 폭력을 휘두른다. 이게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그걸 모르지 않는다. 용역들의 폭력을 피하려면 옥상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옥상에서 농성하면 용역들이 바로 밀어버린다. 어린아이들조차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죽기도 했다. 옥상까지 올라갔는데도 도저히 철거용역들을 감당할 방법이 없으니까 철탑을 짓기 시작했다. 그 철탑은 전철련이 활동하기 전부터 생겨난 것이다.

철탑은 처음엔 망루 구실을 했다. 경찰이나 용역이 쳐들어오는지 지켜보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주민을 한곳에 모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망루 구실만으로는 농성을 버틸 수 없다. 그래서 돌멩이를 던지고 새총 같은 걸 쏘면서 고공투쟁을 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크레인을 들이대서 철거용역과 경찰을 함께 투입했다. 철거민들은 거기에 맞설 방법을 또 구하고…. 그런 식으로 우리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무기들이 발전했던 것이다. 생존권을 무시하는 개발정책이 주민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무기를 생산해낸 것이다.

철거용역의 폭력 피해 올라간 옥상
남경남 전철련 의장.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남경남 전철련 의장.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 그런 무기가 전철련을 향한 악선전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지 않은가.

= 망루를 만들고 새총을 쏘고 인화 물질을 비치하는 등의 일은 해당 지역의 철거대책위 차원에서 결정하는 문제다. 전철련이 지금까지 벌여온 투쟁을 돌아보면 철탑을 짓지 않고도 성공한 지역이 많다. 94년 이후 40~50곳에서 승리했는데, 이 가운데 30여 곳은 철탑 없이 보상 문제 해결에 성공했다.

철탑을 지으려면 경비가 들어가고 사법 처리의 부담도 있고 위험성도 있다. 그럼에도 그 방법을 선택하게 되는 지역은 철거용역들에게 극심하게 괴롭힘을 당한 곳이 많다. 지역 철거대책위 차원에서 그런 농성의 의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용산 4구역도 주민과 철거용역 사이의 마찰이 굉장히 많았다. 용산경찰서에 가보면 그에 대한 각종 고소·고발 사건이 쌓여 있다. 이런 지역이 (철탑 농성과 같은) 그런 투쟁을 결정한다. 그런 문제 때문에 철탑 투쟁을 하는 지역민들의 심정도 이해해야 한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전철련이 일반 시민들에게 비판을 많이 받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지역민들에게 어떤 쪽으로 가라고 고삐를 잡아틀 수는 없다. 지역 주민들이 주거권 투쟁에 나서도록 결집하는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그 밖의 일은 전철련이 할 수 없다. 검찰은 이번 철탑을 지으려고 전철련이 세 번씩이나 철거민들에게 교육을 했다고 하는데, 인터넷에 들어가보면 철탑 만드는 방법 같은 것은 즐비하게 있다.

- 전철협을 비롯한 다른 철거단체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나.

= 대안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주거 세입자들에게 분양주택이나 공공임대주택 입주권을 주라고 요구하는 단체도 있는데, 5년 뒤에 그런 주택이 마련된다 해도 철거민들이 입주에 필요한 많은 돈을 어떻게 준비할 수 있겠나. 23평 정도의 장기임대주택의 경우 1억5천~2억원의 돈이 더 필요한데 그런 돈을 어떻게 구하겠는가. 우리는 영구임대주택을 요구해왔다. 철거민의 실제 처지에 맞는 임대주택을 요구하는 것이다. 다른 단체와는 그런 차이가 있다.

- 법 개정 문제를 포함해 제도의 틀 안에서 합의를 일구려는 노력은 등한시하는 것은 아닌가.

= 전철련은 투쟁을 정리할 때 반드시 시행자와 합의서를 공증한다. 왜 그렇게 하겠나. 장차 관련 법을 제·개정할 때 필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전철련은 영구임대아파트 또는 그런 수준의 싼 주택 제공을 요구하고, 전철협은 이주 5년 뒤에 매입할 수 있는 국민임대아파트 제공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비교된다. 입주 때까지 머물 수 있는 가수용단지 또는 가이주단지 제공을 요구하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두 단체의 차이는 오히려 투쟁 방식에 있는데, 전철련이 ‘철탑’으로 상징되는 비타협 투쟁에 주력한다면, 전철협은 다른 시민단체와 연대한 제도 개선에 힘을 쏟는 편이다.)

- 공안당국이 시민·사회운동을 탄압할 때는 폭력성을 부각시키는 것 외에도 단체 관련자의 부정·비리·추문을 들춰내는 게 일반적이다. 지금 전철련과 남 의장에 대해서도 검찰은 관련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 어느 신문을 보니 내가 땅을 몇 평씩 마련해서 ‘알박기’를 해 부당이득을 취한 것처럼 보도했더라. 내가 무슨 땅투기라도 한 것처럼 의혹을 제기해놓았다.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다. 빈민운동을 못하도록 빈민운동가를 죽이고 있는 것이다. 내가 거액을 챙겼다느니 호화 주택에 산다느니 하는 악담을 하는데, 차라리 그랬다면 내 가족에게 덜 미안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는 집은 공시지가로 6100만원이 안 되는 그야말로 작은 집이다. 이 집은 70년대에 지은 집이어서 지금도 방에 난로를 피우고 지낼 정도다. 나는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 성실하게 노력했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 점이 늘 가족에 대한 미안함으로 남아 있다. 전철련의 주장, 전철연의 요구에 대해 사회적 논의를 했으면 좋겠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거짓으로 나와 전철련을 공격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야 할 정도로 일부 언론과 정부의 처지가 곤궁한 것인지 되묻고 싶다.

활동가 월급 5만~50만원… 돈 챙긴 적 없다- 주민 보상금을 받게 되면 그 가운데 상당액을 전철련이 받아간다거나 망루를 설치할 때 경비 명목으로 필요 이상의 돈을 주민들에게 거둬들인다는 의혹도 있다.

= 망루를 만들 때 수천만원의 돈을 받는다는 의혹은 전철련과는 무관한 일이다. 그건 모두 지역 철거대책위에서 알아서 한다. 내가 듣기로는 이번에도 수천만원을 철거민들이 모았지만, 그것이 모두 망루 설치 비용은 아니고, 전체적인 대책활동, 곧 투쟁기금이었다. 이번에는 투쟁 중에 농성도 포함돼 있었지만, 대부분의 자금은 식사비 등 공동으로 지출해야 할 활동 비용을 생각하고 모은 것이다. 지역 철거대책위가 대책활동 비용을 모아도 그 돈은 전철련 중앙과는 무관한 것이다. 이번 용산 4구역의 경우에도 단 1만원도 전철련이 받은 적이 없다. 이번 사건은 검찰에서 엄청난 인력을 투입해 수사 중이고, 돈과 관련해서도 아마 철저히 수사를 했을 것이다.

우리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지 브로커가 아니기 때문에 돈을 매개로 지역 주민들과 만나지 않는다. 일부 언론의 보도는 그야말로 모략에 불과하다. 우리가 돈을 원했다면, 지역에서 우리를 찾지도 않을 것이고, 우리는 금세 도태됐을 것이다. 정부와 언론에 의해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지역 주민에게 돈까지 받아 챙겼다면, 우리가 살아남아 있을 공간은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다.

(철거민 관련 단체의 다양한 분화 이면에는 단체 재정을 둘러싼 알력과 다툼이 있다는 게 통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철련을 비롯해 각 철거단체 및 활동가의 금전적 부정이 명확히 드러난 적은 없다. 현재 검찰은 주민 보상금 가운데 일부가 전철련에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에 초점을 두고 활동가들의 계좌를 추적하고 있다.)

- 검찰 조사에 응할 생각이 있나.

= 나는 절대로 비겁하게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검찰이 이렇게 치사할 수 없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있었던 것처럼 의혹을 부풀려놓는다. 그러다 나중에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 어떻게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검찰은 아예 나를 못 잡아가둬 혈안이 돼 있는데, 검찰이 내 혐의를 밝혀낸다 하면서 여러 정치적 쇼가 펼쳐질 것이다. 설사 내가 없어진다고 해도 전철련이 없어지겠는가. 경찰특공대에 이어 수구 언론까지 나서는 판이라서 정권을 지키는 검찰도 그런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겠지만, 여하튼 나는 도망가지 않는다. 출두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번에 돌아가신 열사들이다. 검찰이 열사를 두 번 죽이고 있다. 이분들이 인화 물질을 소지했기 때문에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몰아가고 있다. 과잉 진압에 의해 참사가 일어났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경찰특공대 한 분도 목숨을 잃었는데 그분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안타까운 일이다. 그분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그 문제가 잘 정리되면 분명히 자진출두할 것이다.

- 당국은 남 의장의 체포를 포함해 관련자 모두를 수사해 진상을 규명한 뒤 필요할 경우 책임자를 문책하겠다는 태도다. 방금 한 이야기를 검찰 입장에서 보면 결국 순순히 수사에 응하진 않겠다는 뜻으로 들릴 텐데.

= 검찰과 정부가 짜고 편파 수사하는 것이 분명한데, 내가 출두한다고 해서 김석기 청장이 유임되거나 파면되거나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지금 내가 여기서 마쳐야 할 의무는 열사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김석기 청장의 거취가 열사 문제보다 더 중요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전철련 의장으로서 이번에 희생된 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져야 한다. 일단 나는 장례에서 호상의 역할을 해야 한다. 검찰에 출두하는 게 두렵거나 마냥 피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고인들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다만 이 말은 하고 싶다. 경찰청장이 불법을 저지르면서 진압 지시를 내렸다면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하고 그 점에서는 정권도 마찬가지다. 그런 사람이 경찰청장의 역할을 계속 한다면 현 정권이 썩어빠진 것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고, 국민들의 거대한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 전철련의 운영은 어떻게 하나. 활동을 하려면 여러 경비가 필요할 텐데.

= 전철련 회원 가운데 주거 세입자는 한 달에 4천원, 상가 세입자는 6천원의 회비를 낸다. 그것이 기본인데 물론 운영자금으로 쓰기엔 부족하다. 그래서 여러 대학교에서 봄·가을에 축제를 하면 전철련 투쟁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주점을 연다.

- 회비가 1만원, 5천원도 아니고 4천원, 6천원인 이유가 뭔가. 어지간한 시민단체들도 1만원 이상의 회비를 회원에게 받는데.

= 그분들이 철거당하기 전이라면 1만원 내는 게 대수겠는가. 그러나 철거를 일단 당하고 나면 생활이란 게 말이 아니다. 거리에서 비닐 한 장을 치고 노숙투쟁을 한다. 돈은 아예 벌지 못한다. 이런 분들에게 전철련 운영자금을 감당할 정도의 회비를 내라고 한다면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회비는 최소한으로 받고 나머지는 다른 사업을 통해 충당하자는 원칙을 갖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곳에선가 철거민들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2005년 5월, 경기 오산 세교택지개발지구에서 철거민들이 철탑농성을 벌이고 있다(왼쪽/ 한겨레 김종수 기자). 2008년 9월,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의 주민이 강제철거에 항의하다 끌려가고 있다.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곳에선가 철거민들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2005년 5월, 경기 오산 세교택지개발지구에서 철거민들이 철탑농성을 벌이고 있다(왼쪽/ 한겨레 김종수 기자). 2008년 9월,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의 주민이 강제철거에 항의하다 끌려가고 있다.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 현재 회원 수는 얼마나 되나.

= 철거 투쟁에 따라 회원 수는 유동적으로 변한다. 회비 내는 회원 수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들고, 몇백 명 정도 되지 않겠나 한다.

- 상근 활동가들은 얼마씩 받나.

= 내가 한 달에 50만원을 받는다. 그거 받으면서도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다. 사무국장이 40만원, 총무국장이 20만원 정도 받는다. 다른 임원들은 5만원, 10만원 정도씩 받는다. 나만 해도 2007년까지 한 달에 30만원씩 받았다.

(활동비 이야기를 꺼내자 곁에 있던 전철련 관계자들이 한숨을 내쉬며 멋쩍게 웃었다.)

- 그 정도의 돈으로는 생계는커녕 활동비도 안 될 텐데.

= 물론 생계 해결이 안 되는데, 아내가 식당에서 일하면서 나한테 자장면값 정도를 더 쥐어준다. 한 달에 40만~60만원씩 버는 것 같다. 그런데 아내도 나이가 드니까 누가 써주지 않아 일거리가 없다. 지금은 딸자식의 벌이에 기대서 해결하고 있다.

- 경제적 수입이 일정치 않은 가운데서도 오랫동안 운동을 하려면 신념이 남다를 것 같다.

= 경기 용인 수지 1구역에서 살던 90년 말에 지역 대책위원장이 됐다. 그때 대책위원장직을 수락했던 이유가 있다. 개발 지역으로 고시가 되니까 인근 지역 땅값까지 엄청나게 올랐다. 살고 있는 수준에서 평행 이동하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했다. 시행자는 이사가라고 했지만, 이사갈 수가 없었다. 갈 곳이 없었다. 처음엔 막연하게 이주대책을 세우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 시행자와 합의한 이주대책이 오늘날 이야기하는 순환식 개발에 근거한 집단 이주단지였다. 그때 언론은 형평성 문제를 제기했다. 정부 시책에 호응하는 사람은 내쫓고 반대하면 특혜를 준다는 식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런 보도를 보고 다른 재개발 지역에서 찾아오는 분들이 있었다. 그런 분들과 자연스럽게 규합이 되면서 오늘날의 전철련을 만들었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집이란 것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했다. 집은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오늘 쉬는 곳이다. 노동자가 나라 경제를 이끌어가는데, 노동을 하기 위한 주택 문제를 정부가 고민하지 않으면 정부 스스로 경제성장의 길을 막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 임대주택 쟁취 투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 시민운동이 활성화된 90년대 이후에도 전철련의 노선과 지향이 강경한 것으로 비치는 면이 있다.

= 전철련 강령에 ‘철거민은 다 노동자’라는 문구가 있다. 우리는 노동자가 노동의 대가를 얻었을 때 집이나 생존, 삶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본다. 주거권 투쟁도 노동운동의 한 부분인 것이다. 그래서 일반인이 보기에는 다른 철거민 운동에 비해 이른바 ‘계급적’ 냄새가 날 것이다. 흔한 말로 하면 ‘빨갱이 같다’는 느낌이 있을 것이다. 그런 막연한 느낌 때문에 일반인들이 전철련의 운동을 제대로 인식하기는 힘든 측면이 있음을 안다.

(전철련이 강령·규약에서 밝힌 8개 투쟁 과제 가운데는 △영구임대주택 쟁취 △재입주 전 가수용단지 쟁취 △철거용역 해체 △국공유지 확대 △개발이익금 환수 등과 함께 ‘철거민 투쟁을 통한 선진의식 고취와 노동자 계급전선에 복무할 건강하고 올바른 선진투사 양성을 위한 투쟁’이 포함돼 있다.) - 방금 이야기는 앞으로도 전철련의 운동 지향과 방식이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인가.

= 개발 지역 주거민과 세입 자영업자들이 현재의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평행 이동하는 제도가 정착되지 않으면 철거민 문제는 영원히 계속될 수밖에 없다. 자본의 논리가 확산될수록 서민들은 지금보다 더 못살게 된다. 대형 마트가 생기면서 구멍가게를 흡수하고 구멍가게를 하셨던 분들은 노동자, 노점상, 철거민이 된다. 자본이 서민들의 생존 능력까지 다 뺏어가는 것이다. 현실적인 이주대책과 법제도가 하루빨리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 일이 이뤄진다면 전철련 같은 단체가 없어도 될 것이다.

며느리 앞에서 얻어맞은 노인의 죽음

- 지금 전철련이 정국의 핵이 됐다. 민주 진영 차원의 대책위원회도 만들어졌다. 이 정도로 광범위한 관심을 받으면서 다양한 단체들과 연대한 일은 처음인 것으로 안다.

= 그렇다. 이런 경험은 나도 처음이다. 실은 이렇게 많은 분들이 이번 사안을 중차대하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렇게 모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용산 참사는 결국 자본의 욕심 때문에 생긴 것이다. 정부가 그들의 편에 서서 자본의 욕심을 채워주려 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 사태의 이런 진실을 아는 분들이 결집한 것이 범국민대책위라고 본다. 이번 문제를 여기서 유야무야하면 다른 사람들도 같은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범국민대책위를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다.

남 의장은 인터뷰 말미에 고 이상림(72)씨의 이야기를 했다. 이씨는 아들, 며느리와 함께 식당을 운영했다. 어느 날 철거용역이 들이닥쳤다. 며느리가 보는 앞에서 용역 직원이 이씨의 멱살을 잡고 뺨을 때렸다. 시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며느리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런 상처와 치욕은 평생 지울 수 없다. 일흔 된 노인이 경찰특공대와 맞서 싸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누군들 젊은 용역 직원에게 그런 수모를 받고 싶겠나. 이사갈 수만 있다면, 이사를 갈 수 있도록 생계 대책만 제대로 세워준다면 그 노인이 왜 농성에 참여했겠나. 그 심정을 누가 알아주겠나.”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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