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윤근 민주당 의원은 “국회의원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뜨거운 격려를 받아본 것은 처음”이라며 감격했다. 민주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한 12월26일 직후 그의 휴대전화에는 하루 최대 200여 통의 문자메시지가 쇄도하고 있다. 1942년생 김충조 의원은 휴대전화 사용이 영 어색하기만 하다. 쏟아지는 격려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기 위해 그는 발신번호를 일일이 종이에 내려적는다. 하나하나 답장을 찍어보내다 보면 밤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다. 문자메시지 답장 기능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에게는 문자메시지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건강이 좋지 않다. 체력관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본회의장 주변을 걷는 것뿐이다. 그는 “MB악법을 막지 못하면 이렇게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할 것”이라며 결의를 다졌다. 문화방송 사장 출신인 최문순 의원은 기자 경험을 살려 본회의장 안팎을 열심히 취재하고 있다. 그는 2008년 12월29일 자신의 블로그에 “민주당은 지금 야성 회복 중”이라고 썼다.
민주당에 모처럼 활기가 돌고 있다. 흩어졌던 지지층이 모이고 있다. 인터넷 공간에서 민주당에 대한 칭찬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사이버모욕죄와 복면금지법, 그리고 언론관계법 등 이른바 ‘MB악법’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야당을 불러내고 있다. 사이버모욕죄와 복면금지법 등은 표현의 자유와 인권을 훼손하는 악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언론관계법은 ‘재벌방송’을 허용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2008년의 마지막 날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앞 로텐더홀이 소란스러워졌다. ‘MB악법 저지 결의대회’를 위해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의원 20여 명이 모였다.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등 국회 상임위 3곳을 점거한 지 13일째, 본회의장을 봉쇄한 지 일주일째였다. 대부분 넥타이는 매지 않았다. 몸싸움이 벌어질 때 넥타이는 약점이 될 수 있다. 4선의 이미경 의원(민주당)이 마이크를 잡았다. “대회를 시작하기 전에 함께 축하할 일이 생겼습니다. 조금 전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가 벌금 80만원을 선고받으셨다고 합니다.” “와” 함성이 터졌다.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 혼자 서 있던 홍희덕 민주노동당 의원이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강기갑 의원은 이날 오후 벌금 80만원을 선고받았다. 당선 무효형의 기준은 벌금 100만원 이상이다.
구호는 “인터넷에 자유를, 휴대폰에 자유를, 방송은 국민에게”였다. 이미경 의원이 선창한 구호는 자꾸 엉켰다. 다들 투쟁에 익숙지 않았다. 그때마다 웃음이 터졌다. 세 번의 시도 끝에 이들은 겨우 입을 맞췄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은 이날 ‘MB악법 연내처리 저지’라는 1차 목표를 이뤄냈다. 게다가 의원직 상실 가능성이 높았던 ‘스타’ 강기갑 의원의 의원직 유지로 ‘겹경사’를 맞았다. 피곤에 지친 얼굴에 그늘은 보이지 않았다.
불과 보름 전까지만 해도 민주당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당 지도부의 유약한 리더십이 끊임없이 도마 위에 올랐다. 이명박 정권의 일방적 독주가 계속되는데도 야당의 존재감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지난 12월13일 한나라당이 새해 예산안을 강행 처리하는 과정에서 힘 한번 제대로 못 쓰고 당한 것이 대표적이었다.
모래알 같던 이들이 어느 때보다 단합해2008년 9월 정세균 민주당 대표가 청와대 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웃으며 악수하고 나온 직후부터 시작된 지도부 리더십에 대한 문제제기는 한나라당과의 종합부동산세 논쟁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은 여전히 변변한 대응을 못했다. ‘무기력 야당’이라는 비판이 쏟아지자 당 지도부는 김민석 최고위원에 대한 검찰 수사 국면에서 ‘생뚱맞은’ 강공을 폈다. 당내에서는 “지도부가 엉뚱한 지점에서 헛힘을 쓴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종걸 의원은 12월2일 민주연대 출범식에서 “민주당이 한나라당 독주에 견제는커녕 협조를 하며 밑을 대주고 있다”고 지도부를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얼마 뒤인 12월16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 분위기는 험악했다. 한나라당이 예산안을 강행 처리한 것도 모자라 ‘MB악법’ 등 85개 법안을 밀어붙이겠다며 ‘법안전쟁’을 선언한 직후였다. 정세균 대표는 이때를 기점으로 확 바뀌었다. 비공개로 진행된 이날 회의에서 한 중진 의원이 “급한 법안은 급한 대로 협력을 해주면서 대화와 타협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하자 정 대표가 ‘버럭’ 화를 냈다.
“정치를 오래 했다는 분이 그렇게 감각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우리가 이렇게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해서 야당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겠나. 앞으로 협상은 비록 정책위의장이 하든 원내대표가 하든, 모든 책임은 대표인 내가 지겠다.”
당시 최고위원회의 참석자는 “정 대표가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의 ‘법안전쟁’ 선포는 예산안 강행 처리로 울고 싶은 정 대표의 뺨을 때려준 격이었다. 이날 회의 직후 민주당은 상임위 활동 보이콧이라는 초강수를 내놓았다. 국회 상임위와 본회의장 점거도 시작됐다.
투쟁의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10% 아래까지 추락하던 민주당 여론조사 지지율이 반등했다. 조사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대여 강경투쟁 이후 민주당 지지율은 최고 24.2%까지 기록했다. 12월23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 조사였다.
수치로 확인되는 것 이상의 성과도 있었다. 모래알 같았던 당내 분위기가 어느 때보다 끈끈해졌다. 평소 민주당 의원총회 참석률은 50%가 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적게 모이면 30여 명, 많아도 40명 안팎이었다. 의총 내용도 부실했다. 지도부가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는 경우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대여 투쟁에 돌입한 이후에는 달랐다. 국회 본회의장 점거 사흘째인 12월28일 민주당은 밤 10시가 넘은 심야에 긴급의총을 소집했다. 참석한 의원은 79명이었다. 전체 81명 가운데 몸이 불편한 박은수 의원과 문희상 국회부의장을 제외한 전원이 참석했다. 긴급의총이 그대로 철야 농성으로 이어졌다. 이종걸 의원은 1월1일 과의 전화 통화에서 이를 ‘한나라당의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이보다 더 좋은 워크숍이 없었다. 오늘로써 정확히 일주일째 본회의장에서 함께 먹고 자고 있는데, 한나라당 덕분에 이 안에서 끊임없이 서로 대화하고 토론한다. 우리 민주당이 과거 열린우리당보다 이념적 스펙트럼이 훨씬 넓은 편인데, 본회의장 ‘옥쇄투쟁’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절체절명의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됐다.”
정세균 대표에 대한 문제제기도 쑥 들어갔다. 정 대표의 리더십에 대해 수차례 문제를 제기했던 이종걸 의원도 정 대표에게 전적으로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는 “정 대표가 지난 12월16일 의총에서 민주당의 현주소와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해 누구보다 정확하게 제시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당시 의총에서 정 대표는 “내가 여야를 다 해봤지만 이렇게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일방통행식인 여당은 한 번도 없었다”며 의원들의 행동을 강조했다.
상황실장을 맡으며 본회의장 안팎을 분주히 챙기고 있는 강기정 의원도 “그동안 우리와 뜻을 함께하기 힘들어 보였던 당내 보수적인 분들도 이제는 단단하게 결합하고 있다”며 “제대로 단결하고 있다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큰 성과는 ‘야당의 발견’이다. 야당은 영어로 ‘Opposition Party’다. ‘반대당’이라는 뜻이다. 정부와 여당의 독주를 견제하고 비판하는 것이 야당이 존재해야 할 첫째 이유다. 하지만 정세균 지도부는 그동안 ‘대안 야당’이라는, 실체가 모호한 구호에 갇혀 있었다.
민주당은 이번에 한나라당의 무리한 법안 처리 계획을 1차적으로 저지하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애초 상임위와 본회의장 점거에 돌입하면서 “과연 이 싸움이 되겠는가”라며 의구심을 제기하던 목소리도 거의 사라졌다. 민주당이 이제야 야당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찾아가고 있다는 평가다. 새해 첫날 국회에서 만난 김현 부대변인은 MB악법 투쟁이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준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이 언론관계법과 사이버모욕죄, 복면금지법, 금산분리 완화 등을 통해 재벌은행·재벌방송을 허용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면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그리고 보수우익 전선과 민주개혁 전선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났다. ‘전기와 물을 끊어서 농성 중인 민주당 국회의원들에게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게 해야 한다’는 말에서도 한나당과 이명박 정부의 철학이 드러난다고 본다.”
12월31일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진성호 의원은 “식사나 물 등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을 제한해 인간으로서 극복할 수 있는 한계를 경험시켜보자”고 제안했다. 진 의원의 발언 이후 민주당의 농성 분위기는 더욱 격앙됐다. 침낭과 손전등, 건빵 등 비상물품을 준비하며 아예 장기전에 대비하는 모습도 보였다.
쫓기는 한나라당의 균열민주당과 연합전선을 펼친 민주노동당의 성과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투쟁 과정에서 강기갑 대표가 의원직 유지라는 선물을 얻었다. 사법부가 오로지 정치적인 판단을 했을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정치권 안팎에서는 강 대표가 대여 강경투쟁의 한 축을 맡고 있다는 사실을 판결 결과와 연관지어 주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강 대표에게 당선 무효형이 내려졌다면, 재판부가 떠안을 부담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란 얘기다.
민주당과의 연대를 통해 소수 정당 콤플렉스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에 대해서도 민주노동당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은 “민노당과 민주당이 공조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한나라당이 일방적으로 밀어부친 MB악법이 경제살리기와 전혀 상관없는 반민주 악법이라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었다”며 “그동안 조·중·동 등 보수 언론과 한나라당이 만들어놓은 과격 정당의 이미지를 벗어버릴 수 있었던 것도 큰 성과”라고 말했다.
쫓기는 쪽은 청와대와 당내 강경파, 국회의장 사이에서 미묘한 균열이 발생하고 있는 한나라당이다. 대야 협상을 지휘한 홍준표 원내대표의 전략도 미숙했다는 평가다. 한나라당이 내놓은 85개 법안 가운데 상당수가 내용 면에서 국민적 지지를 얻기 어려웠음에도, ‘법안전쟁’ 운운한 것도 지나친 자신감의 과시로 비쳤다.
1월2일 현재 ‘법안전쟁’의 최후 승자가 누가 될지는 알 수 없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그리고 한나라당 사이에 존재하는 의석 수의 차이는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법안전쟁’의 승패를 가늠할 주요 잣대는 국민 여론이다. 여야가 가진 상대적 힘만으로 싸움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어리석은 시도가 될 가능성이 높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야당이란 원래 지면서 이겨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18대 총선에서 졌다. 국민이 우리에게 소수 의석만 줬다. 그리고 야당을 하라고 했다. 그건 우리에게 이기라고 명령한 게 아니라 그것만 가지고 국민을 위해 싸워보라고 시험한 것이다. 우리가 국민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면, 그걸 국민들이 알아주면 그것으로 이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든 이기든, 최후까지 버텨야 하는 것이다.”
최재성 의원은 “우리가 이렇게 점거투쟁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한나라당의 수적 우위에 밀려 모든 법안들이 일방적으로 처리되고 말았을 것”이라며 “국민들도 이제 야당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시민사회가 먼저 만든 프레임‘MB악법’ 연내 처리를 저지하며 ‘절반의 승리’를 거둔 것으로 평가받는 민주당이지만, 최근 상황을 전적으로 민주당이 개척한 건 아니라는 사실도 중요한 대목이다. 민주당 내에서도 “법안 내용이 워낙 말이 안 되고 정부·여당의 추진 방식이 거칠어서 민주당으로서는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민주당 스스로 MB악법 저지 프레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가 먼저 만든 프레임 속에 민주당이 빨려들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민주당의 승리는 아직 ‘절반의 승리’다.
글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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