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작가 노씨는 이제 무당층이 됐다. 한나라당과 민주당부터 원외정당인 진보신당까지 모두 7개의 선택지 어디에도 그가 지지하는 정당은 없다. 그의 대답은 ‘지지 정당 없음’이었다. 굳이 ‘이제’라고 말한 것은 그의 이력 때문이다.
‘정치 적극층’ 한 작가의 변심
그에게도 1980년대는 뜨거웠다. 1987년 6월항쟁 때 그는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누구보다 많은 땀과 눈물을 아스팔트에 쏟았다. 그해 대선에서 민주개혁 세력은 ‘양김’으로 분열됐다. 그는 김영삼(YS) 통일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다. 당선 가능성을 따지면 김대중(DJ) 평화민주당 후보보다는 YS가 낫다고 봤기 때문이다. YS와 DJ는 모두 낙선했다. 노씨는 그때 정치에 대한 환멸을 가슴에 새겼다. 눈앞의 권력에 취해 국민들의 기대를 뿌리치는 정치인을 혐오했다.
그가 정치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는 데는 꼭 10년이 걸렸다. 1997년 대선 때는 권영길 국민승리21 후보에게 마음이 갔지만 김대중 새천년민주당 후보를 위해 표를 모았다. 일단 ‘정권 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노씨는 2002년 대선 때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에서 활동하며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했다. 2003년 11월 열린우리당이 만들어질 때 누구보다 먼저 당원으로 가입했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이 해산했을 때, 그의 마음은 정치에서 거의 떠났다. 1987년과 상황은 달랐지만 이유는 비슷했다. 그는 그래도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를 찍었다. 2008년 4월9일 총선에서는 민주노동당을 찍었다. 대선 때는 이명박 대통령이 과반 득표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총선에서는 진보정당에 한 석이라도 보태주고 싶었다. 그는 “최근 두 차례 선거에서는 해당 후보나 정당을 지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기권하지 않으려고 투표했다”고 밝혔다.
2008년 12월 ‘지지 정당 없음’이라고 밝힌 그는 “정치권이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너무 모른다”고 말했다. 그게 노씨가 무당층으로 돌아선 이유다.
2008년 하반기를 넘기면서 정치 여론조사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노씨 같은 무당층이 폭증하고 있다. 정당 지지도를 묻는 질문에 지지 정당이 ‘없다’고 답하거나 ‘무응답’이면, 둘을 합쳐 흔히 ‘무당층’(무당파)이라 부른다.
한길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무당층은 2008년 6월 이후 40%대에 진입한 뒤 9월까지 40%를 오르내렸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본격화된 10월20일 조사에서 무당층은 47.5%를 기록하더니, 11월16일 조사에서는 급기야 절반을 넘어버렸다. 정확히 52.8%였다(표 참조). 세대별로는 20~30대 젊은 층일수록 무당층이 높았고, 직업별로는 화이트칼라층이 많았다.
물론 여론조사 기관과 조사 방식에 따라 무당층 응답률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조사업계에 따르면 자동응답시스템(ARS) 방식 조사의 경우 상대적으로 무응답층이 적게 잡힌다. ARS 조사는 녹음된 음성에 따라 본인이 선택 버튼을 눌러야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치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만 응답한다는 게 업계의 정설이다. 직접 대답을 해야 하는 전화면접 여론조사보다 ARS 조사의 무당층 응답률이 낮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무당층 급증 현상은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ARS 조사 제외). 가 10월9일 자체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무당층이 50.4%로 나타났다. 6월 36.8%, 7월 38.2%, 9월 38.1%였던 ‘지지 정당 없음’ 응답이 연말로 접어들며 크게 늘어난 것이다. ·디오피니언 조사에서도 무당층은 6월 40.6%, 9월 43.7%에서 10월27일 48.9%로 껑충 뛰었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은 “무당층 응답률은 2006년 하반기 이후 30% 안팎을 꾸준히 유지해왔다”며 “이후 각종 선거를 앞두고 있거나 여야의 공방이 치열해질 때 무당층이 20%대로 내려간 적은 있었지만 50%는 물론 40%를 넘은 경우도 없었다”고 말했다.
정당정치의 최대 위기역사적 경험으로 봐도 무당층이 50%를 넘나드는 상황은 지극히 비정상적이다. 다시 홍 소장의 이야기다.
“게다가 지금 국민들 앞에는 무려 7개의 정당이 놓여 있다. 양당 혹은 3당 구도였던 과거와 달리 보수 정당으로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 친박연대가 있고 반대쪽에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라는 두 개의 진보 정당이 있다. 여기에 중도개혁을 표방하는 민주당과 창조한국당이 있는데도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지지 정당 없음’이라고 나온다. 무응답 50%는 너무 크다.”
정당정치의 디스토피아, ‘무당층 50% 시대’가 현실화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무엇보다 ‘인물 부재’ 때문이다. 경제가 어렵고, 대통령의 지지율이 20% 중반에 머무는 지금, 국민들이 다음번 지도자감에 거는 기대감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최근 정치권에는 국민들이 자신과 동일시하거나 정치적 지향을 투영시킬 리더가 없다. 한나라당에는 박근혜라는 대안이 있지만, 민주당 등 야당 쪽에선 보이지 않는다.
문화단체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정아무개(31)씨는 2008년 4월 총선 때까지 줄곧 민주당에 표를 던졌다. 지금은 지지 정당이 없다. “전통적으로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을 지지해왔기 때문에 저는 긍정적으로 봐주려고 노력하는 편인데도 야당에 관심이 가지 않아요. 무엇보다 인물이 없는 거죠. 정치라는 게 누군가 두각을 드러내면 다른 누군가 견제를 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건데, 지금 야당에는 아무도 없잖아요.”
출판편집인 권아무개(30·여)씨는 지난 대선에서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를 찍었다. “적어도 ‘권영길 선생님’은 거짓말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4월 총선에서는 아무에게도 투표하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은 ‘현실정치에 먹히지 않는다’는 생각을 굳혔고, 민주당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름이라도 들어본 사람은 추미애와 김민석 정도였다. 권씨는 “인물 호감도에 따라 정당 선호도를 결정하는 편”이라며 “대선 때도 민노당 후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권영길’이기 때문에 그를 찍었다”고 말했다.
안부근 디오피니언 소장은 민주당이 인물 부재와 정책 부재라는 이중의 위기에 봉착했다고 지적했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 모두 별로이니 인물이라도 보여달라는 것이 민심입니다. 중요한 건 대선이겠죠. 그런데 이대로 간다면 정권이 바뀌겠습니까. 안 바뀌게 돼 있습니다. 한나라당에는 그나마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 지지율이 있지만 민주당은 정책과 인물 두 개 모두 국민들의 ‘니즈’(needs)를 못 맞추는 겁니다. 정당정치의 최대 위기라고 봐야 합니다.”
한국 정치사에서 무당층이 전체 응답자의 50%를 넘는 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깝게는 문민정부 시절이던 1995년, 무당층이 50%를 넘었다. 1993년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김영삼 정부는 군 하나회를 없애고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하는 등 강도 높은 개혁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기득권층의 강한 반발에 부닥쳤다. 1995년 초 집권 민자당의 김종필 대표가 YS로부터 ‘토사구팽’당하는 것을 계기로 여당의 인기는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1994년 10월21일 성수대교 붕괴와 1995년 4월28일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사고, 같은 해 6월29일 서울 서초동 삼풍백화점 붕괴 등 대형 사고가 연달아 터졌다. 민심의 불만은 극대화됐다. 무능한 대통령과 정부 관료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정동영·손학규 복귀설 모락모락제1야당이던 평화민주당의 사정도 좋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2년 대선에서 패한 뒤 정계를 은퇴한 탓에 이기택 대표가 당을 이끌어왔다. 그는 1994년 하반기부터 줄곧 리더십이 약하다는 혹평에 시달려왔다. 당의 인기도 바닥이었다. 여야의 동반 몰락은 무당층 증가로 나타났다. 1995년 7월6일 한길리서치 조사를 보면 기성 정당이 아닌 ‘재야’와 ‘지지 정당 없음’을 선택한 사람은 각각 12.7%, 44.8%였다. 모두 57.5%가 무당층으로 나타난 것이다. 같은 해 10월6일 ·대륙연구소 조사에서도 ‘호감이 가는 정당이 없다’는 비율이 51.7%에 달했다.
대통령의 실정과 잇단 대형 사고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관료들의 무능, 여기에 당내 권력투쟁에 매몰된 여당과 대안을 보여주지 못하는 야당의 조합이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을 불러온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당시 정치권은 ‘정치 복원’을 선택했다. 초점은 ‘인물’이었다. 야당은 1996년 4월11일 총선을 앞두고 가장 현실적 대안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옹립했다. 1995년 9월5일 김대중은 민주당에서 데려온 65명의 국회의원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여당인 민자당도 같은 해 12월6일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꿨다. 이회창, 박찬종 등을 영입했다. 같은 해 5월30일 김종필 총재를 중심으로 한 자민련이 창당됐다. 1995년은 그야말로 격동의 한 해였다.
다시 2008년이다. 상황은 1995년과 비슷하다. 1995년의 국가적 위기는 대형 사고에서 비롯됐다면 지금은 전세계적 경제위기로부터 시작됐다는 것 정도가 차이다. ‘무당층 50% 시대’에 처한 각 정당의 움직임도 바빠지고 있다. 급한 것은 존재의 이유를 보여줘야 할 처지에 놓인 야당들이다.
12월4일 국회에서 ‘경제·민생 위기 극복을 위한 제 정당·시민사회단체·각계인사 연석회의’(연석회의)가 열렸다. 연석회의에는 민주당·민주노동당·창조한국당·진보신당·사회당 등 5개 정당과 참여연대, 민변, 민주노총 등이 참여했다. 일단은 서민 지원과 복지 확충 등을 요구하는 정책연대의 성격이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야당의 이같은 움직임이 내년 4월로 예정된 재·보궐 선거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민주당 관계자는 최근 “내년 4월 재·보선이 아니라면 늦어도 2010년 지방선거 전까지는 민노당과 진보신당은 물론 창조한국당까지 포함하는 넓은 선거연합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계 개편의 가능성까지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야권의 움직임에 대한 평가는 반반이다. 우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몰하는 것보다는 남북관계 등 최대공약수를 중심으로 진보·개혁의 가치를 위해 뭉치는 것은 바람직하다는 시각이 있다. 반면 정책연합으로 가는 길도 험난한데 벌써 선거연합 혹은 정계 개편을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분석도 만만치 않다. 1995년 여야의 정계 개편이 통했던 것은 여당에는 이회창, 야당에는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야당은 ‘재야’라는 지원 세력을 업고 있었다. 현재 야당에는 외부의 지원 세력도, 영입할 만한 인물도 없다.
이와 관련해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2008년 9월 ‘2010 인재위원회’를 만들었다. 2010년 지방선거에 대비해 한나라당에 맞설 지역 인재를 키운다는 게 정 대표와 민주당의 목표다. 하지만 아직 뚜렷한 성과는 없다. 서울시장 후보와 경기도지사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들은 모두 당내 인물들이다.
인물이 없다 보니, 대선과 총선 패배의 주역인 정동영, 손학규 전 의원의 복귀설이 끊임없이 나온다. 정동영 전 대선 후보는 전주 덕진구에 출마한다는 설이 파다하다. 손학규 전 의원은 지방선거를 전후해 경기도 지역구에 도전한다는 설이 돌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인기도 바닥 수준이다.
무당층이 기다리는 인물은 어디에진보신당에서는 노회찬, 심상정 두 간판 스타가 각각 2010년 서울시장 선거 등을 향해 뛰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인지도가 희망이다. 단, 원외라는 한계에 막혀 고전 중이다. 민주당에서는 벌써부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대선 후보로 영입해야 한다는 궁색한 주장도 제기되고 있지만 현실성은 낮다. 반 총장의 성향으로 볼 때 외교관으로서는 적합하지만, 권력투쟁을 불사해야 하는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는 평가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은 “1995년 DJ가 했던 ‘헤쳐모여식’ 정계 개편은 지금의 정치 현실과 맞지 않는다”며 “정치권 안팎에 의미 있는 정치세력이 있을 때는 정치공학적 접근도 가능하고 정계 개편도 가능하지만, 지금은 역량과 대중성을 갖춘 당내 뉴리더를 키우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역시 해답은 ‘인물’이라는 이야기다. ‘무당층 50%’가 기다리는 인물은 언제쯤 나타날까.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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