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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텔부터 아고라까지 ‘경방 고수’ 무한 진화

외환위기 겪으며 네티즌들 내공 쌓아… 계급장 떼고 품질로 승부하는 토론방 각광
등록 2008-12-05 14:54 수정 2020-05-03 04:25

1995년 PC통신 하이텔에 플라자 게시판이 만들어졌고,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했다. 2004년 포털 다음에 아고라 토론방이 탄생했고, 2008년 다시 한번 경제위기가 닥쳤다. 네 사건은 ‘경방고수’(다음 아고라 경제 토론방의 고수) 성장사의 표지석이다. 2004년 아고라는 95년 플라자의, 2008년 경제위기는 97년 외환위기의 ‘데자뷔’다. 다만 결정적 차이가 있다. 10여 년 전의 PC통신 동호회원들이 이젠 ‘고수’가 되어 나타났다.

11년의 사이를 두고 벌어진 경제위기의 양상은 비슷한 듯하지만 경제 논객들은 그 사이 진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왼쪽 사진은 1997년 12월 한 증권사 객장의 풍경이고 오른쪽은 지난 10월 한-미 통화 스와프 협정을 체결할 당시 한 시중은행의 모습이다. 한겨레 김종수·김경호 기자 (왼쪽부터)

11년의 사이를 두고 벌어진 경제위기의 양상은 비슷한 듯하지만 경제 논객들은 그 사이 진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왼쪽 사진은 1997년 12월 한 증권사 객장의 풍경이고 오른쪽은 지난 10월 한-미 통화 스와프 협정을 체결할 당시 한 시중은행의 모습이다. 한겨레 김종수·김경호 기자 (왼쪽부터)

‘SDE’(아고라 필명)는 그 역사의 산 증인이다. 그의 데뷔 무대는 하이텔 플라자였다. 97년 7월부터 3년여간 기아자동차 사태, 공적자금 문제, 대우차 부도 사태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글을 썼다. 하이텔 사용자들 사이에선 그때부터 경제 논객으로 통했다. “경제 현안에 대해 글을 꾸준히 올리는 다른 필자들도 제법 있었다”고 ‘SDE’는 회고했다. 그 시절, 박경철 안동신세계연합병원 원장도 천리안과 하이텔에서 증권 관련 동호회에 가입해 여러 글을 썼다. 10여 년 뒤 그는 ‘시골의사’라는 필명으로 재야 증권 전문가의 유명세를 치를 터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이들의 파급력은 크지 않았다. PC통신 시대의 초엽인 1995년, 그 이용자 수는 30만여 명이었다. 전화를 걸어 어렵게 접속한다 해도 2400bps(초당 2400바이트 전송)의 속도를 인내해야 했고, 그마저도 종종 연결이 끊겼다. 플라자의 운용 방식도 전문 논객에게 불리했다. 잡다한 글이 뒤섞여 게시판에 올라왔다. 각 글에 대한 네티즌의 평가 시스템이 마련되기 전이었므로, 추천이나 댓글 같은 기능도 없었다. 좋은 글을 가려 읽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경제 관련 동호회 방에 가면 그런 수고를 조금 덜 수 있었지만, 비회원에겐 개방되지 않는 공간이었다. 모든 면에서 하이텔 플라자는 다음 아고라의 원시 모델이었다.

온라인 공간, 대안 언론으로 진화

플라자의 탄생과 함께 기억돼야 할 사건은 97년 외환위기다. 오늘날의 경방고수 대부분이 97년 외환위기로부터 결정적 자극을 받았다. “IMF 때… 저는 돌아가신 친할아버님이 물려주신 금두꺼비에 돌반지까지 금이란 금은 모조리 다 쓸어서 쳐냈습니다. 그 후 10여 년간 뼈져리게 느낀 건, 이런 고통 분담이라는 말이 빛 좋은 개살구(라는)… 회의뿐이었습니다. 고통 분담하자고 선두에서 떠들어대는 놈치고 진짜 고통 분담하는 놈은 아무도 없죠. …그게 지난 10년간 제가 얻은 결론입니다. 전 두 번 다시 이용당하지 않을 겁니다.”(2008년 7월24일, ‘미네르바’가 아고라에 올린 글) 외환위기는 경제 정보의 중요성, 경제관료 및 기성 언론에 대한 불신 등을 대중에게 널리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미네르바’를 비롯한 경방고수들, 그리고 그들에 환호하는 네티즌 대부분이 외환위기 이후의 상실감을 트라우마 삼아 아고라에서 활동해왔다.

“모르면 당한다”는 정서가 대중에게 번지는 사이, 온라인 공간은 ‘대안 언론’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인터넷에 뿌리를 둔 대안 매체들이 90년대 후반부터 만들어졌다. 1998년 7월에 탄생한 는 이 분야의 진정한 원조다. 이들이 내세운 ‘B급 정신’은 기성 담론의 비틀기에 그치지 않고 전문가의 영역까지 넘봤다. PC통신과 인터넷의 세례를 받은 30대 경제 전문가들이 필명을 내세워 에 글을 실었다. 기성 언론에서 접할 수 없는 내용이 많았다. 익명의 경제 논객들이 언론을 통해 불특정 다수의 독자와 만난 최초의 순간이었다.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경제 전문가나 국내 기업의 애널리스트 등이 글을 보냈죠. 그 사람들로선 자신의 이름을 걸고 신문에 글을 쓸 수는 없었으니, 가 유일한 대안이었던 것 같아요. 다만 지금처럼 한 사람이 지속적으로 발언하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안에 대해 발언하는 식이었어요.” 김어준 총수의 회고다.

월가 전문가들도 글 보내와

그러나 그 시절만 해도 ‘선수’가 부족했다. 정치·사회 현안에 대해선 누구나 한마디씩 할 수 있었지만, 경제는 달랐다. 뭘 알아야 몇 자의 글이나마 쓸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2000년 정보기술(IT) 거품 붕괴는 전 국민적인 경제 공부가 본격화되는 계기가 됐다. 누구나 주식투자를 했고, 누구나 눈뜬 채 폭락장을 지켜봐야 하는 시기였다. 세기말과 함께 찾아온 IT 거품의 붕괴는 국민들의 경제불안 심리를 다시 한번 자극했다. ‘팍스넷’ ‘씽크풀’ 등 인터넷 증권 정보 사이트를 중심으로 증시 붕괴의 이유를 규명하려는 익명의 글들이 쏟아졌다. 스스로 공부한 시장 이론에 자신의 경험을 덧댄 내용이 많았다. 경제 글쓰기의 눈높이가 개인 투자자의 위치로 내려왔다.

박경철 원장이 강호에 본격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1999년 말, IT 거품이 곧 꺼질 것이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그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증권가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사람들이 주먹구구로 주식을 하는 것 같아 투자 이론을 소개하는 정도였어요. 당시는 의사가 주식을 한다는 것이 알려지면 좋을 때가 아니어서 절대 나를 드러내지 않았죠.”

‘거품 붕괴’를 예견한 시골의사의 등장과 ‘환율 폭등’을 예견한 미네르바의 등장은 닮은 구석이 있다. 경제관료나 언론이 외면한 최악의 사태를 정확히 예측했다. 이 무렵부터 주식시장에선 경제학자나 경제관료보다 ‘비전문가’들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들이 ‘고수’로 거듭날 수 있는 토양도 갖춰졌다. 경제 정보에 대한 수요가 갈수록 늘면서, 각종 경제 매체들이 새로 만들어졌다. 2000년 1월, 가 국내에선 처음으로 금융·증권 전문 인터넷 뉴스 송출을 시작했다. 같은 해 3월 경제신문 온라인 매체 가 탄생했다. 신문사들도 앞다퉈 경제 섹션을 만들었다. 신생 경제 전문지, 경제 전문 케이블 채널 등도 생겼다. 바야흐로 경제 정보의 홍수 시대가 열렸다. 몇몇 매체만 꼼꼼히 살펴도 각종 통계와 지표를 얻을 수 있게 됐다. 자료에 관한 한 경제 전문가와 일반인의 장벽이 사라진 것이다. ‘상승미소’(아고라 필명)는 “내가 활용하는 대부분의 자료는 국내 언론을 통해 얻는다”고 말한다. 인터넷망의 보급으로 외국 언론에 대한 접근도 손쉬워진 것은 물론이다.

대중과 소통하는 글쓰기의 혁명
사이버 공간은 십수 년째 비주류 경제 비평가들이 제도권에 대항하는 진지의 구실을 하고 있다. 맨 위는 인터넷이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전인 1990년대 중반부터 인기를 끌어온 하이텔. 가운데와 맨 아래는 다음 아고라와 한겨레신문 토론 사이트인 ‘한토마’

사이버 공간은 십수 년째 비주류 경제 비평가들이 제도권에 대항하는 진지의 구실을 하고 있다. 맨 위는 인터넷이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전인 1990년대 중반부터 인기를 끌어온 하이텔. 가운데와 맨 아래는 다음 아고라와 한겨레신문 토론 사이트인 ‘한토마’

정보의 장벽이 사라지면서, 기득권 전문가들의 경제 분석에 대한 의문은 더 확산됐다. 기성 매체가 제공한 정보가 오히려 기성 매체의 권위를 잠식했다. 유력 증권사의 애널리스트인 김학영(42·가명)씨는 “경제 관련 언론인들은 무식하다”고 잘라 말한다. 애널리스트들이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은 그도 인정한다. 되도록 비관적 전망은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도 언론이 더 나쁘다고 김씨는 생각한다. “드물긴 해도 찾아보면 ‘비관적 보고서’들이 시장에 나와 있거든요. 경제 전문지 기자들은 그런 내용을 쓰지 않아요. 일간지 기자는 아예 몰라서 못 쓰는 것 같고.” 경제 정보에 대한 평등한 접근은 결국 경제관료·경제학자·경제언론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광범위한 자양분이 됐다.

2002년 이후, 허구의 ‘매트릭스’에 대한 경방고수의 공격은 마지막 담금질을 남겨두고 있었다. 온라인 글쓰기였다. 이 만난 경방고수들 가운데는 등에 자신의 글을 간간이 투고해온 이들이 많았다. 2002년 대선, 2004년 탄핵 등 굵직한 정치적 격변 속에서 대중과 소통하는 글쓰기를 경험한 것이다.

‘상승미소’가 대표적이다. 2000년 무렵부터 그는 시민기자로 등록해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인터넷에 올렸다. 정치 웹진 에는 ‘해리포터’라는 필명으로 정치를 풍자하는 글을 썼다. 노무현 정부 초창기, 검찰의 구태를 비판하면서 “당신들은 검사가 아니라 검새”라고 쓴 글은 제법 인기가 있었다.

그 한가운데 다음 아고라가 있다. 2004년 12월 첫 서비스를 시작한 아고라는 탄생과 동시에 정치·사회 문제에 대한 대표적 공론장으로 떠올랐다. 아고라가 10여 년 전의 플라자 게시판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행동’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자살을 암시하는 LG텔레콤 광고의 철거를 요구하고, 서울 인사동 쌈지길의 유료 입장을 비판하며, 인도 없는 도로를 고쳐달라고 촉구하는 일들이 모두 아고라에서 이뤄졌다. 아고라의 네티즌들은 ‘청원’의 방식을 빌어 문제를 직접 해결하려 했다. 이들은 결국 정부와 기업을 움직여 현실을 바꿨다. 누군가의 명령이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다수의 토론으로 합리적 해법을 찾아 그 관철을 위해 행동에 나서는 ‘집단지성’이 등장한 것이다. 지난 봄과 여름에 걸친 촛불정국은 그 대표 사례다.

“전·현직 경제관료도 참여하는 느낌”

그러나 촛불정국 때까지만 해도 경방고수의 대부분은 고수가 아니라 대중이었다. 아고라를 들락거렸지만 게시된 글을 읽는 ‘눈팅족’, 즉 독자에 불과했다. “워낙 사는 게 바빠 촛불시위 현장에 한 번도 나가지 못했어요.” ‘헝그리울프’(아고라 필명)의 말이다. 광우병과 이명박 정부, 그리고 촛불은 경방고수의 진짜 실력을 드러내기엔 지나치게 ‘정치적’인 이슈였다.

그리고 지난 7월, 아고라에서 활동 중이던 네티즌 가운데 일부가 경제위기의 징후에 주목했다. ‘미네르바’가 선두주자였다. 뒤이어 ‘SDE’ ‘상승미소’ ‘나선’ ‘헝그리울프’ 등의 필자들이 아고라 경제방에 속속 글을 올렸다. 7월부터 일찌감치 경제위기를 예측·분석한 글을 올린 이들은 8월을 거치면서 ‘경방고수’의 호칭을 얻었다.

포털 다음의 자체 집계에 따르면, 아고라 경제방(부동산방·주식펀드방 포함)의 8월 한 달 게시글은 1만5천여 건이었다. 9월 들어 3만3천여 건으로 늘었고, 10월에는 7만6천여 건으로 다시 두 배로 늘었다. 조회 수가 1만 건을 넘기는 글이 하루에도 수십 개씩 생겼고, 경방고수로 소문난 이들의 글은 하룻만에 10만 건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고수가 고수를 부르는 ‘눈덩이 굴리기’ 현상도 일어났다. “10월부터 양질의 댓글, 깊이 있는 반론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전·현직 경제관료들이 아고라 경제방을 보면서 필명으로 글을 쓴다는 느낌을 받았죠.” ‘SDE’의 말이다.

김현경 연세대 인류학 강사는 최근 아고라 경제방에 대한 연구논문을 발표했는데, 여기서도 비슷한 추세가 확인된다. 6월부터 9월까지 조회 수 1만 건 이상, 찬성 1천 표 이상을 얻은 62명의 아고라 경제 논객을 조사했는데, 5~7월에 처음으로 글을 올린 경우가 35명으로 가장 많았다. 2007년 11월 이전부터 꾸준히 글을 쓴 경우는 62명 가운데 11명에 그쳤다. 경방고수의 전사(前史)는 장구하지만, 그 본격적인 등장은 최근 서너 달 사이에 폭발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8월부터 아고라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양원석’(아고라 필명)은 경방고수의 글에 대한 해설과 주석을 달다가 그 스스로 또 한 명의 고수가 된 경우다. 그가 보기에 경방고수의 진정한 힘은 “주어진 권위가 없는 상태에서 대중을 설득하는 내용의 품질”에 있다. “언론, 정부, 애널리스트, 교수 등은 권위를 갖고 있지요. 그러나 아고라 논객들에겐 그런 게 없어요. 계급장 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면 글 자체로 판단할 수밖에 없어요. 수많은 글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이 각광받는 거죠. 진정한 경쟁이에요. 권위를 신뢰하지 않고 내용을 신뢰하는 거죠.”

한국 경제담론의 매트릭스 깨뜨려

미국이나 유럽에선 파워블로거들이 유명세를 치르는 반면, 국내에선 아고라 또는 ‘한토마’(의 토론방) 등의 토론방이 각광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SDE’도 블로그보다는 토론방을 선호한다. 자신의 블로그에는 기사를 갈무리해 올려두고, 본격적인 글은 아고라나 한토마에 올린다. “피드백이 즉각 오는 게 더 좋다”고 말한다. 글을 써놓고 방문객을 기다리는 블로거의 방식보다 다른 글들과 자웅을 겨루는 아고라의 공격적 방식을 더 선호하는 한국 네티즌들의 특성이 경방고수의 탄생에도 기여한 셈이다.

격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개인 신상이 잘 드러나지 않도록 한 다음 아고라의 체계도 경방고수에겐 보탬이 됐다. 아고라에 글을 올린 필자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IP 주소만 일부 노출될 뿐, 글쓴이에게 전자우편을 보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 아고라 관리팀은 글쓴이의 신상정보를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있다. 이는 네티즌들이 스스로 얻어낸 성과이기도 하다. 지난 10월 아고라는 ‘베스트글’을 전면에 내거는 기존 체제에 변경을 가했는데, 이에 반발한 네티즌들이 한토마로 둥지를 떼지어 옮겼다. 자유로운 소통이 가능한 공간을 찾아 논객들이 ‘무한진화’를 계속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경방고수들은 최근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10여 년을 갈고닦은 내공에도 불구하고, 익명의 논객을 법으로 처벌하려는 정부의 태도 앞에 주춤하고 있다. 김경한 법무부 장관은 지난 11월3일 국회에서 “인터넷 괴담이 범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한다면 수사해야 한다”고 밝혔다. 몇몇 경방고수들은 김 장관의 발언 직후,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글을 자진 삭제했다. 경방고수의 선두주자인 ‘미네르바’가 절필을 선언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러나 10여 년에 걸친 경방고수의 탄생 과정을 이해한다면, 그들을 갱유(坑儒)하고 그들의 글을 분서(焚書)하려는 시도가 가망 없는 짓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경제 담론의 새로운 진앙지가 생겼고 전혀 다른 종류의 경제 전문가들도 등장했다. 달콤한 것만 말하는 한국 경제 담론의 ‘매트릭스’는 이미 깨져버렸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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