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5일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한국개발연구원(KDI)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새 정부가 추진하려는 주요 경제정책과 관련한 보고서를 하나 만들어보라는, 정부 고위 당국자의 뜻을 전하는 전화였다. 연구 주제는 환율상승과 임금동결. 정부가 나서서 환율을 올리고 전 국민의 임금을 동결하면 경제가 어떻게 될 것인지 연구해보라는 것이었다. KDI 거시경제팀을 중심으로 연구팀이 꾸려졌다.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환율정책은 새로운 주제가 아니었고, 전 국민 임금동결도 황당하긴 해도 결론은 뻔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쯤 지난 뒤 ‘환율 및 임금 관련 정책에 대한 견해’라는 제목의 보고서가 나왔다. 이 보고서는 3월10일, 그러니까 새 정부가 출범한 지 정확히 보름째 되는 날 정부 쪽에 전달됐다.
좋지 않고, 할 수도 없고…이 최근 입수한 이 비공개 보고서의 서두는 다음과 같다. “환율상승 및 임금동결을 정책적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음.” 정권 출범과 거의 동시에, 아니 출범 이전부터 정권 차원에서 검토된 경제운영 철학이 바로 고환율과 임금동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정책 방향에 대한 KDI의 결론은 ‘아니올시다’였다. 둘 다 실현해서도 안 되고 실현할 수도 없는 정책들이라는 것이다.
이제 갓 출범해 의기가 충천한 새 정권의 경제 운용 방향에 대해 국책연구원이 이례적으로 강력한 반대를 표한 이유는 보고서 첫 페이지에 간략히 소개돼 있다. “자본시장이 개방된 상황에서는 정부가 환율을 타기팅(인위적으로 정해두기)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며, 이와 같은 팩트를 거스르고자 했던 대가가 얼마나 컸는지는 이미 1997년 외환위기와 2003~04년 환율방어 시기를 통해 경험한 바 있음.”(상자기사 참조) “민주주의 시장경제에서 임금을 동결한다는 것이 (그것도 환율상승과 같은 인플레이션 정책과 함께)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생김.”
보고서는 뒤이어 이같은 정책을 펴서는 안 되는 이유들을 조목조목 나열하고 있다. 우선 환율상승 정책을 펼 경우엔 “수출을 늘리는 반면 수입물가 상승을 통해 국내 물가를 상승시켜 내수를 위축시키고 특히 설비투자의 위축 효과는 더욱 클 것”이라고 우려의 뜻을 밝혔다. 환율을 올리는 것 자체는 “가계에 부담을 발생시키는 만큼 기업(특히 수출기업)의 수익성을 개선시키는 요인”이라며 “이는 소비자 및 내수기업에 조세를 부과하여 수출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정책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결론 부분에서는 심지어 “장기간 인위적인 환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세계 금융시장을 상대로 한국 정부가 도박을 벌여야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의미 있는 환율상승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지극히 불투명함”이라고 지적했을 정도다. 환율에 대한 인위적 개입은 좋지 않은 정책일뿐더러, 오래 유지하려야 유지할 수도 없을 것이라는 차가운 진단을 내린 셈이다.
실현하려야 실현할 수가 없다는 점에서는 ‘전 국민 임금동결’ 정책 또한 마찬가지였다. 보고서는 임금동결에 대해 “단기적으로는 물가가 하락하는 동시에 생산이 증가하는 모습을 상정할 수 있다”면서 “그러나 이와 같은 효과는 그야말로 단기적 효과에 불과한 것이며, 중장기적으로는 스태그플레이션과 같은 보다 큰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같은 예측보다도 무게가 실리는 지점은 “임금동결을 내세우기는 정치적으로도 지극히 어려울 것”이라는 대목이다. △최근 노동소득분배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는 점 △물가상승률이 높은 상황으로 임금동결을 내세울 명분도 거의 없다는 점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임금상승률은 노동생산성 증가율과 비슷한 수준이고 수출기업인 제조업의 경우에는 생산성 증가율이 실질임금상승률을 크게 상회하는 점 △기업 비용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하락하는 추세인 점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됐다(그래프 참조). 한마디로 생산성 향상률에 비해 임금상승률이 더 낮고 물가까지 크게 뛰는 마당에 그런 아이디어가 가당키나 하겠냐는 것이다.
기업에 이익 되고 양극화 심화되는 결론이같은 보고서 내용과 관련해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청한 한 KDI 연구위원은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보고서를 내더라도 완곡하게 반대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 보통인데, KDI에서 이렇게까지 (비판하는) 톤이 높은 보고서를 내다니 좀 이례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연구위원은 “‘해서는 안 된다’는 정중한 말투지만 실제 내용은 ‘무슨 바보 같은 발상이냐’고 깨는 것”이라며 “개별 기업들이 알아서 할 임금 문제를 정부 차원에서 일괄적으로 동결하면 어떻겠냐는 발상 자체가 너무 황당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KDI는 공식적으로는 말을 아끼고 있다. 지난 11월19일 취재진과 만난 KDI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런 보고서를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비공개 보고서에 대해서는 뭐라 코멘트할 수 없다”며 “KDI의 기본 스탠스는 가격 정책은 시장에 맡겨야지 누가 뭐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취재진의 계속된 질문에 “보고서 내용이 전부다. 우리는 정부가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옳지 않다는 우려를 나타낸 것”이라며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정부가 시장의 흐름에 반하는 정책을 취하려고 하기에 이를 지적했을 뿐이란 것이다.
여기서 안타까운 점은 KDI의 강력한 반대 뜻이 관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 국민 임금동결이야 어차피 실행 자체가 불가능한 아이템이었지만, 환율과 관련해서는 가지 말아야 할 방향으로 발을 내디뎠기 때문이다. 실제 이명박 정부 초기부터 고환율 정책 기조가 확연했다. 물론 그 한가운데는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있었다.
강 장관은 최근 “고환율 정책을 펼친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가 환율상승을 통해 경상수지를 개선하고 성장률을 높이려고 한 것은 경제정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심지어 대통령실 국정기획수석비서관과 경제수석비서관, 기획재정부 장관, 한국은행 총재, 금융위원장이 참석하는 청와대 서별관회의(거시경제정책협의회)에서도 환율정책을 두고 강 장관은 다른 참석자들과 여러 차례 의견 충돌을 빚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강 장관은 부인했지만, 정부가 출범 초기 환율상승을 유도했거나 최소한 용인 또는 묵인하는 정책을 폈다는 사실이 이 보고서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된 셈이다.
물론 그 뿌리는 이명박 대통령과 닿아 있다. 이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일부는 친기업적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꺼리지만 나는 당당하게 쓰겠다. 새로운 정부가 친기업적으로 간다고 하는 것은 분명하다”(1월2일 경제연구소장들과의 간담회)고 밝히는 등 ‘친기업’을 유난히 강조해왔다. 그런데 환율상승과 임금동결의 공통점은 현실화됐을 경우 두 정책 모두 단기적으로 기업들에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점이다. 보고서에서는 고환율 정책을 두고 “소비자 및 내수기업에 조세를 부과하여 수출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정책과 유사”하다고 지적했으며, 임금동결에 대해서는 “가계소득을 기업소득으로 이전시키는 것”이라고 밝혔다. KDI 보고서는 또 “수출기업의 수익이 증가할 경우 근로자의 임금 상승과 납품 기업의 이익 증대에 따른 내수 확대를 기대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타당성이 높아 보이지 않음”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환율상승 정책을 통해 기업의 이익 창출을 도우면 순익이 늘고 투자 의욕이 일어나고 이에 따라 생산 → 고용 → 소득 → 소비 → 수출 → 연구·개발을 순차적으로 확대시킬 것이라는 환율상승론자(환율주권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고환율 정책은 물가 상승 → 내수 부진 → 양극화 심화라는 부작용만 불러올 뿐이라는 얘기다. 결국 환율상승과 임금동결은 전체 경제의 선순환을 촉진하는 것과 무관한, 그냥 ‘부의 이전’에 불과하다는 얘기인 셈이다.
한편, 보고서를 발주한 정확한 주체가 누구인지는 아직 의문으로 남는다. KDI에 이런 연구과제를 줄 수 있는 곳은 청와대나 기획재정부 정도인데, KDI 쪽에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KDI 고위 관계자는 보고서 발주처와 관련해 “여기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며 말을 아꼈다. 보고서 작성 주무를 맡았던 조동철 KDI 거시경제팀장은 “(환율상승과 임금동결에 관한) 그런 말들이 당시에 오갔기 때문에 우리가 연구한 것 아니겠냐”면서도 어디에서 보고서를 만들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익명을 요청한 한 KDI 연구위원은 “환율정책 등 보고서에서 언급된 내용들로 봐서는 100% ‘최·강(최중경 기획재정부 전 차관·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라인’을 염두에 두고 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강 장관이 잡은 정책 방향에 대해 기획재정부가 연구용역을 발주하자 KDI가 작심하고 반대 뜻을 담은 보고서를 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반대로, 정말 그랬다면 KDI가 이렇게 강력한 톤으로 반대 뜻을 개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기획재정부와 KDI는 평소 수없이 많은 보고서를 주고받는, 업무상 매우 긴밀한 관계인데 KDI가 이렇게 대놓고 면박을 주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보고서 발주처가 청와대라는 결론으로 연결된다. 특히 정권 초기 청와대 경제라인 쪽에서 강 장관의 고환율 정책 등 ‘무모한 발상’을 말리기 위해 보고서를 만들도록 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보고서가 ‘이례적으로 강경한 톤’으로 씌여진 점이 설명된다.
하지만 청와대 경제수석실 관계자는 “환율상승과 임금동결 모두 정부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그런 용역을 정부가 줬을 리 있겠냐”며 “그런 보고서에 대한 얘기는 처음 듣는다. 혹시 기획재정부가 어떻게 관련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청와대와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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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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