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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왜 건드려서

‘과거사 청산 정국’에서 떠올라 ‘친일파’라는 꼬리표를 달고 총공격 대상이 되기까지
등록 2008-11-21 03:01 수정 2020-05-02 19:25

뉴라이트의 정치적 성공이 정치 편향 논란으로 번진 것처럼, 뉴라이트를 세상에 알린 ‘역사 논쟁’ 역시 뉴라이트 운동에 부담이 되고 있다. 모든 뉴라이트 단체들은 하나의 역사관을 공유하고 있다. 건국-산업화-민주화에 이은 선진화를 상정하는 뉴라이트식 ‘역사발전 단계론’이 그 핵심이다.

지난 3월25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교과서포럼 소속 교수들이 ‘한국 근현대사 대안 교과서’ 출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지난 3월25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교과서포럼 소속 교수들이 ‘한국 근현대사 대안 교과서’ 출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2003년 친일진상규명법 논란에서

뉴라이트 역사관은 △친북 척결 △자학사관 반대 △이승만·박정희 복권 △과거사 청산 반대 등을 키워드로 삼고 있다. 뉴라이트 단체 가운데 가장 먼저 만들어진 자유주의연대가 2004년 11월 창립 선언문에서 “노무현 정권은 자학사관을 퍼트리며 지배세력 교체와 기존 질서 해체를 위한 ‘과거와의 전쟁’에 자신의 명운을 걸고 있다“고 밝힌 것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뉴라이트 지식계의 대부 격인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와 이영훈 서울대 교수 등은 일제시대에 근대화의 초석이 닦였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을 덧붙였고, 남과 북을 하나로 묶어 조망하는 민족사관 대신 대한민국을 중심에 놓는 국가주의사관을 주창했다. 뉴라이트 운동은 이를 토대로 역사 논쟁을 촉발하면서 시민사회에 등장했다.

그 출발은 2003년 말이다. 그해 12월 국회 과거사진상규명특위가 과거사 진상 규명에 대한 4건의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특히 친일진상규명법이 논란의 핵심이 됐다. 이 시점을 고비로 보수 언론과 보수 단체들이 일제히 역사 영역에서 노무현 정부 및 진보 진영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민족을 배반하고 식민통치를 앞장서 대변했던 친일 행위가 여전히 역사의 뒤안에 묻혀 있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2004년 8월15일 광복절 경축사)을 보수 진영은 선전포고로 받아들였다. 이른바 ‘과거 청산 정국’에 대해 보수 진영은 ‘역사 바로 쓰기’로 대응했다. 2004년 말부터 자유주의연대 등 뉴라이트 단체들이 속속 등장했다.

‘식민지근대화론’도 이때부터 주목을 받았다. 최근 뉴라이트 계열의 몇몇 단체들이 “친일파의 꼬리표를 자처했다”며 이를 비판하지만, 당시만 해도 뉴라이트 진영의 전체적 분위기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용인하거나 적어도 방조하는 것이었다. ‘친일 청산’에 맞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논리였기 때문이다.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은 건국 과정과 산업화에 대해서도 재조명했는데, 이는 각각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 평가로 이어졌다.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반공주의와 독재정치의 역사적 의미를 복권시키는 효과를 냈다. 시민 개개인에 주목하기보다는 최고통치자의 업적에 관심을 두는 ‘영웅주의 사관’도 다시 등장했다.

이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식민지근대화론이다. 일제 통치가 한국의 근대화에 보탬이 됐다는 논리는 곧바로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했다. “뉴라이트가 일제 지배의 긍정적 면에 대해 논할수록 좌파의 재집권을 도와주는 길이 된다. ‘뉴라이트=친일=반민족’이라는 도식, 얼마나 잘못됐고 또 위험한가.” 2006년 12월, 뉴라이트 계열의 정치 웹사이트 ‘뉴라이트 폴리젠’에 올라온 칼럼이다. 뉴라이트 운동가들 스스로 식민지근대화론의 ‘휘발성’을 염려했던 것이다.

진보 진영을 일거에 결집시킨 효과

이 무렵부터 뉴라이트의 역사관 전체가 대중적인 지탄을 받기 시작했다. 실은 뉴라이트 단체와 논자들마다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의견이 다르지만, 여론은 ‘친일파 문제’와 선진화론을 한 두름에 엮어 인식했고, 이는 뉴라이트 진영 전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귀결됐다. 하종문 한신대 교수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영광의 역사로 그려내기 위해 동원한 국가주의가 오히려 (뉴라이트) 지지자들의 ‘원초적’ 민족주의를 자극하고 말았다”고 분석했다.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내세우면서 친일을 승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최근 뉴라이트전국연합 등이 시대정신 그룹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뉴라이트 운동이 여론 시장에서 인기를 잃고 있는 데에는 ‘친일파 논란’이 적잖은 영향을 줬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근현대사 교과서 논란은 뉴라이트에 반대하는 진보 개혁 진영을 일거에 결집시키는 효과를 내고 있다. 역사교사(10월19일), 역사교과서집필자(11월4일), 역사학자(11월11일) 등에 이어 역사학 전공 대학원생들까지 18일에 성명을 발표할 예정이다. 모두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의 역사관을 성토하고 정부의 역사 교과서 개정 작업을 규탄하는 내용이다. 일련의 사태는 국내 역사학계 전체의 ‘봉기’라 칭할 만하다.

보수적인 광복회가 건국절 기념 시도를 비판하고, 교과서와 관련해 역사학계가 집단 대응한 것에서 보듯이 사회 각계의 반발은 뉴라이트 진영의 예상보다 훨씬 차갑다. 뉴라이트는 이명박 정부라는 강력한 우군을 이용해 자신의 뜻을 펼쳤지만, 학문과 사상의 영역에서는 되레 소수파로 몰리게 된 것이다.

정권이 바뀌고 만개할 줄 알았던 뉴라이트 운동이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홍석률 성신여대 교수는 “과거와 달리 이제 한국 사회도 좌우 논쟁으로 치환될 수 없는 여러 영역이 생겨났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학문의 자율성”이라며 “뉴라이트가 일부 언론과 함께 인위적으로 역사 교과서 수정을 압박하고 나서자 학문의 자율성이 퇴보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한, 좌와 우를 막론한 많은 역사학자들이 반발하고 나섰다”고 말했다. 그는 “뉴라이트가 학계를 단결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역사를 핵심 고리 삼아 진보 진영을 공격한 것 자체가 뉴라이트 스스로의 존립 기반을 허무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초기의 뉴라이트는 시대정신으로서의 선진화와 사회를 보는 틀로서의 공동체 자유주의를 보여주면서 각광을 받았지만, 구보수 세력의 반공·국가주의에 식민지근대화론을 첨가하는 데 그친 역사관을 드러내면서 운동이 정체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뉴라이트라는 명칭에 걸맞지 않게 올드라이트와 거의 유사한 역사관을 전면에 부각시킨 것이 자가당착이 됐다는 이야기다. 일련의 과정은 올드라이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뉴라이트에 덧씌우는 일로 귀결됐다. 임혁백 고려대 교수는 “뉴라이트는 실용적·합리적 보수주의와 개인주의를 지향하는 젊은 보수 세대를 대변하기에는 지나치게 이념적이고 근본적이며 호전적”이라며 “이들의 이념 논쟁은 스스로 지양하고자 하는 세력(올드라이트)을 닮아가는 꼴이 됐다”고 평가했다.

올드와 뉴의 차이점 거의 없어

이와 관련해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지난해 11월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8개 보수 단체가 발표한 888개의 성명서를 분석했는데, 재향군인회·대령연합회와 같은 올드라이트 단체와 자유주의연대·뉴라이트전국연합과 같은 뉴라이트 단체 사이에 이념적 차별이 거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는 내용이었다. 뉴라이트는 지금 올드라이트와 무엇이 다른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까지 받고 있다. 다르지 않다면, 뉴라이트가 아니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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