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에서 명품의류업을 하고 있는 강영일(38) 사장은 요즘 고민이 깊다. 지난해 초 가입한 펀드 때문이다. 주거래은행의 프라이빗뱅커(PB)가 “30% 이상의 수익률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다. 텔레비전을 틀어도 펀드, 신문을 펴도 펀드, 사람을 만나도 펀드 이야기만 하던 시절이었다. 강 사장은 흔쾌히 20억원을 투자했다. 중국투자 상품 등 6개에 가입했다. 20억원은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빌딩을 담보로 대출받았다. 당시 한 달 이자는 1천만원 수준. 장래 수익을 감안하면 괜찮은 투자라고 생각했다. 상황은 1년6개월 만에 뒤집어졌다.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 이후 주가가 폭락을 거듭해 펀드는 반토막났다. 이자는 올랐다. 월 1400만원 수준이다. 강 사장은 “솔직히 장기 투자로 펀드를 계속 보유하면 손해는 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도 “문제는 그때까지의 유동성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강 사장은 전세계적인 경기 침체와 부동산 가격 폭락을 예고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건물 매각을 생각한다. 빌딩 시세는 80억원 선이라고 한다. 70억원 정도에 내놓으면 팔리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강 사장은 “70억원에 판다고 해도 10억원 정도를 양도세로 내고 은행 대출을 갚고 나면 오히려 밑지게 된다”며 “내년 상반기에는 더 큰 부동산 하락이 있다고 하니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해외 주식 투자, 2006년부터 급증참여정부에서 시작된 펀드와 해외 부동산 투자 촉진 정책은 강남 자산가들의 자산 포트폴리오(분산투자)를 해외로 넓혔다. 세계적인 경기 위축은 그들의 위기이기도 하다. 전 국민이 펀드로 손실을 입었다고 하지만, 부자들은 투자 원금이 큰 만큼 손실액도 훨씬 크다.
펀드평가사 ‘제로인’에 따르면, 10월16일 기준으로 순자산액 100억원, 설정 기간 1년 이상인 해외 주식형 펀드 246개 중 연간 손실률이 50%를 넘은 펀드는 89개로 전체의 36%를 차지했다. 신학용 민주당 의원이 밝힌 금융위원회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미래에셋 인사이트 펀드의 경우 지난해 10월31일 설정된 3개 펀드 수익률이 지금까지 평균 -50.04%를 기록했다. 미래에셋의 인사이트 펀드는 대부분 중국에 집중됐다.
김광수경제연구소 집계를 보면, 2005년까지 완만한 증가세를 보이던 한국의 해외 주식 투자는 2006년부터 크게 늘어나다 지난해 1052억달러로 폭증했다. 지역별로 보면, 베트남·인도네시아·인도 등 동아시아 쪽 주식 투자가 324억달러, 미국 쪽 243억달러, 중국 쪽 109억달러 등으로 집계된다. 이들 지역의 주가는 올해 초·중반부터 급락하기 시작했다. 중국 상하이지수는 지난해 10월의 최고점 대비 50% 이상 폭락한 상황이다.
손실은 해외 부동산에서도 났다. 코스닥 상장업체 등 3개 법인을 소유하고 있는 사업가 박아무개(48)씨는 중국 부동산에 직접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입었다. 서울 역삼동에 있는 자신 소유의 건물을 담보로 30억원의 위안화 대출을 받은 것은 지난해 2월. 중국 부동산의 거품이 충분히 빠졌다고 생각한 박씨는 베이징 외곽의 빌딩을 인수했다. 올림픽 특수로 부동산 가격이 다시 상승할 것으로 판단하고 내린 결단이었다. 결과는 당혹스러웠다. 지난해 2억3천만위안(당시 약 30억원)에 매입했던 빌딩은 지금은 시세가 35% 이상 하락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팔래도 살 사람이 없다. 위안화가 더 큰 문제다. 지난해 2월 당시 1위안당 130원 수준이던 것이 올해 10월 현재 200원으로 올랐다. 153%로 오른 것이다. 대출금도 환율에 덩달아 45억원으로 불어났다. 한 달 이자만 2800여만원에 이른다.
금융자산가 김범우(44)씨는 최근 3년간 미국 캘리포니아주와 서울 강남을 오가며 투자 기회를 모색해왔다. 김씨는 미국에서의 체류 비용이 아까워 지난해 8월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 140만달러짜리 단독주택을 샀다. 매입 당시 환율은 달러당 900원대 초반. 한국돈 12억원 남짓이었다. 미국 금융상품에도 크게 손을 댔다. 2008년 10월 현재 샌디에이고 집은 80만달러 이상을 받기 힘들다고 했다. 빡빡한 미국의 보유세도 시름을 더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보유세는 1%다. 매입 당시 가격을 기준으로 부과된다. 매년 1만4천달러를 보유세로 물어야 한다. 김씨는 “부동산 가치가 폭락한 상황에서 미국 정부에 매달 세금으로 150만원씩 내는 것이 결코 유쾌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김씨는 미국 금융상품에 투자한 액수는 밝히지 않았지만, 상당한 손실을 본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주변에서는 김씨의 현금성 자산을 500억원 이상으로 평가해왔다.
‘와타나베 아줌마’ 자금 2조엔나성린 한나라당 의원이 공개한 한국은행 자료를 보면, 지난 2006년부터 2008년 8월까지 국내 거주자가 신고한 해외 부동산 투자 총액은 23억6천만달러에 이른다. 지난해 미국 부동산 투자액은 4억8380만달러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내국인이 해외 부동산을 처분한 경우는 지난 8월 말 현재 누적 기준으로 8120만달러에 불과했다.
‘회광반조’(廻光返照)라고 했다. 해가 지기 직전 햇살은 찰라에 환해진다. 꺼지기 직전 촛불이 확 타오르듯. 한국인들은 지난해 꺼지기 직전의 해외 부동산과 주식의 불빛을 보고 일제히 부나방처럼 몰려갔다.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이들 자금의 상당수는 현금 유동성이 넉넉한 강남에서 왔을 것이다.
외국 돈으로 국내 투자에 몰두한 이들도 있다. 서울 강남 지역의 개업의들은 엔화 자금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개업 중인 의사 김아무개(43)씨는 엔화 자금의 폭탄을 제대로 맞았다. 병원을 가끔 들르던 엔화 브로커의 권유로 엔화 대출을 받은 것은 지난 2002년. 이율은 1.8%였다. 의사면허증과 사업자등록증만 내면 부동산 가격의 60%까지 대출이 이뤄졌다. 김씨는 이 돈으로 대치동과 압구정동의 아파트 2채를 샀다. 받은 대출금은 모두 2억엔. 당시 환율(100엔당 800원)로 16억원 정도였다. 여기에 국내 제2금융권 자금을 추가로 대출받아 손쉽게 아파트를 살 수 있었다. 300만원에 못 미치는 엔화 이자는 ‘껌값’이었다. 김씨는 주변의 의사들에게도 엔화 자금을 권했다.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6년부터 이자가 3%대로 오르기 시작했다. 올해 10월 현재의 이율은 5%에 이른다. 엔화 환율 역시 2002년 800원에서 지금은 1300원대로 올랐다. 갚아야 할 원금은 26억원으로 10억원이 늘었다. 월 이자도 1천만원 선이다. 문제는 더 이상 대출 연장이 안 된다는 것이다. 김씨는 “엔화 자금은 대출 기간이 1년이라 연초에 대출 연장 계약을 하는데, 내년 초에는 상환을 하라고 해서 눈앞이 캄캄하다”며 “아파트를 팔아서 상환해야 하는데 아파트 가격이 워낙 나빠서 문제”라고 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 남성클리닉을 운영하는 김정민 원장은 “주변 강남권 의사 중에서 그런 식으로 엔화 대출 안 받는 이들을 못 봤다”며 “강남권 의사들은 올 연초부터 쏟아지는 엔화 폭탄에 대부분 ‘전사’ 상태”라고 말했다. 2000년대 들어 시작된 병·의원의 고급화 바람도 엔화 대출에 힘입은 바 크다. 성형외과와 피부과, 안과들은 ‘고객’ 유치를 위해 내부를 화려하게 꾸몄다. 의사들은 대부분 엔화 자금으로 메웠다. 흔히 ‘엔캐리’라고 불리는 엔화 자금은 2001년부터 국내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엔화 자금의 별명은 ‘와타나베 아줌마’(Mrs. Watanabe)다. 무이자에 가까운 엔화 대출을 받아 고수익·고위험 해외 투자에 나선 일본 개인 투자가들의 돈이기 때문이다. 와타나베 아줌마는 한국에서는 강남 의사들을 선택했다. 담보 능력이 좋은 모텔(러브호텔) 소유주와 중·대형 상가 소유주도 좋은 대상이었다. 금융업계에서는 그간 은행·보험·제2금융권 등이 국내에 조달한 엔화 자금이 2조엔(약 26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와타나베 아줌마는 이제 세계적인 경기침체를 피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고향(일본)으로 일제히 돌아갈 채비를 꾸리고 있다. 귀국 시점은 올 하반기와 내년 초다. 강남에서 또 한 번의 비명이 터지는 순간이 될 것이다.
명품점 선물용 소비 감소 시작강남 부유층들에게 닥친 이런 ‘시련’은 소비 침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강영일 사장은 “매일 매장별 매출을 확인하고 있는데 아직 매출이 감소세로 돌아서고 있지는 않다”면서도 “내년 초에 급격한 하락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여 강남 쪽 매장을 철수하는 것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명품 수입 업체인 ㄴ사의 한 관계자는 “현대아파트 압구정점 등 ‘역사와 전통이 있는 부자들’의 백화점은 명품점 매출에 크게 영향이 없지만, 넥타이와 스카프 등 소품류 매출이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며 “이들 제품은 중산층들이 선물용으로 많이 사는 것이라, 중산층들의 소비 감소는 이미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명품 의류와 화장품을 수입해 주요 백화점 명품관과 면세점에 납품해왔다. 그는 “명품 업계에서는 내년 초부터 본격적인 찬바람이 분다는 말이 나온다”며 “우리 같은 수입 업체는 경기 불황에 따른 매출 감소에 환차손이 겹쳐 조만간 구조조정이 있을 것이란 말도 나온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강남권에서 내수 감소가 본격화되면, 이는 국내 내수시장 전체에도 찬물을 끼얹게 될 가능성이 높다. 삼성그룹의 한 임원은 “솔직히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때 강남권에서 ‘IMF 포에버’(IMF여, 영원히)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유층들이 흥청망청하면서 위화감 조성이 많았지만, 중산층의 소비 심리를 자극하는 효과가 적잖았다”며 “그런데 이번에는 펀드와 부동산 피해가 큰 강남권의 소비 성향이 더 위축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
글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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