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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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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는 바람개비

앞만 보고 달리다 독선 흘러… 금융위기 뒤 첫 언론공개 발언 “평생 한번 올까말까 한 기회”
등록 2008-10-28 17:20 수정 2020-05-03 04:25

‘로·즈·버·드’
오선 웰스의 은 신문계 거물의 의문의 죽음을 풀어가는 내용을 그린 흑백영화다. 권력과 재물을 쥐고 흔든 케인이라는 노인이 황폐한 대저택 침실에서 ‘로즈버드’라는 의문의 말만 남긴 채 고독하게 죽는다. 한 기자는 로즈버드라는 말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케인의 생애를 추적한다. 케인과 관계가 있던 사람들의 회상을 통해 케인의 인물과 생애를 보여준다.
‘바·람·개·비’
도 인사이트 펀드를 내놓은 박현주(49) 미래에셋 회장을 추적해봤다. 투자의 패러다임을 저축과 부동산에서 펀드로 바꾼 박 회장을 믿고 펀드를 산 투자자들. 그들은 지금 극도의 불안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박 회장은 시장 상황에 어떠한 설명도 없이 묵묵부답이다. 투자자들은 그의 말을 듣고 싶어 한다. 중국·인도 펀드는 계속 갖고 있어야 하는지, 인사이트 펀드는 왜 몰빵을 했는지 등등이 너무 궁금하다. 그에 관해 취재를 하며 한 취재원한테 “박현주는 바람개비 같은 사람이다”라는 얘기를 들었다. 박 회장과 바람개비는 어떤 관계일까?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이 2005년 3월 서울 힐튼호텔에서 ‘한국경제 성장동력과 글로벌 기업의 신경영 전략’이란 주제로 연설을 하고 있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이 2005년 3월 서울 힐튼호텔에서 ‘한국경제 성장동력과 글로벌 기업의 신경영 전략’이란 주제로 연설을 하고 있다.

“박현주 회장님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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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신가요?” 박 회장의 목소리였다.

“전 정혁준 기자인데요. 저, 투자자들에게….”

“잘못 거셨어요.” 뚜뚜뚜~. 그렇게 그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10월23일 오전이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일단 미래에셋 홍보실, 그리고 박 회장과 한때 같이 일했던 사람들을 접촉했다. 박 회장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이날 오후, 홍보실에서 반응이 왔다. 홍보실의 한 간부가 박 회장과 통화한 내용을 직접 수첩에 적었다며 수첩을 들고 로 찾아왔다. 다음은 박 회장의 말한 내용이다. 금융위기 뒤 박 회장이 언론을 통해 투자자들에게 처음으로 내놓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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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러운 때지만 지금은 참고 가야 한다. 인내하며 과감히 투자할 수도 있다. 이렇게 어려울 때 오히려 투자를 해 성공한 경험이 있다. 지금은 100년 만의 위기라고들 한다. 하지만 위기는 또 다른 기회이기도 하다. 거꾸로 뒤집어 얘기하면 개인의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투자) 기회다.” 박 회장은 여전히 남들과 다른 ‘소수의 관점’으로 현재의 시장을 보고 있었다.

박 회장과 직접 통화한 내용 전언

10월24일엔 박 회장이 영업부에서 직원들 앞에서 했다는 말이 메신저로 나돌았다. 환율과 은행, 주식, 부동산, 중국 등 쟁점에 대한 전망을 번호 차례로 요약 정리한 것이었다. 중국과 증시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 눈에 띄었다. 이에 대해 미래에셋 쪽은 “영업부가 가까워 회장님이 왔다 갔다 할 수는 있지만, 그런 얘기를 한 적은 없다”고 강력히 부인했다.

박 회장은 서울 여의도 미래에셋 빌딩 7층 회장실로 출근한다. 최근에는 여러 사람을 만나 현재의 증시와 시장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듣고 있다고 한다.

박 회장이 기자회견이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밝힐 의향은 있는지도 물어봤다. 미래에셋 간부는 “지금 시장이 비이성적인데, 회장님이 기자회견을 한들 말꼬리만 잡는 상황이 될 것이다. 때가 되면 밝힐 것이다. 하지만 당분간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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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사람과 접촉했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의원 보좌관이다. “박 회장은 금융계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무위에선 박 회장을 증인으로 불러 중국 등 일부 지역에 과도한 투자를 집중한 이유를 따져 물으려 했다. 하지만 정무위 의원들은 이곳저곳에서 “박 회장을 빼라”는 로비에 시달렸다. 한 의원 보좌관은 “기자들이 엄청나게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 의원이 자산운용 업계 현실을 모른다는 식으로 각을 세우더니 ‘박 회장은 증인에서 빠져야 되지 않느냐’고 따져 묻더라. 마치 미래에셋 직원이 말하는 것 같았다. 미래에셋 계열사 사장들은 의원들을 찾아가 전방위로 로비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실제 경제지들은 ‘심각한 금융위기인데 정치권에서 뭘 모르고 바쁜 사람들을 부른다’는 비판 기사를 썼다.

미래에셋 지배구조(이미지를 클릭하면 좀 더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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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임직원 로비로 국감 증인서 빠져

10월16일 열린 금융위원회 국감에는 우리투자증권 박종수 사장과, KB금융지주의 정기영 이사회 의장과 김중회 사장, 우리CS자산운용 이정철 사장, 리먼브러더스 김영주 서울지사장 등 금융권 최고경영자(CEO)가 대거 증인으로 채택돼 아침 일찍부터 국회에 출석했다. 하지만 박 회장은 국감 증인에서 쏙 빠졌다. 한나라당 소속의 한 의원은 “애초 국감 증인 출석 리스트 후보군에 박 회장 등 미래에셋 경영진 일부가 포함됐으나 최종 선정 과정에서 배제됐다”고만 말했다.

10월24일 국감에선 조문환 한나라당 의원이 “미래에셋이 지난 10년간 굴지의 금융그룹으로 성장한 데는 1인 지배하의 각종 부당거래와 비리, 금융당국의 비호, 지난 정권과의 유착 등이 밑거름 됐다. 지난 수년간 제기돼 온 각종 비리의혹에 대해 전면적인 재조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 의원은 “지난해 펀드광풍을 일으킨 인사이트 펀드는 투자자보호를 위해 최소한의 투자기준도 없는 ‘묻지마’ 투자와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금융당국이 상품판매를 방조해서 사실상 특혜를 줬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박 회장은 ‘통찰’과 ‘몰빵’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왔다. 그는 1997년 미래에셋캐피탈을 세웠다. 박 회장은 98년 초 시중 금리가 연 30%를 향해 치닫고 있을 때 증시 폭락과 금리 인하, 채권 가격 급등을 예상하고 미래에셋 운용자금 200억 원을 채권에 풀베팅했다. 결과는 대성공. 예상했던 대로 시중 금리가 20%대로 급락하면서 채권 값이 급등해 50억 원을 챙겼다. 99년에는 24억 원을 투자했던 포털업체 다음의 주가가 6개월 만에 폭등하며 1천억 원에 가까운 매매차익을 가뿐히 거둬들였다.

98년에는 미래에셋자산운용을 설립한 뒤 자신의 이름을 붙인 뮤추얼펀드를 내놓는다. ‘박현주 1호’였다. 박 회장의 주식운용 능력에다 증시 활황까지 겹쳐 100%가 넘는 수익률을 올렸다. 그는 당시 ‘미다스의 손’으로 불릴 정도로 상한가를 올렸다.

하지만 그는 곧 하한가의 쓴맛도 봐야 했다. ‘박현주 2호’는 거품이 꺼지고 있던 통신·벤처 기업에 몰빵해 펀드 수익률이 마이너스가 됐다. 주주들은 “지나친 손실을 충당하기 위해 박 회장과 운용담당자의 재산이라도 내놓으라”며 거세게 항의했다. 2000년 12월30일은 박 회장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그날 여의도 굿모닝증권빌딩에서 박현주 2호 주총이 열렸다. 한 임원은 “결과가 달라질 것도 아닌데, 분위기를 보니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라며 주총장에 가지 말 것을 권했다. 그렇지만 박 회장은 나쁜 자리일수록 꼭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참석했다. 박 회장은 자서전 라는 책에서 “이익이 났든 손실이 났든 최선을 다하는 선량한 관리자로서 우리의 책무를 설명하고 싶었다. 나는 이것이 자산운용 시장을 투명하게 가꾸는 과정이라고 믿었다”라고 썼다.

초기 멤버들 “부담된다” 인터뷰 거절

하지만 한 투자자는 “책을 읽어보니 박 회장이 그렇게 썼던데, 인사이트 펀드가 반 토막이 나고 있는 지금은 왜 모습을 안 드러내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그는 나아가 “꽃은 돈이 없는 사람에게도 기쁨을 주지만 돈은 있는 사람에게만 기쁨을 준다. 꽃은 순수한 영혼이 들어가 있다. 하지만 돈은 영혼이 없는 거다”라며 비판을 퍼부었다.

서울 여의도에 자리잡은 미래에셋 금융플라자 여의도점.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서울 여의도에 자리잡은 미래에셋 금융플라자 여의도점.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박 회장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찾았다. ㄱ 대표, ㄱ 본부장, ㅅ 사장, ㅅ 대표, ㅇ 대표 등등이다. 박 회장과 일했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투자자문 회사나 증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전화를 하고 전자우편을 보냈으나 인터뷰는 번번이 거절당했다. 모두 입을 닫았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서로 일하다 부딪히면 이런저런 안 좋은 기억도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기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한 증권사 부장은 “박 회장과 일했던 사람들이 박 회장에 대한 추억을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박 회장과 미래에셋이 시장에서 너무 컸다. 미래에셋이 금융계에선 권력이다. 어차피 금융계 바닥에서 일하려면 미래에셋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2001년 초 박 회장은 갑작스레 훌쩍 미국으로 떠났다. 언론에는 그가 미국에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공부하러 갔다고 소개됐다. 하지만 뒷말을 남겼다. 출국 전까지만 해도 “연내에 국내에서 영업 중인 50여 개 증권사 가운데 5위권에 오르기 위해 열심히 뛰겠다”며 의욕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저조한 투자실적에 따라 피신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한편에선 정치권 유착설을 얘기한다. 당시 벤처 관련 정경유착 사건이 터졌고 증시 언저리에선 정치자금을 준 사람 가운데 하나로 박 회장의 이름이 오르내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래에셋 쪽은 펄쩍 뛴다. 박 회장은 정치권과 선을 긋고 사업을 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박 회장은 지나치게 공격적인 운용을 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때문에 강세장에선 수익률 상승효과를 보지만 하락장을 만나면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하지만 박 회장의 결정에 대해 미래에셋 내부에선 아무도 “노”라는 의견을 내지 못한다. 미래에셋 지배구조가 박 회장 1인 중심으로 돼 있다. 현재 박 회장은 미래에셋자산운용과 미래에셋맵스자산운용의 최대 주주다. 또 미래에셋캐피탈은 미래에셋증권과 미래에셋생명의 대주주이기도 하다.

박 회장은 정체가 불분명한 KRIA라는 회사의 지분 43.68%도 갖고 있다. KRIA는 부동산 관리회사로 돼 있는데, 박 회장과 부인 김미경씨 등 사실상 박 회장 가족 소유 기업이다. KRIA는 또 미래에셋캐피탈과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박회장은 정말 공부 엄청나게 한다”

미래에셋에서 박 회장은 절대적이다. 미래에셋 한 직원의 말이다. “한 미래에셋 계열사 사장은 박 회장에게 90도 각도로 인사를 한다. 사장이 그렇게 하니, 다른 임원들도 엉겁결에 따라 한다. 다른 회사에선 임원들이 회장에게 목례 정도를 한다고 들었다. 사장이란 사람이 박 회장의 승용차 문을 열어주더라. 거의 조폭 같은 문화다.”

박 회장을 위한 변명도 있다. 박 회장과 한때 같이 일했던 사람의 전언이다. “박 회장은 정말 공부를 엄청나게 한다. 그게 장점이자 단점이다. 그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 아랫사람들도 자기처럼 해주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박 회장은 밑에 있는 직원들을 답답해할 때가 많았다. 박 회장은 ‘나는 이렇게 공부 열심히 하는데, 너희는 왜 그렇게 못하냐’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겐 박 회장이 대단히 독선적인 사람으로 보인다.”

박 회장은 1991년 33살 때 한신증권(현 한국투자증권) 중앙지점의 최연소 지점장이 됐다. 박 회장은 이 지점에서 전국 증권사 지점 중 1위의 약정고를 올렸다. 당시 지점훈이 바로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다’였다. 박 회장의 바람개비는 ‘아름다운 자본시장’에 대한 무한 도전과 질주였다.

영화 의 마지막 장면. 어린 시절 케인이 부모와 헤어지기 전까지 타고 놀던 썰매가 숨진 케인의 저택 벽난로에서 타들어가는 장면이 잡힌다. 썰매에는 ‘로즈버드’가 찍혀 있다. 인간의 순수성을 타락시킨 산업자본주의적 욕망에 대한 염증을 상징했다고 한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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